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 프랑스 수녀원에서 들려온 한국말

[여행 책에 없는 유럽 종단기8] 그녀가 들어갔었던 수녀원에 들어가다

등록 2015.06.01 15:37수정 2015.06.01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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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순서대로 여행기를 싣지 않고 있습니다. 로마부터 암스테르담까지 남에서 북으로 종단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부터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제 시간 상으로는 파리에 오기 전 들른 남프랑스의 마을 생폴드방스(Saint paul de vence)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기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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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마을 생폴드방스 풍경 ⓒ 송주민


함께온 그녀는 수녀가 될 뻔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 가지 끈을 분명하게 잡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끈을 잡기 보다는 놓아 버리는 게 자유와 실존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러나 운명은, 인연은, 그리고 가슴을 후비는 만남은 나의 선택과 기투(현재를 초월해 미래로 자신을 내던짐, 편집자주)만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생각도 못했고 예상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거부해왔던 것들. 그러나 나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이성으로는 썩 말끔히 해명 못할 그 어떤 묘한 이끔으로, 지금 나는 이 사람과 함께 걷고 있다.

"내가 들어갔던 수녀원 보여줄까?"

한국에 있던 날, 그녀는 호기심을 잔뜩 자극하는 말을 던졌다. 그리고는 구글 지도에 들어가더니, 한국을 넘어 아시아를 넘어 휙휙 더 넘겨서 클릭 몇 번으로 프랑스로, 그것도 이탈리아 국경과 멀지 않은 남프랑스로 향했다. 지중해가 닿은 해변도시 니스 가까이에 있는 '생폴드방스'라는 곳으로 가서 멈추고는 지형을 확대했다. 그리고 위성 화면으로 바꿨다.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가 불꽃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중세풍의 벽돌 집들도 곳곳에 보였다.

"아름다운 곳이야. 환하고 화창한 날씨가 정말 근사해. 언덕 너머로 지중해가 태양을 한가득 받아 반짝거리지. 언덕 위에 옹기종기 솟은 아리따운 벽돌 집들도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

샤갈, 그리고 그녀가 갔던 수녀원이 있는 마을

거기는 샤갈의 마을이란다. 예술가들이 사랑한 중세 마을이란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고 푸른 언덕이 둘러싼 곳, 햇살 좋은 프로방스의 땅! 물론 지도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 풍경이었다. 다만 궁금했다. 그녀가 좇은 건 샤갈도 예술도 아니었다. 그녀는 왜 저 머나먼 이국으로, 한번 들어가면 돌아오기도 나오기도 힘들다는 곳으로, 저 낯선 땅의 수도원을 택했을까. 구체적으로 묻진 않았다. 다만 같이 가보고 싶다는 말만 던졌다.

그날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반년 후, 2014년의 마지막 날, 새해를 하루 앞두고 이탈리아를 거쳐 기차를 타고 프랑스로 넘어왔다. 피렌체에서 출발했다. 중간에 제노아에서 환승하고 이탈리아 국경을 지나 프랑스 땅에 당도했다. 생각 없이 예매했는데, 지중해를 따라 달리는 해안선 기차였다. 이동이 곧 여행이 되는 순간. 마침 날씨도 화창했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금빛 푸른빛 바다에 우리는 엉덩이가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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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국경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기차 안. 지중해가 햇살에 비춰서 반짝거린다. ⓒ 송주민


니스에 도착하자 해가 떨어졌다. 역에서 공중전화로 수녀원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그녀는 대략 간다고 말을 해뒀지, 정확히 언제 몇시에 도착한다고는 전해놓지 않았단다. 그래도 일단 가고 보자. 니스는 완연한 연말 분위기였다. 북적이는 인파와 번쩍이는 상점가가 밀집된 시가지를 지나쳐서, 남쪽 해안가 부근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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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있는 생폴드방스 이정표 ⓒ 송주민


생폴드방스로 향하는 저렴한 시외버스(400번, 편도 1.5유로)가 있었다. 배낭에 캐리어를 짊어매고, 종일 기차 이동을 한 피로를 떠안고 버스에 올랐다. 에메랄드 빛깔이 사라지고 검은 물결로 돌변한 지중해 해안 도로를 달리다가 어느새 산길을 올랐다. 빙글빙글 돌면서 올라가는 느낌인데, 바깥은 칠흙같이 어두워 분별이 가지 않았다.

사이프러스는 미풍에 나풀거리고...

1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이제 버스에서 내린다. 가로등 하나만 밝다. 니스보다 공기는 조금 더 차가워진 거 같고, 번쩍이는 네온사인은 자취를 감췄으며, 인적은 드물다. 달빛에 슬쩍 비친 사이프러스 나무가 미풍에 나풀거린다. 그녀는 14년 전 기억을 애써 더듬으며 주위를 두리번 거려보지만,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앞길처럼 갈피를 못잡고 있는 눈치다.

순간, 버스에서 함께 내린 한 젊은 프랑스 여자가 말을 걸어온다. 아담한 아시아인 남녀가 짐을 주렁주렁 매들고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눈치 챘는지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다. 프랑스인들 영어를 못하는 경우가 많던데, 이 사람은 꽤 유창하다. 함께온 그녀는 한마디만을 건넨다.

"도미니칸..."

도미니크 수도회(청빈과 탁발 생활을 강조하며 1216년 성 도미니크가 설립)라고 운을 떼자, 프랑스인 그녀는 "아하!" 단박에 알아채더니 길을 안내한다. 저기 저 불빛이 보이는 언덕 마을 쪽이 아니라, 어둠으로 향하는 길이다. 캐리어를 끌고 약간 비탈진 오르막을 올라간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길가에 선 사이프러스는 계속 어둡게 흩날린다. 그녀는 여전히 낯선 발걸음이다. 어쩌면 인생을 통째로 내어 맡겼을 곳을 다시 새롭게, 처음 온 것마냥 두리번 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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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방스에 있는 도미니크 수녀회 표지판 ⓒ 송주민


어둠 속에서 표지판이 보인다. 'Soeurs Dominicaines'(도미니크 수녀회)라고 적혀 있다. 출입구가 보였는데, 대문이 잠겨 있거나 하진 않다. 어두운 벽돌 건물은 세월이 묻은 윤곽만 느껴진다. 컴컴하기도 하지만, 피곤함에 파묻혀 차분히 수도원의 첫 공기를 음미할 새도 없다. 그녀는 다시 옛 기억을 더듬으며 현관을 찾는다.

"아, 여기야."

벨을 누른다. 피로는 호기심보다 강하다. 처음으로 와보는 수도원, 게다가 여성 수도자들만 살고 있는 금단의 문 앞에서 벨을 누르고 있는데도, 그녀의 어린 시절 영혼이 묻은 흔적에 만감이 교차할 것을 예상했던 순간임에도, 가슴이 쿵쾅거리기는 커녕 눈꺼풀이 바닥까지 내려온다.

한국말이 들리는 이방 땅의 수녀원?

이윽고 문이 열린다. 머리에 어두운 베일을 길게 내려 쓰고 하얀 수도복을 입은 여인, 검은 피부의 젊은 수녀님 한 분이 나온다. 컴컴한 시간에 온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을 어색한 눈으로 보더니, 불어 특유의 강한 발음으로 입을 연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놀라서 동그래진 그녀의 눈을 보며 추측건대 "누구세요?"라고 묻고 있다.

"우리는 로사 수녀님을 찾아왔어요."
"한국에서 오셨나요?"
"네."


대충 이런 말이 오가고 있다. 로사(가톨릭 교회 세례명) 수녀님은 그녀가 여기 와있을 때, 아니 그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이 수도원에서 사신 분이란다. 문을 반쯤 열고 우리에게 말을 걸던 수녀님은 이제야 긴장을 풀고 우리를 맞는다. 이어서 뜻밖의 음성이 들려온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우리말이다. 서툴고 어색하긴 하지만 분명 한국말이다. 영어도 잘 안 통하는 프랑스에서, 그것도 이 외진 곳에서, 이 오밤 중에, 불어 억양이 세고 피부가 검은 수녀님의 입을 통해 들리는 우리말이라. 갸우뚱 하는 나를 보며, 이번에는 그녀가 넌지시 입을 연다.

"아마도 저 수녀님 빼고 여기 계신 분들 모두 한국에서 온 분들일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수더분하고 동그란 인상의 여인이 걸어온다. 누가 보더라도 우리나라의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그러나 "봉수와" 저녁 인사를 하는 여기에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한국인이기도 프랑스인이기도 한 수녀님이 우리 앞으로 걸어오고 있다.

<다음 편에 계속>

○ 편집ㅣ박순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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