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돼 학원을 없애겠다"... 아이들은 놀고싶다

[현장] 어린이 놀이헌장 원탁회의... '놀 권리'를 논하다

등록 2015.04.25 21:51수정 2015.04.2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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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비행기 날리는 아이들 25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강원도교육청과 대한민국교육원탁회의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어린이 놀이헌장 원탁 토론회의' 참석자들이 바람을 적은 노란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행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 손지은


"어른들의 과도한 욕심으로 요즘 아이들은 스트레스에 빠져 삽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좋은 직업을 위해 놀지 말고 공부해야 한다'며 학생들을 힘들게 합니다. 저희 어린이들은 놀이의 자유를 되찾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놀이'가 고픈 모습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단상에 오른 어도헌(서울 월촌초6) 어린이의 말이 끝나자 전국에서 모인 200여 명의 초등학생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박수가 터져나왔다. 빠진 앞니를 드러내며 '와아' 하고 환호성을 보내기도 했다. 크게 동감했는지 작은 손을 머리 위로 들고 박수를 치는 아이도 있었다.

25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강원도교육청과 대한민국교육원탁회의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어린이 놀이 헌장 원탁 토론회의'가 열렸다. 오는 5월 4일 '어린이 놀이헌장' 선포를 앞두고 직접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였다. 이 헌장은 올해 1월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이 신년사에서 처음 제안한 것으로 현재 17개 시·도교육감이 만장일치로 뜻을 모아 추진 중이다.

전국의 교육감이 만장일치로 합의할 정도로 아이에게 놀이는 중요한 '권리'다. UN은 아동권리협약 31조에 "놀이와 오락 활동에 참여할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라고 명시해두기도 했다. 영국은 지난 1992년에 '어린이 놀이 헌장'을 제정했다. 아이들이 사회경제적 지위나 인종·장애 등에 상관없이 '놀 권리'를 충분히 누리도록 국가가 지원하자는 취지다.

반면, 한국에서 '놀 권리'는 아직 낯선 존재다. 이는 수치로도 분명히 드러난다. 지난 2013년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한국아동종합실태'를 보면 우리나라 아동 삶의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60.3점을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꼴찌다. 아이들에게 놀이 공간과 시간을 충분히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놀이는 숨구멍"...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학원' 그리고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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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가 고픈 아이들 25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강원도교육청과 대한민국교육원탁회의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어린이 놀이헌장 원탁 토론회의'에서 '우리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은?'이라는 물음에 대한 한 아이의 답. 이날 모아진 아이들의 의견은 오는 5월 4일에 선포되는 '어린이 놀이헌장'에 반영된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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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놀면 행복할까?' 25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강원도교육청과 대한민국교육원탁회의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어린이 놀이헌장 원탁 토론회의'에서 '우리는 어떻게 놀면 행복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한 아이의 답. 이날 모아진 아이들의 의견은 오는 5월 4일에 선포되는 '어린이 놀이헌장'에 반영된다. ⓒ 손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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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놀이 헌장 원탁 토론회의' 25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강원도교육청과 대한민국교육원탁회의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어린이 놀이헌장 원탁 토론회의'. 이날 모아진 아이들의 의견은 오는 5월 4일에 선포되는 '어린이 놀이헌장'에 반영된다. ⓒ 손지은


이날 아이들은 8명씩 원탁에 둘러앉아 가감 없이 '놀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25개 테이블에 나눠앉은 아이들은 한 명씩 배치된 교사의 도움 아래 '놀이란 OO이다' '우리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은?' '우리는 어떻게 놀면 행복할까?' 등을 주제로 생각을 모았다. 각자가 생각하는 답을 짧은 단어로 접착 메모지에 적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놀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이들은 대부분 '재미'와 '즐거움'을 꼽았다. 제법 철학적인 답변이 나오기도 했다. 16번 테이블에 앉은 3학년 이준화 어린이는 "놀이는 삶"이라는 친구의 답에 맞장구를 치며 "놀이가 없으면 삶에서 웃을 일이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4번 테이블에 앉은 6학년 김민서 어린이는 "놀이는 슬픔을 막아주는 방패"라고 적었다. "놀이는 숨구멍"이라고 정의한 어린이도 있었다.

회의 도중 화장실에 가는 등 다소 산만했던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변한 순간은 '우리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과 '행복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을 꼽을 때였다. 사회자가 "우리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이 뭔가요?"라고 묻자 아우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각 테이블에서는 전지를 펼쳐놓고 비슷한 답변을 쓴 메모지를 모아 마인드맵을 만들었다. 키가 작아 테이블 한가운데까지 손이 닿지 않는 아이들은 까치발로 서거나, 아예 테이블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국적을 바꾼다" "이민 간다"... 공부에 지쳐 떠나고 싶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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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놀이 헌장 원탁 토론회의'에 참석한 어린이 25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강원도교육청과 대한민국교육원탁회의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어린이 놀이헌장 원탁 토론회의'에 참석한 한 어린이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모아진 아이들의 의견은 오는 5월 4일 선포될 예정인 '어린이 놀이헌장'에 반영된다. ⓒ 손지은


약 20분 동안 토의 시간이 끝나고, 각 테이블에서 완성된 마인드맵을 모아 한쪽 벽에 나란히 붙이자 아이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또렷하게 드러났다. 먼저 '우리의 놀이를 방해하는 것'으로는 '공부'와 '숙제' '학원'이 가장 많이 꼽혔다. 이들 못지않게 놀이의 방해꾼으로 지목된 것은 '부모'였다. '엄마' '잔소리' '눈치' 등도 마인드맵에서 큰 영역을 차지했다.

특히 고학년(4학년~6학년)들이 남긴 메모지에는 성적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읽혔다. 여학생이 쓴 것으로 보이는 파란 메모지에는 "놀고는 싶은데 놀면 공부가 뒤쳐질까봐 선뜻 놀지 못한다, 나라에서 무조건 놀아야 하는 시간을 줬으면 한다"라고 적혀있었다. '대학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고 꾹꾹 눌러쓴 메모지도 보였다.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놀 수 있는 방법'은 공부양을 줄이는 것으로 모아졌다. 방법은 부모와 학교가 도와주는 것. 아이들이 쓴 메모에는 "부모님들이 놀 시간을 많이, 여유롭게 준다" "학교에서 숙제를 적게 내준다"와 같은 답변이 자주 보였다. 거친 글씨체로 "대통령이 돼 학원·학교를 없앤다" "수학·국어 학습지를 불태워 버린다"라고 반감을 나타낸 아이도 있었다. "국적을 바꾼다" "이민 간다"와 같은 무거운 답변도 눈에 띄었다.

행사장 한쪽에서는 학부형들도 아이들의 놀 권리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3개 조로 나누어 엄마들이 완성한 마인드맵에는 '놀이 공간을 만들어주자' '놀 시간을 주자' '잔소리를 자제하고 아이를 믿어주자'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경쟁하는 사회분위기를 바꾸자"며 사회 참여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날 약 두 시간에 걸쳐 모인 의견은 다음 달 선포 예정인 어린이놀이헌장에 반영될 예정이다. 어린이 대표가  제안내용을 담은 노란 편지를 대형 노란 종이비행기에 실어 전하자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은 "놀이 시간을 어른들이 빼앗아서 정말 미안하다"라면서 "다시 돌려주도록 최대한 열심히 하겠다"라고 화답했다.

같은 자리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또한 "아이들의 창의성은 적절한 놀이와 쉼과 잠에서 나온다"라면서 "여러분들이 충분하게 놀고 쉴 수 있도록 전국의 교육감들이 여러분의 의견을 소중히 여겨 놀이 헌장에 반영하겠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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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바람을 전해받은 교육감들 25일 오후 2시 서울 세종대학교 컨벤션센터에서 강원도교육청과 대한민국교육원탁회의 준비위원회의 주관으로 열린 '어린이 놀이헌장 원탁 토론회의'에 참석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왼)과 민병희 강원도교육감(오른). 원탁회의를 통해 모아진 아이들의 의견은 오는 5월 4일 선포될 예정인 '어린이 놀이헌장'에 반영될 예정이다. ⓒ 손지은



○ 편집ㅣ김지현 기자

#민병희 #조희연 #어린이놀이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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