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학생과 요즘 대학생, 무엇이 다른가

[서평] 경쟁에 짓눌린 이십대의 모습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등록 2015.04.29 15:20수정 2015.04.29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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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세대는 대학생 때 민주화를 위해 짱돌을 들었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취업을 위해 토익책만 열심이다. 왜 이런 차이가 오는 것일까? 요즘 세대가 과거 세대보다 이기적이고 품성이 떨어져서 그런 것일까.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은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과거 세대는 투사였는데 요즘 세대는 왜 괴물이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귤화위지'란 고사성어였다. 강남의 귤이 회수를 건너 강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는, 같은 사람이라도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투사도 괴물도 결국 시대적,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지난 세대는 훌륭했고 요즘 세대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환경을 보지 못한 단견일 뿐이다.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을 만든 경제 성장과 애국 문화

1980년대 한국경제는 고도성장 중이었다. 한국은행 자료로 보면 2014년 GDP 성장률이 3.3%인데 비해 30년 전인 1984년엔 10.4%였다. 게다가 요즘 대학입학률은 80%를 넘지만 1980년대는 30%대에 불과했다. 당시 대학생들은 취업에 목매지 않아도 되었다. 소수의 대학생들을 위한 일자리는 풍부했다. 배움의 전당인 대학에 온 만큼 배울 여유가 있었다. 취업에 구애받지 않고 역사와 철학 등의 비판적인 인문 지식들을 배울 열의가 있었다.

또한 당시 대학생은 선망의 대상이고 엘리트로서 대접받는 존재였다. 특히나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상경한 시골 출신들이라면 집안을 넘어서 고향 사람들의 기대를 온몸에 안고 유학을 온 셈이었다. 그러니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운 세대였다. 국민교육헌장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로 시작한다. 개인보다는 국가와 민족이 더 중요한 애국의 시대였다. 당시 국가중심의 권위주의적인 사회문화는 학생들에게 기성체제에 대한 저항감을 심어주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감도 길러주었다.

이들의 책임감은 대학에 와서 그것을 심어준 통치 체제의 의도와는 다르게 작동했다. 사회에 대한 비판지식을 배우면서 '민족중흥'이 새롭게 정의되었다. 외세에 종속된 독재 정권이 있었고, 그 아래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이 있었다. 따라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중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민족을 '중흥'시키는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에 앞장서는 것이 엘리트로서의 길이었고 큰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운동권의 길이었고, 여기서 부모세대와 숱한 갈등의 사연들이 펼쳐졌다. 고향 어른들에게 엘리트란 고위 공직에 올라 나라를 이끄는 출세를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출세가 아닌 애국의 길을 선택한 것이 1980년대 운동권 대학생들이었다. 대학에 와서 배운 비판 이론들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단어들과는 거리가 있는 좌파 이론들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당시 운동권들은 애국과 민족, 구국이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학생운동조직이었던 '전대협'은 스스로를 '구국의 강철대오'라 불렀다. 당시 운동권은 머리로는 서구의 좌파이론들을 배웠을지라도, 가슴으로는 명량해전에 나선 이순신 장군의 후예들이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개인적인 행복은 버리고 결연한 각오로 나선 전사들이었다.

그렇다고 그 시절 모두가 운동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공부한 사람들은 마음 한 구석에 부채 의식을 갖고 있어야 했을 만큼 운동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었다. 올바른 사람이란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또 그것을 뒷받침해 주었던 경제적 여건이 대학 사회에 존재했던 비판 의식과 결합하여 운동권을 낳은 것이다.

무한 경쟁 속에서 '괴물'이 되어 버린 요즘 대학생들

세월이 흘러 요즘 대학생들이 처한 환경은 어떠한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요즘 대학생들의 처지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소개하고 있다. 청년실신(대학 졸업 후 실업자가 되거나 빌린 등록금을 상환하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됨), 청백전(청년백수 전성시대), 삼일절(31세까지 취업 못하면 절망). 대학생이 사회의 엘리트이기는커녕 '이십대 태반이 백수'라는 말처럼  취직은 어렵고 등록금 부담은 버거운 집단이 되었다.

1980년대엔 대학생이 된다는 것 자체로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겨우 1차 관문을 통과했을 뿐이다. 취업을 통해 능력 있는 대학생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 취직이 위에 열거한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핑계대지 말고 스스로를 계발하라"라는 말처럼 대학사회를 지배하는 사고는 '자기계발의식'이다. 모든 것은 노력 부족인 자기 책임이다. 죽자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회문제에 관심 가질 여력이 없다. 자기 구제도 힘겨운 상황인데.

인정받기 위한 자기계발 노력은 경쟁의 형태로 벌어진다. 내가 남들보다 우위에 있으면 잘한 것이다. 그래서 수능점수표는 노력의 결과로 나의 위치를 말해주는 공정하고 절대적 지표로 작동한다. 수능배치표상에 위치한 대학서열은 나의 위치를 말해준다. 촘촘한 대학위계서열의 굴레는 카스트처럼 대학생들의 의식을 옥죈다.

내가 위계서열상에 어디에 위치했느냐는 인정의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는데, 여기서 자신의 위치를 높이는 손쉬운 방법은 자신보다 아래 서열을 멸시하는 것이다. 대학가에서 수능성적 비중이 낮은 수시전형으로 합격한 사람은 '수시충'이니 지역균형발전으로 합격한 학생은 '지균충'이니 하며 멸시하는 단어는 여기서 나온다. 수시합격생을 '6두품'정도로 여기면 정시생인 자신은 '성골'이 되는 셈이다. 같은 대학이라도 정시생>편입생>수시생>지방캠퍼스로 골품제처럼 위계를 구분하려는 행태는 자신의 상대적 위치를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요즘 이십대의 유년시절 왕따 문화도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 서열에서 낙오의 두려움이 있는 학생들이 "누군가를 멸시하는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자신은 그 멸시받는 대열에 들지 않기 위한 안도의 행위"다. 오찬호의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대학생들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렇게 차별을 통한 구분 짓기에 익숙하다 보니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적 차별에도 다른 시선을 갖기 마련이다. 차별보다는 경쟁이 공정하냐는 '빈약한 공정성' 개념이 상황을 판단하는데 더 중요한 잣대로 작용한다. 그래서 책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KTX 여승무원들 정규직 전환 요구' 문제에 대학생들은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답한다. 지난 해 '세월호 참사' 관련하여 단원고 특례입학 말이 나올 때 일부 젊은이들이 술렁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드라마 <미생>의 한 대사는 이런 대학생들의 의식을 잘 대변한다.

"장그래가 '우리'라고 생각해요? 아니죠. 우리가 걔랑 어떻게 공평한 기회를 나눠요? 울 엄마가 나 학원 보내고 과외 붙이느라 쓴 돈이 얼만데! 이건 역차별이라고요. 나도 좀 놀 걸. 중고등학교 내내 밤 12시 안에 자 본 적이 없다고요. 초딩 때요? 학원만 몇 개를 돌았게요! 대학 때는 어학연수. 근데 이게 뭐야?... 그거 알아요? 우리가 우리로 계속 남으려면 대기업에 가야 해요."

차별에 문제제기 하기보다는 차별 내에서 인정받는 지위로 올라서는 것이 더 중요한 대학생들, 그들 뒤에는 결국 '울 엄마'로 상징되는 기성세대들이 있다.

자식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몬 부모세대

영국의 경제학자 허시는 '성장의 사회적 한계'를 말한다. 경제성장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물질재'의 공급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상실되고, '지위재'의 중요성이 증대한다는 말이다. 한국사회는 이런 지위재를 두고 교육의 영역에서 무한경쟁이 일어났다.

경제성장으로 풍요로워진 경제력으로 지위를 놓고 다투는 경쟁에 더 많은 지원이 가능했다. 여기엔 유신세대의 부모건 486세대의 부모이건 차이가 없다. 오히려 사교육 시장을 주도한 것은 '486'이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부모세대의 최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위를 다투는 경쟁에서 지원이 많다고 해서 성과가 더 좋을 리 없다. 오히려 경쟁의 강도만 세질 뿐이다. 한국사회는 정치영역은 어느 정도 민주화가 되었지만, 생활영역은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다투는 경쟁의 장이 되었다. 지금 대학생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이런 경쟁 사회의 결과다.

오찬호의 지적대로 "괴물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 지금 이십 대의 모습이다. 그들 나름대로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군분투하는 모습이다. 그래서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왜 과거처럼 짱돌을 들지 않느냐고 비판하는 것은 맞지 않다. 이것은 무섭게 변해 버린 현재를 보지 않고 과거의 잣대만 들이대는 일이다. 심하게 비유하자면 청년 실업을 중동으로 일하러 가서 해결하자는 말과 비슷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 대한 토론

일방적인 비판보다는 젊은 세대가 처한 삶의 환경을 이해하는 공감이 우선이다. 개인보다는 국가에 대한 헌신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사회비판으로 전환되었던 과거와 달리, 요즘의 학생들은 사회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개인의 생존을 위한 경쟁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쟁을 더 즐기는 체질이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살아남고 인정받으려면 그 길밖에 없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실은 경쟁에 매우 지쳐있다. 지쳐있기에 사회는 '서바이벌' 경기장이고, 삶은 그 속에서 벌이는 경기인 현실에 반감도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다른 사회와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에서 사회는 개인이 경쟁하는 곳이기 이전에 개인을 보호하고 성장시켜 주는 토대이다. 또 경쟁보다는 협동을 교육에서 더 중요하게 가르친다고 한다. 그것이 사회의 발전뿐만 아니라 개인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도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한다. 하지만 좋은 말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해왔다. 남의 자식에겐 더불어 살기를 권하고 내 자식에겐 시험공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형태라면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실제로 낫기에 권유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사회에 대한 고민과 토론이다. 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활발해져야 한다.

사회의 모습을 두고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네, 젊은 세대가 문제네 하는 것은 소모적일 뿐이다. 그보다는 지금의 사회적 환경에 대한 이해와 다르게 살 수 있는 환경적 조건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특히 가장 힘든 당사자들인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중요하다. 80년대 사회변화를 당시의 젊은 세대가 이끌었듯이, 지금의 사회변화도 젊은 주체가 중심에 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사회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북돋워야 한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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