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마을에서 '헌팅'이 통했다

[천방지축 귀촌일기③] 귀촌 아줌마의 우울증 이겨내기

등록 2015.05.22 20:19수정 2015.05.27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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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님과 함께 지난 가을, 홍시를 좋아하시는 시아버님께 감을 먹여 드리고 있다. ⓒ 김경내


아침 일찍 앞뜰과 뒤뜰을 돌아다니며 뜯은 더덕순, 연한 뽕잎, 쑥 등을 비롯한 나물들을 마당 개수대에서 씻고 있는데 귓전에서 뻐꾹새 소리가 잠시 청명하게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소리를 쫓아 눈과 귀가 따라갔으나 울음 남기고 간 자리에 흰 구름만 둥실 떠 있다. 뻐꾸기 날아가는 그곳에 새끼나 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


귀촌한 지 1년이 됐건만,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이면 아니, 바람만 불어도 두고 온 딸 아들 생각에 마당에 서서 서울 쪽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덧대어, 친구들도 보고 싶고 자주 가던 명동이나 인사동 거리도 눈앞에 아롱거린다. 마음이 이렇게 설렁거리며 갈피를 못 잡는 날은 일도, 글도 손에 안 잡힌다. 괜스레 남편에게 심통을 부리다가 집을 나와서 학교 앞을 서성거려 보기도 하고, 남 교감 집 앞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지난해 여름, 98세의 시아버님마저 편찮으셔서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시고 나니 집이 더 커 보이고 썰렁했다. 처음 입원하실 때 병원 측에 '매일 문병을 와도 괜찮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하던 말만 믿고 정말로 매일 한두 번씩 갔더니 나중에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같이 입원한 어르신들 중 '뭐하러 매일 오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기에 괜히 눈치가 보여서 하루에 한 번만 가기로 했다.

아버님께서 안 계시니 말벗이 없어서 쓸쓸하기 그지없다. 남편은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석 달 열흘이라도 먼저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다. 게다가 남편이 며칠씩 서울에 가거나 볼 일로 집을 비울 때, 아침나절 병원에 다녀오면 집은 그야말로 절간처럼 한가하고 조용하다.

귀촌한 마을에서의 '헌팅'

눈물이 많아졌다. 멍 때리고 있을 때도 잦아졌다. TV를 보다가,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다가, 길을 가다가, 혼자 있을 때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여기 와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가, 아이들한테 가고 싶기도 했다가, 그럼 남편은 누구랑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가, 이유 없이 짜증이 났다가,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의 변덕이 죽 끓듯 했다. 어느 날은 약국에 마스크를 사러 갔는데 "요즘은 시골생활에 적응이 좀 되셨나요?"라는 약사의 말 한마디에 주책없이 눈물을 펑펑 쏟아지기도 했다.


이러다가 말로만 듣던 우울증에 걸리는 건 아닌가, 이미 우울증이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쩍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뭔가 통하는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마을의 내 또래나 조금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일 때문에 바쁘기도 하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을 빼면 다 어르신들이라서 같이 이야기를 한다거나 차라도 한 잔 마시기에는 좀 그렇다.

나는 스스로 돌파구를 찾기로 마음먹고 그 방법을 모색했다. 그 무렵, 마을길을 산책하고 있던 여고생 네 명을 만났다. 나는 먼저 다가가 내 소개를 하고, 우리 집을 가르쳐 주면서 점심 먹고 난 뒤에 놀러 오라고 초대했다. 이틀쯤이 지났을까. 진짜로 그 네 학생이 찾아왔다. 얼마나 반가운지! 나는 그들을 집 안으로 안내하고, 신이 나서 차를 주문받았다.

"커피 마실 줄 알아? 커피 말고 다른 차도 있어. 시원한 매실차, 감잎차, 미숫가루…. 뭐? 뭐든지 말만 해."
"음…. 저어, 냉커피도 되나요?"
"저는 시원한 매실차요."
"알았어, 잠깐 이야기하며 놀고 있어."

냉커피 두 잔, 냉매실차 두 잔, 나는 뭘 마시지? 아 그래 나는 감잎차를 마셔야겠다. 차를 준비하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절로 번졌다. '고것들 참, 아고 예쁜 것들.' 혼자 중얼거리며 손은 다른 간식거리를 찾느라 분주했다.

집에 있는 것을 다 꺼내서 차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통성명을 하고, 하하호호 지지배배, 별스럽지 않은 얘기에도 그들은 즐겁게 웃었다. 말똥 굴러가는 것만 보고도 깔깔거린다는 때가 아닌가. 어쩌면 그들보다 내가 더 신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과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됐고,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 놀 시간이 없을 때에는 대문 밖에서 나를 불러서 잠시 인사만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정원이 참 예쁘네요"라는 말로 시작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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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물통이 우리 집 뒤뜰에 핀 나도물통이 꽃 ⓒ 김경내

남 교감네는, 동네입구 길 중간쯤에 집이 있다. 보아하니 그 집도 외지에서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날도 터덜터덜 마을길을 돌고 있는데 마침 대문이 열려 있고 마당에 사람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대문 안으로 고개를 살짝 들이밀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 마을에 귀촌한 사람입니다. 정원이 참 이쁘네요."
"아, 그러세요? 들어오셔서 차 한 잔 하고 가시지요."
"그럼 한 잔 주시겠어요?"

염치 불구하고 들어가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도 이미 우리 집을 알고 있었고, 우리 집에 안 주인이 없다가 얼마 전에 서울에서 안 주인이 내려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광주의 어느 초등학교 교감이었다. 함께 이야기할 시간이 많은 건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고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 친구를 찾아 나섰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랴! 네 명의 여학생이 우리 집에 서너 번 다녀가고 난 뒤 무슨 일이 있는지 우리 집에 발길을 끊었다. 갑자기 불안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마을 안으로는 산책을 못 가게 했다는데, 내가 괜히 무리하게 오라고 한 건 아닌지, 다른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답답하고 걱정스러웠다. 우리의 만남은 거기까지였다.

남 교감과는 바쁜 중에도 짬짬이 서로의 집을 오가며 팥칼국수를 끓여 놓고 초대하기도 하고, 차도 마시며 함께 여행하기도 했다. 남 교감은 새 학기가 되자 다른 학교로 발령을 받아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에 많은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이것도 나 혼자만의 짝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점심으로 나물밥을 해 먹으려고 준비한 것들을 좀 덜어서 남 교감네 집을 기웃거렸지만 문이 잠겨 있다. 대문에 나물 봉지를 걸어놓고 문자를 날렸다. 오는 길에 학교 울타리 사이로 교정을 들여다보며 '친구들아 잘 있니?' 하고 마음속으로 안부를 묻는다.

개가 사람 하나 몫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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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와 소통 중 진돗개(설기)와 이야기하며 놀때가 많다. ⓒ 김경내


집으로 돌아오니 설기(우리 집 진돗개)가 반가워서 길길이 뛴다. 남편은 방에서 내다보지도 않는데. 나는 아예 마당에 주저앉아서 설기와 이야기했다. 학교에 갔다 왔다는 둥, 남 교감네는 집이 비었더라는 둥. 개가 사람 하나 몫을 단단히 한다. 이래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반려동물을 키우나 보다.

평소에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설기와 사람하고 대화하듯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어떤 때는, 서울에 있는 자식 얘기를 하기도 하고, 궁금한 동네 얘기를 설기한테 묻기도 한다. 옆집 동서는 그런 나를 본 동네 사람들이 '서울댁이 이상하다'고 하는가 하면, 날 재미있어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귀띔해준다. 내 눈에는 사람이 잘 보이지 않던데 그 사람들은 어디서 나를 보는 건지? 정말로 벽에도 귀가 있고, 담에도 눈이 있나 보다.

사람들은 말한다. 귀촌해서 한 번씩 겪는 과정이라고. 한 번씩 겪는 과정이라면 언젠가는 지나가고 끝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는 스스로 이 고비를 극복하고, 누군가가 귀촌의 외로움을 하소연할 때 그 사람의 상대가 돼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돌아오는 토요일쯤에는 텃밭을 푸르게 장식한 채소를 따서 동네 아줌마들 불러 비빔밥이라도 한번 해먹어야겠다. 내가 이만큼 견뎌내는 것도 다 그분들 덕분이니까. 지나가다가 마주쳤을 때 눈으로라도 아는 척해주고, 마을 부녀회에서 꽃놀이 간다면서 데려가 주는. 우울증의 초입에서 더 이상 고조되지 않도록 해준 고마운 이웃사촌이니까.

○ 편집ㅣ김지현 기자

#우울증 #뻐꾸기 #서울하늘 #진돗개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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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e-mail : ok_0926@da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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