책 한 권을 사는 뜻

[시골에서 헌책방마실] 서울 <기억속의 서가>

등록 2015.04.21 13:33수정 2015.04.2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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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홍은동 헌책방 <기억속의 서가>
02) 394-4853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197-3
http://cafe.naver.com/daeyang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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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한쪽에 조용히 깃든 헌책방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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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어귀에 있는 작은 간판 하나. ⓒ 최종규


책방에는 책을 사러 갑니다. 책방에는 내가 읽을 책을 사러 갑니다. 내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에 동무가 될 만한 책을 만나고 싶기에 책방에 책을 사러 갑니다.

책을 사는 뜻을 헤아리면서 책방으로 갑니다. 책을 사서 읽는 뜻을 생각하면서 책방 나들이를 갑니다. 어떤 책을 만날는지 모르기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방 나들이를 갑니다.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는 숨결을 새로 가다듬으려는 뜻으로 책을 만나려고 합니다. 책을 읽어서 마음을 가꾼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동안 숨결을 새로 가다듬고, 책을 읽는 사이 넋을 새로 북돋우며, 책을 읽고 난 다음 생각을 새로 추스른다고 느낍니다. 책이 우리를 기쁨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책을 읽는 동안 스스로 기쁨이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서울 홍은동에 깃든 '기억속의 서가'를 찾아갑니다. 눈부신 햇살이 뉘엿뉘엿 기우는 저물녘에 찾아갑니다. 책방지기한테 인사를 하고, 인사를 받고, 가방을 내려놓으며, 책시렁을 빙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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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곳에서. ⓒ 최종규


책방에 들어왔으니 책내음을 맡습니다. 책내음은 모두 다릅니다. 책을 지은 사람 손길에 따라 책내음이 다르고, 이 책을 처음 장만해서 읽은 사람 손길에 따라 책내음이 또 다릅니다.

책 한 권은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책을 지은 사람이 오래도록 살아낸 나날을 되새기면서 갈무리한 이야기가 책 한 권으로 스밉니다. 책을 지은 사람은 모든 슬기와 꿈을 사랑스럽게 담아서 이야기를 짓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내 이웃이 온 삶을 들여서 갈무리한 슬기로운 꿈'을 기쁘게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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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콜로시 겉그림 ⓒ 최종규

<로널드 시걸/김명식 옮김-토콜로시>(소나무, 1990)라는 책을 손에 쥡니다. 이 조그마한 책이 거쳐 온 길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1990년이면 내가 중학교를 마칠 무렵입니다. 한창 입시공부에 빠지던 그무렵에는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스물 몇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이런 책을 알아봅니다. 나로서는 스물 몇 해 만에 내 앞에 나타난 '새로운 책'입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책입니다.

사진책 <이기식-잉카의 웃음, 잉카의 눈물>(작가, 2005)을 구경합니다. 몇 해 앞서도 이 책을 한 번 장만했습니다. 이웃한테 선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손에 쥡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은 이기식 님은 "이 책에 실린 사진은 대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135쪽)" 하고 말하는데, 대단한 사진이 아니더라도, 잉카에서 만난 이웃을 살가이 느끼면서 빚은 글과 사진은 더없이 애틋하면서 사랑스럽구나 싶습니다.

.. 리마 시내는 내가 본 어떤 다른 나라의 도시보다도 깨끗하다. 물론 유럽의 작은 도시들보다 깨끗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소득 2천불 남짓한 나라의 수도라는 걸 생각하자. 어느 부자 나라의 수도가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리마는 세계 수준급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연중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가로수와 공원은 정말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야자수 그늘 아래 그냥 눕고 싶다 ..  (68쪽)

한국에서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같은 말이 저절로 튀어나올 만한 곳은 어디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마 시골이라면 이런 데가 많겠지요. 그러니까, 시골이 아닌 도시 가운데, 도시에서도 큰도시 가운데 이만한 곳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야자수 그늘'에서 쉴 수 있다고 하는 그곳처럼, 한국에 있는 큰도시는 '나무 그늘'이 있을까요? 싱그럽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나무 그늘을 누릴 만한 큰도시가 한국에 있을까요? 높은 건물과 아파트와 주차장이 아니라, 풀밭이 있고 나무가 우거지는 고즈넉한 쉼터가 큰도시 한복판 곳곳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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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모습 ⓒ 최종규


<최순호-조선족 이야기>(민음사, 2004)라는 책을 손에 쥡니다. 2004년에 나온 책에서 흐르는 조선족 이야기는 2020년대를 바라보는 요즈음하고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올 무렵 '가구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는 마을은 이제 가뭇없이 사라졌을 수 있습니다.

참말 마을 하나는 아주 빠르게 사라집니다. 마을 하나가 서기까지 무척 오랜 나날이 걸리지만, 마을 하나가 사라질 때에는 대단히 빠르게 사라집니다.

.. 개혁 개방의 바람을 타고 연변을 비롯한 변방의 젊은이들은 이미 고향을 등지고 대도시로 향하고 있다. 두만강 국경에 인접한 용정시의 한 마을. 현재 이 마을의 총각은 모두 40여 명 정도이다. 한국 바람으로 인해 미혼 여성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 … 300호가 넘던 마을은 한국 바람이 분 뒤 가구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젊은 여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총각들은 술추렴을 하거나 마작을 즐기는 게 일이다..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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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손길은 ⓒ 최종규


마을이 사라지면 도시가 커집니다. 도시가 커지는 만큼 마을이 사라집니다. 너무 마땅한 소리이기는 한데, 도시가 커지려면 시골이 줄어야 합니다. 논밭을 밀어야 도시가 커질 수 있고, 들과 숲을 없애야 도시가 커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푸르게 우거진 나무를 베어서 없애야 도시가 생깁니다. 도시가 생기거나 커지는 만큼, 도시사람뿐 아니라 시골사람도 '맑은 바람'하고 멀어집니다. 도시가 늘거나 커지는 대로, 도시뿐 아니라 시골 삶자락도 '메마른 바람'이 됩니다.

한국과 연변이 서로 아름답게 살아갈 길은 어디에 있을까 하고 그려 봅니다. 앞으로도 경제개발을 더 북돋우려고 한다면, 한국에서도 도시는 더 커질 테고, 중국 조선족 삶자리도 더 줄어들 테지요. 한국에서는 한국대로 시골과 들과 숲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테며, 중국에서도 수수한 시골마을 삶자리가 줄어들거나 사라질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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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보고서 겉그림 ⓒ 최종규

<일본 우토로지역 주민의 도일 배경에 관한 조사>(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위원회, 2006)라고 하는 보고서를 봅니다. 이런 보고서가 있었군요. 일본 우토로마을은 요즈음 어떻게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국 정부에서도 일본 우토로마을을 돕는 정책을 내놓는다고 했는데, 이 정책을 잘 펼치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파멜라 린든 트래버스(글), 메리 쉐퍼드(그림)/우순교 옮김-우산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시공사,1996) 1권과 2권을 봅니다. 요즈음 집에서 아이들하고 영화 <메리 포핀스>를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글로 된 <메리 포핀스>를 읽으려면 더 있어야 할 테지만, 눈에 뜨인 김에 장만하자고 생각합니다.

.. 존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어, 바람이 얘기하고 있어. 들어 봐. 메리 아줌마, 우리가 크면 정말로 저 소리를 못 들어요?" 메리 포핀스가 말했다. "물론 듣지, 하지만 이해는 못할 거야." 그러자 바브라는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존도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메리 포핀스는 현명하게 말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찌르레기가 약을 올렸다. "쟤들 좀 봐, 쟤들 좀 봐! 곧 죽을 것처럼 울고 있네! 알 속에 있는 찌르레기 새끼들도 너네들보다는 똑똑하겠다. 맙소사, 쟤들 좀 봐!" ..  (2권 44쪽)

책과 영화는 다릅니다. 책은 책대로 흐름이 있고, 영화는 영화대로 흐름이 있습니다. 책을 바탕으로 찍은 영화에는, 책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깃들 수 없습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를 곰곰이 되새겨 봅니다. 얼추 서른 해 앞서 처음으로 <메리 포핀스>를 책으로 읽던 어린 나날도 돌아봅니다. 어릴 적에 이 책을 다른 번역판으로 읽을 적에 '바람 이야기 듣기'를 다루는 이 대목도 읽었는지 곰곰이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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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탑 한쪽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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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한쪽 ⓒ 최종규


어린이는 '바람 얘기'를 들을 수 있지만 어른은 '바람 얘기'를 들을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참 생각합니다. 참말 모든 어른은 '바람 얘기'를 못 들을까요? 아마 거의 모든 어른은 '바람 얘기'를 못 들으리라 느낍니다. 바람뿐 아니라 새나 풀벌레나 숲짐승이나 꽃이나 구름이나 무지개나 별이 저마다 주고받는 얘기를 못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얘기를 귀여겨들으면서 삶을 짓는 어른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른이 되어도 '바람 얘기'를 듣고, 어떤 사람은 어린이일 적에도 '바람 얘기'를 못 듣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이일 적에도 '바람 얘기'뿐 아니라 '해님 얘기'라든지 '꽃님 얘기'도 못 듣습니다. 이런 얘기하고는 아예 가로막히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작은 사진책 <신현림(글),유범주(사진)-우리에게도 따뜻한 날이 올까>(세미콜론,2005)를 살펴봅니다. 신현림님은 끝말에서 "결국 생태 사진작가 유범주 선생님이 우리나라 및 일본 훗카이도에서 찍은 600컷이 넘는 백조들의 생태 사진에서 50여 컷을 골랐다. 찬찬히 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순서를 잡고 사진 트리밍도 하면서 글을 써 가기 시작했다."와 같은 이야기를 적습니다.

'흰고니'가 춤추는 사진에 맞추어 조곤조곤 읊는 싯말을 천천히 읽습니다. 흰고니 사진이 들려주는 따뜻한 바람을 생각하고, 흰고니 사진을 살피면서 싯말을 읊는 따뜻한 바람을 헤아립니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야 따뜻한 날이 되기도 할 테지만, 날씨 못지않게 내 마음이 따뜻한 숨결이 되어야 비로소 따뜻한 날이 된다고 느낍니다. 날씨는 따뜻하더라도 내 마음이 따뜻한 숨결이 아니라면, 마음도 차갑고 몸도 차가운 채 언제나 쓸쓸한 하루가 된다고 느낍니다.

시골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들과 즐길 그림책을 몇 가지 더 고른 뒤 책값을 셈합니다. 오늘 장만하는 책은 어떤 이야기꾸러미가 될는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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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을 만나는 책방 ⓒ 최종규


책방을 나서니 해가 넘어갑니다. 서울 밤하늘에는 별빛보다 불빛이 밝고, 서울에 있으면 별빛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별빛을 찾아보기 어려우니 별빛을 생각하기 어려울 테고, 어디이든 불빛이 밝으니 불빛을 따라서 움직이리라 느낍니다.

아이일 적에는 '바람 얘기'를 듣는다면, 아이일 적에는 바람처럼 홀가분한 마음과 몸이 되어 뛰놀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어른이 되면서 '바람 얘기'를 못 듣는다면, 어른으로 나아가면서 몸과 마음이 무거워지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바람을 늘 마주하기에 바람이 속삭이는 얘기를 들을 테고, 나무와 늘 마주한다면 나무가 속삭이는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바람을 잊고 다른 곳에 마음을 기울이니 바람 얘기를 못 들을 테고, 나무를 거의 볼 일이 없다면 나무가 들려줄 말도 못 들을밖에 없습니다.

책에도 이야기가 깃듭니다. 바람이 서로 속삭이면서 우리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책도 서로 속삭이면서 우리한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마음을 기울을 적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책에 있습니다. 마음으로 읽고 나누는 이야기가 책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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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지기 책상.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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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살피면서 책 한 권을 만난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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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을 새로 쓴다. <사전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우리말 꾸러미 사전》《우리말 글쓰기 사전》《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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