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이재 절대로 X 안 할개요"

7살 딸 아이의 반성문... 이 맛에 부모 노릇하는 걸까요

등록 2015.05.16 20:10수정 2015.05.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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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입니다. 그저 홀가분하면 좋으련만 싶은 이 시간, 직장맘은 내일 시험을 볼 큰아이는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을지, 또 작은 녀석은 돌봐주시는 분에게 땡깡이나 부리지 않는지 등 자잘한 걱정거리들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버스가 제때 오고 막히지 않고 쭉쭉 빠져 준 덕분에 오늘은 다른 날보다 빨리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작은 기쁨도 찰나, 집 앞에 도착한 순간부터 신경이 바짝 곤두서기 시작했습니다.


어라, 아파트 현관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뭐지? 웬일인가 싶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아이들은 거실에서 보드게임을 하고 있고 집안에는 온통 과자 봉지와 사탕 봉지가 즐비했습니다. 우선 별일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순간 엄마의 퇴근이 반가워 뛰어온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이번엔 힘이 쫙 풀렸습니다. 하루종일 뛰어놀아 흘린 땀에 꼬질꼬질한 데다, 먹다 비벼 그랬는지 끈끈한 젤리 같은 것들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므나, 할머니는? 안 계셔?"
"아니, 저기서 저녁 준비하고 계셔."

8시 반이 넘어가는 시간까지 아이들은 밥도 먹지 않고 씻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바뀐 지 한 달여밖에 되지 않는 돌봐주시는 할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하기는 좀 그렇고 아이에게 돌려 말을 했습니다.

"엄마가 뭐라고 했어요? 엄마 오기 전까지는 저녁 먹고, 목욕은 해야 한다고 했지요?"
"아니, 할머니가 안 씻어주셨는데.."

말끝을 흐리는 아이 곁에서 돌봐주시는 할머니가 한 말씀하십니다.


"아이고, 이 녀석 씻자고 해도 안 한다고 어찌나 고집 피우는지. 그러구는 할머니 탓이야?"

두 사람 모두 난처한지 제각기 변명하기 바쁩니다. 돌봐주시는 분이 바뀌고 맘 졸이던 한 달 전과는 달리 요즘 아이와 돌봐주시는 분 그리고 나까지 서로들 익숙해진다 싶어 편해졌더니만 결국 이런 일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아, 네. 아무리 애가 안 한다고 해도 목욕은 좀.. 담부터는 꼭 좀.."

이렇게 대충 부탁을 하고 났는데도 먼지 바람처럼 일어난 화와 걱정은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다니며 맘 속을 온통 헤집어 놓습니다. 그때부터 두 아이를 씻기고 저녁 먹이고 나니 10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시험공부는커녕 아이들을 재울 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욕만이라도 했음 이렇게 늦어지진 않았을 텐데 왜 그랬니? 왜 안 한다고 고집 피웠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할머니가..."

아, 그런데 딸아이가 계속해서 할머니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안 되겠다. 그 늦은 시간에 아이를 한참 혼냈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맘이 풀리지 않아 반성문을 쓰게 한 후에 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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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 거짓말하면 자꾸 꺼져요 ⓒ dong3247


엄마 다운부터 진정한 어린이가 될개요. 저는 노셔 발을 (중략) 싫어셔요.
거짓말 진짜 안 할개요. 거짓말 이재 절대로 X 안 할개요. 반성할개요.
엄마 감정도 만이 속사할거 갓아요. 다신 거짓말 만 할개요.
이재 것짓말 왜 안해야 돼는지 알아어요. 그래서 안할개요.
거짓말 하면 점점 커져요. 그래서 안 할개요. 반성 왜 해야돼는지 알아요.
크개 거짓말 할 수 있잔아요.
                                                  OO올림

진정한 어린이가 되겠다는 다짐. 그리고 거짓말하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반성의 마음을 적어놓고는 피곤한지 곤히 잠들었습니다. 처음 한 번 읽다가 이게 무슨 말이야, 두번째는 으응 그 말이군, 그리고 세 번째부터는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ㄹㅎ' 받침을 'ㅎㄹ'로 쓰는 아이가 '엄마의 감정'을 얘기하는 것도 재미있고, 하면 할수록 점점 커지는 거짓말의 위력을 알아차린 것이 기특하기도 했습니다.

좀 전까지 끈끈한 젤리가 붙어 있던 잠든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습니다.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늦은 시간까지 종종거리게 한 이 철없는 거짓말쟁이.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미운데 이뻤습니다.

결혼 전, 그리고 결혼 후에도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퇴근만 하면 조금은 자유로웠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때가 언제였는지조차 생각 안 나는 고된 직장맘의 생활이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달라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이 맛에 사는 건가 생각해 봅니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아이들과의 시간, 걱정 대신 기대를 품어봅니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직장맘 #반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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