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진실, 미국인들의 심장에 새길 수 있을까?

박원석 의원, "<넘어 넘어> 영문판 절판, 부끄럽다" 재출간 추진

등록 2015.05.18 20:43수정 2015.05.18 20:43
8
원고료로 응원
a

'광주일지'(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설갑수 옮김, 1999)'.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최초의 기록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황석영 기록, 1985, 아래 <넘어 넘어>)의 영문판에 대한 재출간이 추진되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1999년 미국 대학에서 <넘어 넘어>의 영문판을 만들어 교재 등으로 쓰이다가 절판된 지 10년 만이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박원석 정의당 의원은 18일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민주화, 인권 운동사에 남는 역사적 '사건'인 5·18민주화운동의 중요한 기록물 중 하나인 <넘어 넘어>의 유일한 영문판이 절판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재출판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5.18 영령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나서 예산을 지원해서라도 <넘어 넘어> 영문판을 재출판해야 한다"고 밝혔다.

1999년 영문판 출간 후 10여 개 미국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광주일지>의 한국어 원본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현장 보고서다.

'광주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의 비밀 프로젝트로 1985년 출간됐다. 기독교계로부터 자료 수집 및 출판 비용 일부를 지원받고, 대표 집필자인 소준섭, 이재의, 조양훈과 보조자 10여 명이 참여, 6개월에 걸쳐 비밀리에 작업이 진행됐다. 200여 명의 항쟁 참가자 등의 인터뷰를 비롯해 광주 시민이 참여한 공동의 결과물인 셈이다. 집필 완료된 기록물을 작가 황석영에게 의뢰해 감수한 뒤, 그의 이름으로 펴냈다.

출판 당시 당국으로부터 '불온 서적'으로 지목돼 수차례 압수되는 수난을 겪으면서도 약 1백만 부 이상 읽히는 지하 베스트셀러 서적으로 알려졌다. 이 책이 출간되면서 광주 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범국민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1987년 6월 항쟁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이 책은 원본 그대로 1986년 일본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가 일어본으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광주일지> 재출판 제안서 참고).


<넘어 넘어> 영문판은 '광주일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By Lee Jai-eui/ Translated by Kap Su Seol and Nick Mamatas, 1999 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라는 제목으로 1999년 미국 UCLA대학에서 아시아태평양 기록물 시리즈(아래 '기록시리즈')로 출판되었다(관련기사 보기).


해당 영문판은 <넘어 넘어>의 유일한 공식 영문 번역서로서 북미권에 2000여 권이 판매되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대학 출판부의 한계로 특별한 홍보 작업이 없었지만, 미국 내 한국학 연구자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UCLA, UC샌디에고, 워싱턴주립대, 시카고대, 보스턴대 등 10여  개의 미국 대학에서 한국학 관련 교재(coursework)로 쓰였다. 지난 2001년에는 영어권의 저명한 비평 저널인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서평이 게재돼 관심이 쏠렸다.

<넘어 넘어> 영문판이 출간될 수 있었던 것은 5·18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려고 했던 재미 언론인 설갑수(46)씨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대학원 친구이자 현재 소설가로 활동 중인 닉 마마터스와 함께 미국 현지에서 3년간에 걸쳐 <넘어 넘어>를 번역, 재편집했다. 당시 설씨는 물론 함께 작업을 한 사람들은 원고료 한 푼 받지 않았다. "광주의 진실을 미국인들의 심장에 새길 수 있는" 영문판을 손에 쥘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특히 <넘어 넘어> 영문판은 단순 번역서가 아니다. 우선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 대학 명예교수가 장문의 서문을 썼다. 한국 상황에 어두운 외국인들이 5·18 민주화운동의 배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특히 커밍스 교수는 서문에서 5·18 민주화운동을 '한국의 천안문 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광주시민 학살에 개입한 미국 정책 결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넘어 넘어> 영문판의 또 다른 특징은 <저널 오브 커머스> 기자였던 팀 셔록의 기고문 '워싱턴의 시각'(The View from Washington)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그의 기고문에는 1996년 미국 정보공개법(FOIA)에 의해 입수한 광주 항쟁 관련 미국 국무성의 비밀 해제 문건의 내용이 담겨 있다. 셔록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카터 대통령의 한국 담당 비밀대책팀과 전두환 신군부 사이에 오간 비밀 전문(이른바 '체로키 파일')을 공개해, 미국의 5·18민주화운동 개입 전략을 최초로 알렸다.

그러나 'UCLA가 존재하는 한 책이 절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던 출판부 편집장 레슬리 에반스가 은퇴하고, '기록시리즈'에 대한 UCLA의 재정 지원이 끊기면서, 지난 2005년 영문판이 절판됐다.

a

'국민 쪽지예산' 자청한 박원석 의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박원석 정의당 의원 ⓒ 유성호


"광주시의 관료적이고 형식적인 답변... 윤장현 시장이 어떻게?"

박원석 의원은 최근 영문판 재출간을 위해 저작권자인 설갑수씨를 직접 면담하고, 영문판 관련 문서들을 확보해 검토 작업을 벌였다. 박원석 의원은 18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유일한 역사적 기록물이고, 미국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할 만큼 가치를 인정받은 기록물인데, 이런 식으로 소실된다는 게 안타까워서 살려보자는 취지로 (보좌관을 통해) 미국에 있는 저작권자까지 만났다"고 설명했다.

설갑수씨는 박원석 의원실과의 면담에서 "<넘어 넘어>는 한국을 넘어 <세계를 흔든 10일>, <카탈루냐 찬가> 수준의 세계사적인 기록물이며, 민중 문학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 책인데 이런 중요한 기록물의 영문판이 10년이 넘게 절판돼 있다는 게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지금이라도 한국의 공적 기관이나 비영리 단체가 영문판 판권을 가져가 재출판 하기를 바란다"며 "만일 재출판을 한다면 기꺼이 영문판 개정 작업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a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 번역서인 (By Lee Jai-eui/ Translated by Kap Su Seol and Nick Mamatas, 1999 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의 저작권자인 설갑수(46)씨. 그는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 중이며 MSC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ESG Research 애널리스트로 근무하고 있다. ⓒ 설갑수


특히 설씨는 "영문판이 절판되다보니 해외 일부 국가에서는 불법 복제된 해적판이 판매되고 있다"며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에서 보유중인 <넘어 넘어> 영문판 역시 불법 복제물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박원석 의원실은 18일 국회도서관 측에 불법 복제물에 대한 시정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박원석 의원은 "<넘어 넘어> 영문판은 한글판과 더불어 5·18 현장에 대한 소중하고 생생한 기록물 중의 하나이며, 단지 대한민국 특정 지역이나 특정 정치 상황 하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을 넘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처절한 투쟁에 대한 인류사의 보편적인 기록물이므로 어떤 기록물보다 공적인 기관의 관리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관련 부처와 광주광역시, 전남대학교 등 관련 공적 기관이 저작권 인수나 재출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원석 의원실이 최근 문화체육관광부, 국가보훈처, 광주광역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등에 영문판 재출판 예산지원에 대한 입장을 물었지만, 영문판 절판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이들 단체는 "민간 출판물에 예산을 지원한 전례가 없다"며 사실상 '불가' 입장을 밝혔다.

박 의원은 "내가 제일 안타깝고 화가 나는 것은 문화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광주시, 5·18 재단 등 어디도 (영문판 재출판에 대한) 의지가 있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며 "역사를 보존하고 알리는 것에 대해서 정부나 관계 기관이 이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고 토로했다.

특히 광주시는 답변서에서 "우리 시에서는 개인 출판물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의 판권에 대해 공식적으로 검토한 바 없고, 판권이나 저작권 등 지적 재산권을 예산을 투입해 인수한 적이 없다"면서 "시 재정 여건상 개인의 판권을 매입하는 것은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원석 의원은 "(광주시가) 답답한 얘기를 하고 있다. 이건 민간의 상업적 목적의 출판을 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느냐"면서 "저작권자도 상업적 출판이 아니라 지자체든 공공 기관이든 재출판을 하게 되면 저작권을 양도를 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고 반박했다.

"현재 윤장현 광주시장도 민주화운동을 했고 시민운동도 했고 누구보다 5·18 정신과 가까운 분이라고 자부하고 있지 않느냐.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해외에 알리고 세계인들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사업이다. 이것을 광주시 차원에서 자기 사업으로 인수해서 추진하면 오히려 세계에 광주를 알릴 수 있다.

지자체에서는 그보다 훨씬 쓸데없는 일에 돈을 많이 쓴다. 수억 원이 들어가는 사업이 아니라 불과 몇 천만 원이면 가능한 사업에 대해 그런 관료적이고 형식적인 답변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오늘의 5·18 정신과 광주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해서 답답하다."

박 의원은 "제가 국회 예결위원이기도 하니, 광주시나 관계기관에서 재출간을 위한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예산 편성을 할 수 있도록 요청하려고 한다"며 "국회의원들 중 광주 출신이나 민주화운동을 했던 분들에게도 친전을 보내서 현실을 알리고, 국회 차원에서 좀 더 광주시가 재출간 사업에 나서도록 촉구하고 호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그래도 안 되면 시민의 힘에 호소할 수밖에 없고, 크라우드 펀딩 방식을 통해서라도 <넘어 넘어> 영문판을 재출판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크라우드 펀딩은 후원, 기부, 대출, 투자 등을 목적으로 웹이나 모바일 네트워크 등을 통해 다수의 개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으는 행위를 말한다.
#5.18 #박원석 #설갑수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광주일지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