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이 '원종 스님'이었다는 사실, 아시나요?

[가족여행] 공주 마곡사에서 만나 백범 김구

등록 2015.06.02 15:31수정 2015.06.02 15:31
2
원고료로 응원
a

대웅보전에서 내려다본 마곡사 전각들의 스카이라인 마곡사는 태화산의 품에 요새처럼 깊숙히 들어앉아있는 거찰이다. ⓒ 서부원


봄의 끝자락, 5월의 마지막 날에 충남 공주시에 자리한 거찰 마곡사를 찾았다. 때 이른 무더위에 절을 품은 해발 417m의 태화산은 밀림처럼 이미 여름빛이 완연하다. 돌돌거리며 흐르는 마곡천의 물소리는 매미를 깨우려는 듯 유난히 크게 들린다. 울창한 숲과 짙은 초록을 드리운 계곡의 향연. '춘 마곡, 추 갑사(春 麻谷, 秋 甲寺)'라더니, 빈 말이 아님을 알겠다.

예로부터 절 아래에는 그에 기대어 사는 마을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때도 요즘처럼 번잡했을까 싶다. 풍광이 좋은 곳이면 어느 절이고, 우리나라의 '사하촌'은 모두 기념품 가게와 식당, 아니면 모텔들이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절의 입구인 일주문과 제법 멀찍이 떨어져 있어 다행이지만, 계곡을 따라 늘어서고 있는 식당들이 시나브로 마곡사 경내를 향하고 있다.


주차장에서 마곡사 경내까지는 꽤 멀다. 1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거리다. 매표소나 일주문 근처에 주차장을 만들 법도 하건만, 관광객들이 절을 오가는 길에 기념품 가게와 식당 골목을 반드시 지나도록 '배려'한 것이다. 점심시간을 넘긴 시간이어선지, 다행히도 소매를 잡아끄는 호객꾼도 없었고 거리도 비교적 한산했다.

상가의 끝, 차량 통행금지를 알리는 바리케이트를 지나면 사실상 마곡사 경내다. 도로 좌우의 가로수가 숲을 이루고 이내 터널이 되어 짙은 그늘을 만들어준다. 경내까지 차가 다닐 수 있도록 아스팔트가 깔려있지만, 이즈음 여느 도로 위처럼 후텁지근한 열기는 조금도 느낄 수 없다. 도로 위에 단 한 줌의 햇볕이 내려앉을 수 없을 만큼 숲이 울창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교회나 성당에는 없는데, 절에만 있는 게 뭔지 알아?"

갓 중학생이 된 아이의 느닷없는 질문에, 처음엔 난센스 퀴즈인 줄 알았다. 순간 불상? 탑? 스님? 기와집? 빤하고 밋밋한 답변만 머릿속을 스쳐갔다. 쉽게 맞힐 줄 알았다면서,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 스스로 답을 알려주었다. 정답은 '입장료'란다. 우스갯소리지만, 아이와 함께 짬이 날 때마다 여기저기 답사를 다녔더니, 이렇듯 아빠 앞에서 '풍월을 읊는' 정도가 됐다.

사찰 입장권은 현금으로만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카드 결제가 안 되니 현금 영수증이 될 리 만무했다.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고,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의 본사로 연간 수만 명의 관광객이 북적이는 거찰인데, 카드 결제기 하나 마련돼 있지 않다니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부러 마곡사를 찾아온 여행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해 못내 아쉽다.


그늘이 깊어 시원한 데다 가파르지 않아 남녀노소 걷기에 안성맞춤인 길이다. 이따금 소음을 내며 오가는 일부 차량들이 방해가 될 뿐,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지는 걸 느낀다. 여느 곳 같으면 '셀카봉'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이들이 여기저기 많았을 텐데, 이 길에서만큼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모름지기 절의 초입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계곡 건너편으로 전각의 기와지붕을 가리고 있는 형형색색의 연등들이 보인다. 마곡사가 틀림없는데, 곧장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다. 한참을 더 돌아가야만 절의 정문 격인 해탈문에 이른다. 길과 나란히 꾸불꾸불 흐르는 마곡천은 속계와 불계를 가르는 경계이며, 여행자가 가슴에 담는 마곡사에 대한 첫인상이다.

계곡을 끼고 깊은 산중에 들어선 지형적인 탓일까. 마곡사의 많은 전각들은 마치 오래된 도시의 낡은 골목의 그것처럼 어지러이 들어서 있다. 위계도 없고 질서도 없다. 여느 곳 같으면 으레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야 비로소 절 안마당인데, 여러 전각들이 그에 앞서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영산전이 입구인 해탈문에 앞서 있다.

너른 마당의 명부전과 산 중턱에 걸터앉은 산신각에 이르기까지, 영산전 주변만으로도 웬만한 절 규모를 넘는다. 천왕문을 지나면 극락교를 마주하게 된다. 다리 너머 훤칠한 석탑 뒤로 마곡사의 주법당인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우람하게 보인다. 말하자면, 마곡사는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으로 허리가 잘려 있다.

극락교의 바닥 돌은 유난히 반들반들 윤이 난다. 그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는 이야기다. 가만 보니 극락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자고 하니, 다리가 비어있을 겨를이 없다. 관광객뿐만 아니라 오가는 스님들의 발길이 잠시도 끊이지 않는다. 극락교는 남과 북 마곡사를 잇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a

마곡사 오층석탑 석탑 꼭대기에 다시 라마교 불탑을 얹어놓은 독특한 형태로 눈길을 끈다. ⓒ 서부원


다리 너머 마곡사 중정에 들어서면 여느 절에선 볼 수 없는 낯설고 특이한 것 투성이다. 마당 한 가운데 마곡사 석탑이 우선 눈에 띈다. 오층의 석탑 꼭대기에 금속제 라마 불교의 탑파를 덧세워 놓아 퍽 이채롭다. 탑 위에 탑이라니,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사례라고 한다. 서로 비례가 맞지 않고 거뭇한 빛깔 또한 도드라져 원래의 짝이었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 모습이다.

a

마곡사 심검당 주변의 전각들과 석탑 등이 없다면, 흡사 안채와 사랑채를 두루 갖춘 양반가옥을 연상시킨다. ⓒ 서부원


특이한 것으로 따지자면 바로 옆 심검당이 '갑'이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봐도 도무지 절집 건물 같지가 않다. 'ㄷ'자형 건물에 이어진 고방(창고)과 요사가 흡사 어느 큼지막한 양반집 가옥을 통째로 절 안마당에 옮겨놓은 듯하다. 주변의 여느 전각에 견줘 지붕이 유난히 낮은 데다 별다른 단청도 없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수줍은 듯 자리한 심검당의 동쪽엔 웬만한 전각 서너 개쯤 붙여놓은 듯한 초대형 강당인 연화당이 세워져 있다. 가장 최근의 건물인데, 사찰 내외의 주요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고 한다.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라면 대개 안마당에서 벗어난 절의 외곽에 위치하는 게 보통이다. 얼핏 연화당은 관광객들이 계곡 너머에서 마곡사 경내를 엿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담벼락 구실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주법당인 대광보전도 '보통'은 아니다. 불교에 문외한인 나와 같은 얼치기 여행자라면 자못 놀랄만한 건물이다. 정면에서 내부를 들여다보면 순간 불상이 보이지 않는다. 당황스럽게도 왼쪽 벽에 좌정한 채 오른쪽을 응시하고 있다. 서방정토를 상징하는 무량수전이나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불이 아닌,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동쪽을 향해 자리하고 있는 경우는 그 예가 드물다고 한다.

또, 바닥 마루에는 널찍이 나무껍질을 엮어 짠 삿자리가 있다. 설화에 전하기를, 어느 하반신 장애가 있는 이가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리며 틈틈이 짠 것이라고 한다. 백일기도를 마치고 법당 밖으로 나가려는데,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갔다고 한다. 어느 절이든 전설 한 토막 없는 법당 없다지만, 마루의 삿자리만으로도 예사롭지 않다.

대광보전 바로 뒤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2층짜리 육중한 건물이 마곡사 전체를 굽어보듯 서 있다. 대웅보전이다. 절집의 중층 전각은 그 자체만으로도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보나 이 전각이 마곡사의 주인일 것 같지만, 대광보전에 자리를 내준 채 살짝 '뒷방'으로 밀려난 듯 쓸쓸한 인상이다. 다만, 이곳에서 내려다본 마곡사의 스카이라인은 그를 능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a

마곡사 백범당 백범이 스무 살 청년 시절 승려 생활을 했던 곳으로, 곁에 그가 심었다는 향나무가 푸르른 모습으로 서 있다. ⓒ 서부원


그러나 마곡사의 '상징'은 따로 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 그러하다면, 단연 대광보전 곁 소박한 살림집 같은 '백범당'이야말로 마곡사의 진짜 주인이다. 이 건물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1896년 고향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 형무소에서 탈옥한 직후 숨어들어 생활한 곳이다. 백범은 마곡사 은거 중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하기도 했다.

쫓기던 백범이 굳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마곡사에 든 까닭은 뭘까.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은 조선 후기 <택리지>와 <정감록> 등 여러 비기에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히는 땅이다. 그 땅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찰 마곡사는, 비를 피해 찾아든 스무 살의 열혈 청년 백범에게 기꺼이 우산이 돼주었다.

이곳에 숨어들어 불교에 귀의했을지언정 백범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을 순 없었다. 불의한 세상에 당당히 맞서겠다며 이내 하산했고, 그의 앞에는 파란만장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백범은 광복 직후 일흔의 나이로 마곡사를 다시 찾게 되는데, 그때 심은 한 그루의 향나무가 그가 생활하던 옛 심검당 건물 옆에 지금도 푸르른 채 우뚝하다.

백범은 마곡사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인물이 됐다. 이달 말 26일, 마곡사는 경내에서 원종 스님(백범의 법명)의 66주기 추모제를 연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1949년 6월 26일은 백범이 서북청년회 출신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날이다.

"아빠, 우리가 아는 백범 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 스님이었다는 게 너무 놀라워. 내일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줘야겠어. 아마 이걸 아는 친구는 단 한 명도 없을 걸."

집에 돌아오는 내내 아이의 관심사는 온통 '원종 스님'이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마곡사의 볼거리는 남다른데다 지천이지만, '백범당'과 향나무 앞에서는 '조연'일 수밖에 없나보다. 수많은 관광객들의 물 흐르듯 한 시선도 꼭 그곳에서 오래 머문다. '춘 마곡(春 麻谷)'의 풍광을 즐기러 왔다가 백범의 자취에 숙연해져 돌아간 우리 가족의 마지막 봄나들이였다.
#백범 김구 #마곡사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