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시집 한번 더 가셔야겠네요~"

[현장] 종로구청 독거노인 '생애 최고의 사진 찍는 날'

등록 2015.07.21 21:24수정 2015.07.2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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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 열린 노인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마음꽃이 피었다'에 참가한 어르신들이 분장 놀이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남소연


가발을 쓰고 고운 옷감을 어깨에 걸친 할머니가 수줍게 스텝을 밟는다. '무대'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간 할머니가 뒤로 돌아 청중들에게 "1번 미스코리아 김복순입니다~"라며 무릎을 살짝 굽혀 정말 미스코리아 인사를 하니 모두가 까르르 뒤집어진다.

뒤이어 자기 차례가 된 할머니들, 못하겠다며 빼다가도 "오늘 안하면 평생 이런 거 못해요" 하자 용기를 내 일어선다. 결국 다리가 편찮으신 한 분 빼곤 모두 일어나 '미스코리아'가 됐다.

최고로 예쁜 옷을 차려입고 모인 할머니들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 설렌 표정의 할머니 11분이 모였다. 할머니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오늘은 종로구청이 독거노인들을 위해 진행한 '마음꽃이 피었다' 프로그램 마지막날이다. 졸업작품을 전시하고 '내 생애 최고의 사진'을 찍는 날이다.

넓은 방안에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선생님의 손짓발짓을 따라 '도리도리 잼잼'으로 몸을 푼다. 최대한 행복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보라면 얼굴 근육을 실룩이며 웃어보이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라면 그대로 한다. 마치 유치원생들처럼.

"오늘 최고로 예쁜 옷을 입고 오시라고 했어요. 저 흰옷 입은 할머니는 그동안 한 번도 안 웃으시더니 오늘 처음 웃네요."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박현숙 종로구청 희망복지지원팀장은 노인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내가 화장을 해보긴 시집 온 뒤 오늘이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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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 열린 노인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마음꽃이 피었다'에 참가한 어르신들이 메이크업 전문가의 도움을 받은 후 거울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남소연


'준비운동'이 끝난 할머니들이 방 한 켠에 마련된 즉석 화장대로 차례차례 모셔진다. 그리고 화장을 마친 사람은 마루에 나가 '내 생애 최고의 사진'을 찍는다.

"아이구 세상에, 내가 화장을 해보긴 시집 온 뒤 처음이야."

'준비운동'을 가장 열심히 따라하신 표순덕 할머니(77)가 사진찍는 자리에 앉아 감격에 겨워한다.

장난기 발동한 기자가 "할머니, 그럼 화장한 김에 시집 한 번 더 가셔야겠네요" 했다가 바로 한 대 얻어맞는다. "그런 소린 중매나 선 다음에 하라니까." 역시 본전도 못 건졌다. 할머니에겐 함부로 농담을 거는 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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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 열린 노인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마음꽃이 피었다'에 참가한 표순덕 할머니(77)가 꽃단장을 한 후 환하게 웃고 있다. ⓒ 남소연


입담 좋고 유쾌해 보이는 표 할머니는 그러나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26살에 시집와 딸을 낳고 맹장수술을 받다가 의료사고로 아들을 가질 수 없게 되자 27살에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지금이야 아들 못 낳는게 무슨 흠이 되나. 근데 그때는 다 그랬어."

결혼전에 배운 봉제기술로 양장점을 하며 혼자 살아온 세월은 굳이 다 듣지 않아도 알 듯 하다.

그래도 "노령연금 나오지, 수급 주지, 쌀까지 갖다주는데, 이렇게 좋은 세상이 어딨어"라고 긍정적이신 할머니는 최근 복지관에서 배운 휴대폰 비디오 촬영에 푹 빠져 산다고.

"평생 밖에 뭐가 있는 지도 모르고 사는 할머니들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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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 열린 노인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마음꽃이 피었다'에 참가한 어르신들이 사진 촬영에 앞서 메이크업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있다. ⓒ 남소연


아까 미스코리아 연기를 잘 하신 김복순 할머니는 화장을 마치고 "내가 원래 얼굴은 잘 관리하지 않는데..."라면서도 흡족해했고, 여기저기서 "몇 십년만인지 모르겠네. 내가 색조화장을 다하다니"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날 사진을 찍은 할머니들은 종로구에 있는 1100여 명의 독거노인들 중에 주민센터 추천을 받아 '선택'받은 분들이다. '왜 할아버지들은 안 뽑았냐'는 질문에 종로구 관계자는 "할아버지들은 그래도 사회생활을 하시지만, 할머니들은 정말 평생 밖에 뭐가 있는 지도 모르고 집안일만 하신 분이 많다"고 얘기했다.

할머니들은 10주간 인왕산도 가고 미술관도 갔다. 얼마전에는 공모에 당첨돼 뮤지컬 <봄봄>을 단체관람했다.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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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 열린 노인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마음꽃이 피었다'에 참가한 어르신들이 꽃단장을 한 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 남소연


행사를 돕던 장례지원단체 '나눔과나눔' 박진옥 사무국장은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인 만큼 저마다 기구한 사연이 없는 분이 없다"면서 "그분들이 이렇게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종로구와 나눔과나눔은 할머니들에게 이날 찍은 개인사진과 단체사진을 드리고 꾸준히 사후관리할 계획이다. 이날 화장은 김형숙 메이컵아티스트, 사진은 차창진 작가의 재능기부로 이뤄졌다.

할머니들은 오늘 화장하면서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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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종로구 부암동 전통문화공간 '무계원'에서 열린 노인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마음꽃이 피었다'에 참가한 어르신들이 직접 그린 그림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남소연


#할머니 #독거노인 #화장 #나눔과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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