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가 자신이 쓴 편액을 떼어내 불태운 이유

[108 산사 순례기⑩] 천년고찰 팔공산 은해사

등록 2015.04.28 17:23수정 2015.05.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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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바다 첩첩산중에서 망망대해를 느끼게 하는 은해사 앞을 흐르는 계곡. 돌틈을 도는 하얀 물은 일렁이는 파도요, 고여 있는 물은 크기가 작은 은빛 바다다. ⓒ 정도길


같은 봄이라지만 일주일 사이 기온이 높아졌고 자연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경북 영천으로 가는 길. 웃옷을 벗어야만 했고, 차량 에어컨을 살짝 켜야만 했다. 산야는 연두색 옷으로 치장하며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고 놔 주지를 않는다. 하얀 포말을 내며 흐르는 냇가의 물소리는 귀를 맑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눈과 귀가 즐거울 수밖에 없고, 마음도 덩달아 춤춘다. 팔공산 자락에 앉은 은해사는 나를 '108산사 여행' 열여섯 번째로 초대했다. 4월의 끝 토요일인 25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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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은해사 일주문. 편액의 서체가 힘이 넘쳐난다. ⓒ 정도길


아침 일찍 경산 갓바위에 다녀온 탓인지 차에서 내리자 몸이 찌뿌듯하다. 걸음걸이도 무겁다. 내리쬐는 태양열은 두 발을 옮겨 놓는데 무척이나 힘들게 한다. 광장에서 잠자는 분수대가 물을 뿜었으면 좋으련만, 제 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쉬고 있다. 발걸음을 옮기는 정면 좌우로 가로막은 듯 길게 보이는 웅장한 문. '팔공산은해사'라는 편액 글씨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 획수 끝자리가 편액 밖으로 튀어나갈 기세다. 힘이 넘쳐나고 위풍당당하다. 대궐 같은 큰 문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여행자에게 눈망울을 부라린다. 기가 죽을 내가 아니다. 문 뒤쪽에는 사천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이중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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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포정 은해사로 들어가는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금포정 길은 약 500jm까지 이어진다. 높이 10여 미터 300년 이상된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 정도길


일주문을 들어서자 하늘을 가린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나 있다. 포근하고 정겨워 걷기에 딱이다. 일주문에서 보화루까지 약 500m의 길 양쪽으로는, 높이 10여 미터가 넘는 300년생 이상 되는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않았다'해서 붙여진 '금포정((禁捕町)'이란 숲 이름이다. 그야말로 하늘을 찌른다 해도 과장됨이 없을 정도로 높이 솟은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의 기상과 체통을 유지하려 함일까. 휘어지거나 굽어졌지만, 꺾인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그늘진 오솔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에 충분하다. 절에서는 숙종 때 땅을 매입, 소나무 숲을 조성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2007~2008년에도 약 2천 주의 금강송을 식재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않는 생명의 숲', 금포정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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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나무 느티나무 가지가 참나무 몸속으로 들어가 사랑을 이룬 연리지나무. ⓒ 정도길


두 나무가 사랑에 빠져 한 몸으로 된 것이 언제적이었을까.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사랑을 이뤄 한 몸으로 태어났다. 연리지는 가지와 가지가 붙어 한 몸이 된 나무를, 연리목은 줄기와 줄기가 붙어 한 몸이 된 나무를 말한다. 그런데 이곳 연리지는 가지와 줄기가 붙은 특이한 형태다.

느티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참나무 몸속으로 뻗쳤다. 살 속을 파고드는 고통을 참아가며 거룩한 사랑을 이뤄낸 참나무. 참사랑이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당당하고 떳떳함 때문일까, 연리지는 여행자에게 사랑을 뽐내고 있다. 이날 은해사에서는 청춘남녀가 백년해로를 기약했다. 이 부부에게 저 "연리지처럼 평생을 떨어지지 않고 한 몸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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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소식 은해사를 찾아 온 봄이 소식을 전해준다. ⓒ 정도길


천년고찰 팔공산 은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로, '조선31본산'이자 '경북5대 본산'으로 경북지방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교구 본사 중 본존불로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 유명하다. 신라 41대 헌덕왕 1년(809년) 혜철국사가 해안평에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 '은해사'는 "불, 보살, 나한 등이 중중무진으로 계신 것처럼 웅장한 모습이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하여 생긴 이름이다. 또 하나는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면 그 광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듯하다"고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첩첩산중' 산에서, 왜 '망망대해' 바다를 비유해 이름 지었을까 의문이다. 그러나 답은 금방 찾았다. 보화루 앞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돌 틈을 돌며 하얀 포말을 내는 것은 파도요, 고여 있는 물은 크기가 작은 바다로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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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화루 은해사 성보박물관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는데, 경내에는 입구에 자리한 '보화루'라는 편액의 글씨가 추사가 쓴 서체다. ⓒ 정도길


은해사는 오래된 역사에 비해 본찰에는 이렇다 할 문화재가 많지 않다. 1847년 대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1천여 칸의 전각이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주지였던 혼허스님은 불사에 전념했고, 이때 병조판서로 지내던 추사 김정희는 스님의 부탁을 받고 곳곳에 글씨를 남긴다. 추사의 글씨는 은해사 내 성보박물관에 별도 보관돼 있지만, 경내에서도 볼 수 있는 곳은 '보화루' 편액이다. 이 밖에 추사가 쓴 현판으로 문루인 '은해사', 불전인 '대웅전', 조실스님의 거처인 '시홀방장', 다실인 '일로향각', 백흥암에 있는 여섯 폭의 '주련(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이 있다.

은해사와 관련된 국보로는 제14호(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는 거조암에 있고, 보물로는 제486호(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와 제790호(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는 백흥암에 있다. 보물 제514호(영천 은해사 운부암 금동보살좌상)는 운부암에 가야만 볼 수 있다. 은해사 본찰에는 보물 제1270호(은해사괘불탱)과 제1604호(청동북 및 북걸이)는 성보박물관에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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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박물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는 추사 김정희 글씨를 비롯한 문화재가 많이 있다. ⓒ 정도길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추사 최고의 작품은 '불광'이라는 글씨. '불광(佛光)'이라는 편액은 당시 불광각에 걸려 있던 편액으로 이 글씨에 대한 숨은 이야기가 있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8여 년의 유배를 끝내고 불교에 귀의하면서, 은해사 주지스님 부탁으로 '대웅전' 등 글씨 몇 점을 남긴다. 불광이라는 글씨도 추사가 직접 스님에게 주었다. 스님은 나무 판에 원본을 떠 글자를 새겼는데, 판이 작았는지 길게 뻗은 '불'자의 세로획을 잘라 '광'자와 비슷한 크기로 새겨서 걸었던 것.

훗날 은해사를 찾은 추사는 아무 말 없이 편액을 떼어내고 마당에서 불태워 버렸다. 주지는 뒤늦게 그 이유를 알고 참회하며 원본 그대로 새겨 다시 걸었다고 한다. 현재 불광각은 남아있지 않고, 그 흔적인 '불광'이라는 편액만이 성보박물관 입구에서 여행자에게 숨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추사 김정희 글씨와 그 숨은 뒷얘기를 전하는 곳, 은해사 성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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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등 번뇌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어둠의 세계에서 지혜와 광명이 가득한 깨달음의 세상으로 나가게 밝혀주는 연등.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절간이 분주하다. ⓒ 정도길


보화루를 지나니 절 마당엔 오색찬란한 연등이 하늘을 덮었다.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분주한 절간이다. 등은 육법공양의 하나다. <화엄경>에서 육법공양이란, 중생을 이롭게 구제하고 보살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보리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 육법공양에는 해탈과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향(해탈향), 자신을 태워 희생하며 세상을 밝히는 등(반야등), 성취의 꽃을 피운다는 만행을 뜻하는 꽃(만행화)이 있다. 다음으로,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결과를 상징하는 과일(보리과), 감로의 법문을 뜻하는 차(감로다), 깨달음의 기쁨을 나타내는 쌀(선열미) 등 여섯 가지를 말한다. 번뇌와 무지로 가득한 어두운 세계에서, 지혜로 가득한 광명의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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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은해사를 찾은 이날 극락보전에서 선남선녀가 백년해로를 맺었다. 이들을 위해 정성이 가득한 기도를 올렸다. ⓒ 정도길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정장을 한, 젊은 남녀 한 쌍이 법당 앞을 서성인다. 웬일일까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화환 하나가 눈길을 끈다. 화환에는 '선남선녀의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은해사 사부대중'이라 적혀 있다. 절에서 영가결혼식을 올린다는 것은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이처럼 선남선녀 결혼식은 처음 보는 일. 남에게 보이려 의식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허례허식보다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 몇 명이 축하해 주는 이런 결혼식이야말로, 단출하지만 뜻 깊은 경사로 평생에 기억으로 남을 것이 아닐까. 곧 결혼을 앞둔 아들도 절에서 평생의 연을 맺어주고 싶지만, 과연 부모의 뜻대로 될지는 모를 일이다. 부처님 앞에서 올리는 선남선녀의 결혼식이 참 부럽기만 하다. 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정성 가득한 기도를 올린 것은 나의 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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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각 단서각 내부에는 불보살과 나한상이 있는데, 그 이유가 궁금하다. ⓒ 정도길


주 법당에서의 결혼식으로, 극락보전 옆에 자리한 '단서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느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절집 이름이다. 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지만, 이처럼 '단서각'이라는 집 이름을 보는 것은 은해사가 처음이다. 단서각은 어떤 집일까. 보통 절집의 이름을 붙일 때는 불보살을 봉안하는 곳은 '전', 그 외 산신이나 용왕, 칠성 등을 모신 곳을 '각'이라 붙인다. 그런데 단서각 수미단 중앙에는 불상이, 우측에는 또 다른 불상이, 좌측에는 보살상이 협시로 있다. 그 외에 좌우로는 나한상이 자리하고 있다. 단서각이 어떤 집인지 보살님에게 물으니 '독성각'이라 답하는데, 그래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다. 다음 기회에 스님께 알아보는 것을 숙제로 남겼다. 108배 기도를 올리는데 어느 법당이든 무슨 상관일까. <108산사순례기도여행> 그 열여섯 번째 염주 알은 은해사 단서각에서 꿸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블로그 <안개 속에 산은 있었네>에도 싣습니다.
#은해사 #불광 #추사 김정희 #사랑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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