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린 두 바보, 우리와 닮았다

[독서에세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등록 2015.05.11 19:30수정 2015.05.1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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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게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기다림'에 관한 책이다.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인물로 등장하는 희곡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이들의 삶은 오로지 기다리는 일로 점철돼 있으며, 이것을 제외한 일상의 경험들은 무의미한 듯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고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기다리는지 알지 못한다(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고도'를 높은 장소나 이상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고도는 절묘한 스펠링을 지닌 사람 고도'Godot'였다!).


에스트라공 : 이젠 뭘 하지?
블라디미르 : 글쎄 말이다.
에스트라공 : 가자.
블라디미르 : 갈 순 없다…
에스트라공 : 왜?
블라디미르 : 고도를 기다려야지.
에스트라공 : 참 그렇지.

"날뛰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상황을 타파해보겠다는 의지를 품은 에스트라공의 '가자'라는 단호한 발언도 결국은 고도를 기다려야 하므로 무산되고, 이렇게 고도를 기다리자는 그들의 대화는 노래의 후렴구처럼 연극 내내 반복된다.

가끔 그들도 자신이 왜 고도를 기다려야 하는지, 기다리는 일에서 자신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 같은 것을 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전진하려고 꿈틀대는 것도 잠시, 결국에는 다시 적극적인 삶을 체념하고 만다.

에스트라공 : (씹어 삼킨다) 우린 꽁꽁 묶여 있는 게 아니냔 말이다.
블라디미르 : 묶여 있다고?
(중략)
에스트라공 : 날뛰어봤자 소용없는 일이지.
블라디미르 : 타고난 대로니까.
에스트라공 : 꿈틀거린다고 별수 있니?
블라디미르 : 근본이야 달라지지 않는 거지.
에스트라공 : 별 수 없는 거야.(먹다 남은 당근을 블라디미르에게 내민다) 마저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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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표지 ⓒ 민음사

1953년 초연한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예상을 깨고 성황을 이룸과 동시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됐다고 한다. 연극은 연일 만원이었고 관중은 고도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면서도 이 연극이 참 재미있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고도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작가인 사무엘 베케트 역시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냐는 질문에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연기를 한 배우들조차도 초연 당시 자신들이 공연하는 이 작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니, 이런 연극이 인기를 끈 건 확실히 역사적 사건이었음이 분명한 듯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연극에 기립 박수를 보내고,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연극을 좋다고 평가할 수 있었을까.

처음엔 고도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어리석은 두 주인공에게도 가능할 법한 적극적인 삶이 고도의 존재 때문에 불가능해졌다고 봤기 때문이다.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고도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주저 앉길 몇 번이던가. 하지만 차차 이런 생각은 변해갔다.

두 인물은 고도에 의해 조종당하는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구차하고 지질해 보였지만, 반면 그들은 고도라는 존재에 대한 미련 때문에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죽음의 세이렌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도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는 자신들의 숙명을 기억해내곤 다시 삶을 이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고도를 기다리는 일 자체가 그들에겐 유일한 희망이요, 삶을 살아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에스트라공 :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블라디미르 : 다들 하는 소리지.
에스트라공 : 우리 헤어지는 게 어떨까?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블라디미르 : 내일 목이나 매자. (사이) 고도가 안 오면 말야.
에스트라공 : 만일 온다면?
블라디미르 : 그럼 살게 되는 거지.

삶은 기다림의 연속


그리고는 이내 우리 대부분의 삶도 그들의 삶과 다를 바 없이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엄마의 따뜻한 가슴을 기다리는 아기였고, 내일의 화창한 햇빛을 기다리는 소풍 전날의 아이였고, 사랑하는 줄리엣의 응답을 기다리는 '로미오'였고, 아픔이 치유되길 기다리는 환자였고, 풍요로운 삶을 기다리는 가난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삶이 조금 더 충만해지길, 평화로워지길, 행복해지길, 완전해지길 기다리고 있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기에 오늘을 버틸 수 있는 우리 역시 블라디미르이고 에스트라공이 아닐까. 비록 우리 앞에도 '지랄' 맞은 현실이 목을 죄어오고 있지만, 언젠가는 지금 이 순간을 뛰어넘어 무언가를 이루고, 나누고 또 소유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우리는 오늘을 또 이겨내고 있다.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는 어쩌면 그리 중요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자체가, 버티는 자체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니까.

사무엘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태여 말해줄 필요가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말을 하지 않아도 관객, 독자 모두는 저마다의 고도를 척척 머릿속에 떠올리며 오늘이 아니면 내일을 기대해 볼 것임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민음사/2000년 11월 20일/7천 원)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민음사, 2000


#사무엘 베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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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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