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법 사범' 되기 참 쉽네

[서평] 사람은 왜 짓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는가 <전락자백>

등록 2015.07.08 17:15수정 2015.07.0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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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6일, 재판이 한창이던 일본 우쓰노미야 지방재판소. 재판장은 한 남자에게 사죄의 말을 건넸다.

"진실한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못하여 17년 반의 오랜 세월에 걸쳐 자유를 박탈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전락자백>에서


이 남자는 1990년, 여아유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됐다. 취조 13시간 만에 하지도 않은 행위에 대해 '거짓자백'을 했다. 검사에게 "죄송하다"고까지 말했다. 그 후 다시 자백을 번복하며 항소·상고했지만 전부 기각돼 유죄판결이 확정됐다.

그러다 17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후에야 재심을 통해 무죄가 됐다. 사건 당시의 DNA 감정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고, 남자의 자백이 허위인 것이 명백하다고 판단돼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장의 사죄는 이 판결에서 나왔다. 국가에 의해 빼앗긴 20년의 세월을 무엇으로 보상해야 하는가.

무고한 사람이 취조를 통해 '거짓자백'에 이르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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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사람은 왜 짓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는가 <전락자백> ⓒ 뿌리와이파리

일본의 법학자와 심리학자 11인이 쓰고 엮은 책 <전락자백>은 위 사건을 포함한 네 건의 대표적인 원죄사건을 추적한다. 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는가. 이 책을 관통하는 물음이다.

책은 거짓자백을 일으키는 심리학적 요인을 분석하고 이를 부추기는 형사절차에 문제를 제기한다. 두 측면을 종합해 정의로운 민주적 사법제도를 위한 제언을 끌어낸다. 한국판에서는 변호사인 옮긴이의 '한국이야기'가 중간 중간 실려 있어 이해를 돕는다.


책에 따르면, 일단 체포된 피의자를 장시간에 걸친 취조가 "머릿속이 뜨겁고 멍해져서 새하얀 상태"로 만든다. 거기다 "네 누이가 '틀림없으니까 마음대로 대하라'고 말했다"거나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들이대는 방식으로 압박한다.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이제 무엇을 해도 부질없다는 기분이 들 즈음, 취조관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백해, 얼른 말하고 편해지도록 해" 등의 권유를 던진다. 시간이 넉넉할수록 이런 방식의 취조는 반복되고 더욱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만큼 '거짓자백'이 늘어날 수 있단 얘기다.

여기서 책을 옮긴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김인회 교수는 국가보안법의 문제점을 짚는다. 한국은 영장을 발부받으면 경찰에서 10일, 검찰에서 10일을 구속할 수 있다. 여기에 검찰은 이를 10일 더 연장할 수 있다. 총 30일까지 잡아둘 수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기본적인 구속기간에 경찰이 10일, 검사가 10일 더 연장할 수 있다. 최장 50일까지 잡아 가둘 수 있다. 이는 다른 사건과 차별하는 평등원칙 위반이고, 사상범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다. 김 교수는 이를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거나 대폭 개정돼야 하는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 경찰의 "사상범들이 물증이 어디 있습니까, 국보법 사범들은 자백에 포커스를 맞추고 수사를 하는 겁니다"란 항변을 제도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송변'의 "국보법은 헌법 위에 있고 형사소송법의 대원칙도 무시합니까"란 일갈이 현실에서도 아직 무색하다.

검찰 수사 받고 자살한 사람, 한국에서 5년 동안 55명

책은 일본의 원죄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문제점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JTBC>는 지난 6일 40대 주부의 자살 사건을 단독 보도했다. 이 주부는 남편의 수출 비리 의혹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았고 바로 다음날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검찰을 '강압 수사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이 보도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검찰 수사를 받고 자살한 사람이 55명이나 된다.

형사소송에는 '99명의 진범을 놓치더라도 1명의 억울한 희생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다. 억울한 희생자를 만드는 건 아무런 잘못도 없는 피고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영원히 '진범'을 놓치는 일이다. 따라서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는 행위'는 단순히 '진범을 놓치는 것'보다 훨씬 더 부정의하다고 할 수 있다. 결코 똑같은 가치가 아니다.

그렇다면 경찰과 검찰은 왜 자꾸 무고한 사람을 만드는가. 일본의 경우, 경찰관의 수사서류전집 제4권 '취조'편에는 '범인 갱생의 제1보가 자백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란 글귀가 실려 있다. 물론 진범에게 이 문구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이라면? 취조관의 단순한 예단이라면? 잘못된 선입관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한 채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무고한 자를 '거짓자백'으로 이끄는 원인이 된다.

누구나 짓지 않은 죄를 자백할 수 있다

또한 검찰은 외부의 견제를 받지 않고 기소를 할 수 있다. 일단 기소를 하게 되면 검찰 쪽에서는 형사 재판의 일방 당사자로서 피고인의 유죄 입증에 전력을 다한다. 마치 유죄면 승리하고 무죄면 패배라는 승부근성이 몸에 깊게 배있다. 잘못된 정의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유죄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만든다.

국가가 일반 시민을 수사하고 재판한 다음 처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또 공정한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반 시민은 국가와 맞서서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제도를 만들지 못하면 결국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을 인정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 <전락자백>에서

'나는 죄를 짓지 않을 거다'란 생각으로 무조건 '강력한 형벌'을 주장하거나 확정되지 않은 범인에게 '저주의 말'을 쏟아 붓는 건 오판이다. 아직도 무고한 사람은 꾸준히 생겨나고 있을 게다. 어쩌면 지금 옥중에도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 가슴 치며 눈물만 흘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기억하라. 언젠가 당신도 하지 않은 범죄에 대해 자백할 수 있다, 충분히.
덧붙이는 글 <전락자백> (이즈미 다케오미 외 7인 지음 / 우치다 히로우미 외 2인 엮음 / 김인회·서주연 옮김 / 뿌리와이파리 펴냄 / 2015.06 / 1만8000원)

전락자백 - 사람은 왜 짓지도 않은 죄를 자백하는가

우치다 히로후미 외 엮음, 이즈미 다케오미 외 글, 김인회 외 옮김, 이즈미 다케오미 외,
뿌리와이파리, 2015


#전락자백 #김인회 #뿌리와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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