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로 뭐라 했지? 아, 빨갱이 내가 빨갱이야

[공공미술프로젝트-난 왜 독일인과 빨래를 하게 됐나②] 생활의 극복

등록 2015.07.30 14:33수정 2015.07.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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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 'Wasch Wasch FEST-빨래 프로젝트'는 베르나우(Benau) 문화부와 베를린예술대학 Art in Context 연구소의 주최로 필자가 독일에서 2015년 6월부터 9월까지 진행하는 참여형 예술프로젝트다.

'불안'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올해로 분단 7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과 통일 25주년을 맞이하는 독일 사이에 어떠한 역사적 간극이 존재하는지,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전쟁 이후 독일과 한국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지를 고민하며 베르나우 지역주민들과 예술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 과정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나누고자 몇 회에 걸쳐 게재하려 한다. - 기자 말

한국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독일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가령, 유명한 독일의 철학가 두 명의 책이 한국에서는 금지서적이었다는 것. 더군다나 마르크스도 아닌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국방부의 금지서적이라는 언론 보도가 불과 얼마 전까지 나왔다는 것.

또 북한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은 서로의 나라로 여행을 갈 수 없다는 것. 특히 한국에서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발언을 한다면, '빨갱이' 혹은 '종북'으로 몰리거나, 감옥에 가야 하거나, 출입금지를 당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들을 독일 사람들에게 들려준다면 그들은 이렇게 되묻곤 한다.

"지금 북한이 아니라 한국 얘기를 하는 거지?"

한편, 독일 언론을 통해 읽히는 한국은 생각보다 충격적이다. 지난 1월 타츠(taz)는 한 기사의 제목에 'Paranoide'(편집증적인, 피해망상적인)라는 형용사를 사용해 한국을 묘사했다. '편집증'에 대한 정의를 위키피디아에서 검색하면 '심각한 우려나 과도한 두려움 등의 특징이 나타나는 이상심리학적 증상을 일컫는다. 대개 비이성적 사고나 착각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편집증이란 다시 말해,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정신 이상 증세의 한 가지이다'라고 나온다.

이렇듯 독일 언론이나 미디어를 통해 노출되는 한국은 때론 북한과 다를 바 없이 비정상적인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읽히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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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독일 언론 타츠(taz)가 '한국 표현의 자유, 편집증적 상황들'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기사. 황선씨의 구속과 신은미씨에 대한 강제추방, 통합진보당 해산 등의 내용을 다루면서 한국의 냉전 상황과 짤막한 한국사를 서술하고 있다. ⓒ TAZ


왜 나는 독일인과 빨래를 하게 되었나

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세계 유일의 분단된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에 나에겐 익숙한 일상들이 독일에서는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황당한 에피소드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릴 적 반공포스터를 그려서 선생님께 칭찬받았던 이야기를 독일친구들에게 들려주면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웃다가 이내 심각하게 질문세례를 퍼붓곤 했다. 이를테면 '어린 아이가 도대체 왜 반공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 포스터를 그려야하는 거지?' 따위의 질문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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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에서 '반공포스터'라고 검색을 하면, 갖가지 포스터들이 주르륵 뜬다. ⓒ 구글


그래서 일까. 처음 베르나우에 왔을 때, 나는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독일의 동쪽에 산다는 이유로 소비에트 군인들의 일시적 통제를 받은 사람들, 그리고 어느 순간 공산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로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참고기사 : 온통 빨간색 군사기지, 한국이 불안하다)

내가 처음 베르나우에 위치한 소비에트 육군군사보급기지에서 공산주의적 프로파간다 그림들을 봤을 때 느꼈던 '불안'의 근원적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반공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나의 의식 때문이었다.

김수영이 '생활의 극복'이라는 글에서 이미 오래전에 서술한 것처럼 '우리들의 미래상을 내다 볼 수 있는 눈을 주지 않는, 우리들의 주위의 모든 사물을 얼어붙게 하는 모든 형태의 냉전, 너와 나 사이의 냉전'이 대한민국에 아직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곳이 독일이건, 미국이건, 아프리카이건 상관없이 한국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과 사람사이에 '냉전'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한국을 떠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Wasch Wasch FEST-빨래 프로젝트'는 바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베르나우에서 분단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불안'으로 빨간 비누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독일 사람들과 발로 질근질근 밟아 빨래를 해보기로 했다. 한마디로 이 프로젝트는 김수영의 '생활의 극복'이라는 글의 제목처럼 냉전에 의한 '집단적 불안'을 씻어 내버리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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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ch Wasch FEST-빨래 프로젝트' 포스터 빨간 비누안에 독일어로 Angst(불안)라는 글자가 들어가 있다. ⓒ 권은비


'일단 춤부터 추자'는 독일 아줌마

나의 '빨래프로젝트'의 의도와 진행계획을 잘 알고 있던 몇몇 관계자들은 내가 베르나우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첫 주민설명회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하자 많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베르나우에 사는 사람들은 베를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달라요. 특히 분단을 경험한 동독 출신 어르신들은 보수적인데다 비협조적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할 겁니다. 특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공산주의나 반공주의에 대해 지역주민들과 이야기하는 건 좀 어려울 수도 있어요."

프로젝트 시작 전부터 겁을 단단히 먹을 수밖에 없는 충고들뿐이었다. 드디어 첫 주민설명회 날,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밤새 만든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갖고 베르나우로 향했다. 부랴부랴 설명회 장소로 가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맑은 하늘에 소나기가 퍼부었다. 겨우 도착한 설명회 장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으로 눈이 마주친 독일 아주머니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돌아오는 대답이 황당했다.

"네, 안녕하세요! 우리 같이 춤추지 않을래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어느새 16여명의 독일 어르신들과 둥글게 손을 맞잡고 ABBA노래 'I have a dream'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십 분 동안 춤을 춘 뒤, 본격적으로 'Wasch Wasch FEST-빨래 프로젝트'를 설명하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메일상으로 약속되었던 프로젝터와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줄줄 흘렀다.

갑자기 뒤통수가 뜨끔해서 돌아보니 16여명의 어르신들이 일제히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밤새 만든 프레젠테이션 자료고 뭐고, 일단 나는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코리아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어김없이 질문 하나가 되돌아온다.

"Korea? dann Nord oder Süd? (코리아? 그럼 북이야, 남이야?)

대략 10분 남짓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했을까. 내가 능숙하지 못한 독일어로 지루했을 수도, 혹은 재미없을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독일 어르신들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이야기를 마친 뒤에 주변을 돌아보니 어르신들은 어느새 의자를 끌고 내 주변에 최대한 가까이 앉아 나의 몸짓과 말, 표정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보고 들으려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공공미술의 묘미였다. 순간 내 귓가 어딘가에서 쿵쾅 쿵쾅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질문이 있는지 묻자 한 독일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자네, 독일에 아주 잘 왔어! 우리에게 마침 딱 이런 프로젝트가 필요했거든! 내가 공산주의자거든, 한국말로 뭐라 그랬지? 아, 빨갱이! 내가 빨갱이야. 이 프로젝트 끝나면 한국 사람들한테 얘기해줘. 빨갱이 두려워 할 거 하나 없다고!"

앞서 내가 프로젝트를 설명하면서 한국말로 '빨갱이'라는 단어의 어원과 쓰임새에 대해 잠깐 이야기 했던 부분이 꽤 인상 깊었나보다. 한데 막상 독일 할머니를 통해 '빨갱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과연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 편집ㅣ최유진 기자

#독일 #공공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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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시각예술가로 활동하다, 독일 베를린에서 대안적이고 확장된 공공미술의 모습을 모색하며 연구하였다. 주요관심분야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사회 공동체안에서의 커뮤니티적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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