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왜 감사원 앞에서 분신자살을 택했나

춘천시와 10년 갈등, 마지막으로 감사원에 민원 제기했던 고 이병길씨

등록 2015.07.29 17:29수정 2015.07.29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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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길씨가 분신을 한 장소. 아스팔트와 가로수 일부가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다. 뒤로 감사원 건물이 올려다 보인다. ⓒ 성낙선


지난 20일 낮 12시 30분경,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감사원 정문으로부터 50여 미터 떨어진 거리에 정차해 있던 승용차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했다. 차량은 전소했고, 운전석에 앉아 있던 탑승자 한 명이 사망했다. 사망자는 춘천시에 거주하는 한 장애인 사업체 대표로 확인됐다. 그의 나이 59세. 그가 사고 현장에 남긴 신분증에는 '이병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수석에서 휘발유통이 발견됐다. 경찰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추정했다.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감사원 앞에서 일종의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그는 자신이 2003년에 설립한 한 장애인보호작업장과 관련해, 춘천시와 갈등을 겪었다. 언론은 이 시설의 운영권을 놓고 대립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감사원 앞에서 누군가 분신을 하는 일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죽은 뒤, 대다수의 언론들은 그의 남다른 죽음을 단순 사건사고 기사로 보도했다. 그 기사들에는 고인이 춘천시와 갈등을 빚었다는 사실만 나와 있지, 그 갈등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밝혀 놓지 않았다.

대낮에 감사원 앞에서 분신까지 한 사람의 죽음을 이런 식으로 가볍게 대할 수는 없다. 그는 어쩌다 자신이 살고 있는 춘천시를 떠나 그처럼 먼 거리에 있는 감사원까지 찾아가서 유서조차 남기지 않은 말없는 죽음을 선택했던 것일까? 그는 말을 잃었지만, 그가 인터넷에 남긴 글들은 많을 걸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가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따라가 봤다.

"장애인들이 운영하는 당당한 사업체를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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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제지 장애인 작업장 진짜 주인은 누구냐?" 팻말을 듣고 고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춘천시청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 나환목씨. 나씨는 고인이 된 이병길씨와 오랜 동료이자 친구 사이다. ⓒ 성낙선


고인이 된 이병길씨와 춘천시 사이의 인연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는 2, 3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친 다음, 2003년 춘천에서 춘천시지체장애인협회 이름으로 화장지와 복사지 등을 생산하는 장애인보호작업장(장애인보호작업시설, 아래 시설)을 설립했다. 그리고 법에 정해져 있는 대로, 춘천시에 행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시설 설립 초기에는 이씨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 등록을 했다. 그러다가 "장애인들과 함께 공을 나눌 생각으로" 춘천시지체장애인협회 이름을 사업자로 등록했다. 그는 이때 자신도 2급 중증장애인으로서 "장애인들도 비장애인들과 같이 당당한 사업체를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근로자 수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시설 이름은 '산천제지'로 지었다.


이씨는 산천제지를 설립하면서,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춘천시로부터 건물과 토지 등을 무상으로 임대 받는 동시에 인건비 일부를 지원받았다. 춘천시의 지원을 받는 과정은 지난했다. 공무원들은 그가 추진하는 사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부정적인 견해가 더 많았다. 이씨는 시의 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공무원들을 설득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나중에 갈등을 빚게 되는 '시설의 소유권'에도 논란의 소지가 전혀 없었다. 산천제지는 춘천시가 만들어 이씨에게 위탁한 작업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씨가 만들어서, 자신의 이름으로 설립 신고까지 마친 작업장이었다. 소유권 논란을 일으킬 만한 요소는 아무 데도 없었다.

건물 등의 부동산은 춘천시로부터 빌려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산천제지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자는 이씨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했다. '산천제지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이씨를 비롯해 그와 함께 일하는 장애인들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이씨의 '착각'으로 끝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업이 성장하면서 춘천시와의 갈등 심화

어렵게 사업을 시작한 이씨는 초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사비를 털어가며 시설을 운영했다. 장애인 사업체를 운영하는 일이 결코 순탄할 리 없었다. 자금이 부족할 때는 급전을 빌리기도 했다. 시설 설립 계획을 세울 당시 "장애인들의 자립을 위하여 자립장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일을 추진했지만, 성공 여부를 확신하기 어려웠다.

춘천시와의 갈등이 본격화된 건 2005년부터다. 춘천시는 어찌된 일인지 그해 1월 이씨에게 공금 횡령, 보조금 부당 수령, 지방재정법 위반 등 10여 가지의 비리가 있다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수사 결과, 이씨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사업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수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겹치면서 이씨는 상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씨는 자금과 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했다. 고생 끝에 산천제지의 운영이 어느 정도 안정 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한 건 시설을 설립한 지 3, 4년이 지났을 무렵부터다. 산천제지는 2006년에 37억 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2007년 매출액은 88억 원의 규모에 달했다. 근로자 수는 52명에 이르렀다. 그 사이 건실한 사업체로 성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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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산천제지 사업장을 방문한 정치인 손학규씨와 함께 사진을 찍은 이병길씨(사진 오른쪽). ⓒ 공화의 방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오르면서, 공무원들의 지도와 감독도 함께 강화됐다. 공무원들은 그 무렵부터 산천제지의 위탁 계약 주체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중앙지체장애인협회(한국지체장애인협회)로 할 것을 요구했다. 이씨는 처음엔 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춘천시 공무원들의 요구가 계속되자, 나중엔 결국 그 요구를 수용했다.

갈등은 2007년 7월 춘천시가 산천제지의 운영을 중앙지체장애인협회에 위탁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나서 오히려 더 확대됐다. 당시 이씨는 '장애인들이 중앙회를 중심으로 힘을 뭉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춘천시가 요구하는 위탁 운영 계약에 동의했다. 계약은 춘천시장과 중앙지체장애인협회 사이에 체결됐고, 서명 날인에 이씨 이름은 제외됐다.

이씨는 이때까지도 산천제지를 중앙지체장애인협회 이름으로 위탁 운영하는 데서 별다른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중앙지체장애인협회라는 힘 있는 단체의 영향력을 빌려, 산천제지를 더 크게 성장시킬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다. 그러면서 산천제지를 운영할 권리와 사업권은 여전히 자신에게 있다고 판단했다. 중앙지체장애인협회에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이름을 올린 것이어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대표' 지위를 박탈당하고 나서는 재판에서도 패소

하지만 산천제지 위탁에는 이씨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허점'이 있었다. 춘천시로부터 사업 위탁을 맡은 중앙지제장애인협회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설 운영을 책임질 사람인 시설장까지도 교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크게 유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엔 중앙지체장애인협회 위탁 운영이 이씨의 발목을 잡는 결과를 낳게 된다.

춘천시는 2008년 2월, 이씨가 "보조금(도비, 시비)을 유용"했다며 소명자료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는 곧 이어 이씨를 춘천경찰서에 고소했다. 그 사이에, 중앙지체장애인협회는 자체 감사를 실시한 후 이씨의 시설장 직무를 정지시켰다. 시설의 대표 지위를 박탈한 것이다. 그는 이때부터 더 이상 회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씨의 불행은 시설장 자격을 박탈당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2008년 9월, 그는 결국 업무상 횡령죄로 구속됐다.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에 접대비 및 업무추진비로 사용한 1억 2천여만 원이 업무상 횡령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그는 신원이 확실하고 도주 우려가 없는데도 160여 일 간이나 구금이 된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

이씨는 회사 영업을 위해서 활동비로 불가피하게 그 돈을 사용했다고 항변했다. 실제 산천제지의 매출은 그가 업무상 횡령죄를 저질렀다는 2005년과 2007년 사이에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 사이, 그가 사용했다는 접대비 등이 음성적으로 사용된 것도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활동비 내역은 모두 확인이 한 가능한 자료로 남아 있었다.

산천제지는 또 '춘천시보조금관리조례'에 따라 춘천시가 요구하는 정산보고서를 정기적으로 제출해 왔다. 이씨는 나름대로 사업을 법에 따라 투명하게 경영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춘천시가 보조금을 유용했다며 자신을 경찰에 고소한 데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은 이씨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는 이와 관련해, 자신이 개설한 다음 인터넷 카페에 "(활동비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중증장애인들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지급하는 탄탄한 시설로 키웠던 것"이라는 해명성 글을 남기기도 했다. 법원도 그런 해명을 일부 인정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결국엔 법원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씨가 시설장 직무를 정지당한 뒤, 산천제지에서 일하던 장애인근로자 20여 명도 함께 해고됐다. 장애인근로자들이 해고된 데는 '근로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이유가 포함됐다. 그 후 이씨가 자리를 비운 시설장에는 춘천시에서 퇴직한 공무원이 임명됐다. 그 외 다른 직원들도 상당수 퇴직공무원들로 채워졌다.

분신 한 달 전, 마지막으로 감사원에 민원을 제기하지만...

이씨는 2008년 10월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장애인보호작업장을 오늘에 이르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법원 선고에 불복, 항소를 제기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춘천지법 항소심에서는 벌금형으로 형량이 크게 감량됐다. 벌금은 800만 원이었다.

이 항소심에서는 '(이씨의 횡령죄가) 악의적 횡령은 아니나 법령 위배'라는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당시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카드결제나 계좌이체 등 자료가 모두 남는 거래를 통해 이 사건 금원을 사용한 경위에 비추어보면 악의적으로 이 사건 횡령 범행을 저질렀다기보다는 전문가의 조력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회계 규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 사건에 이르게 된 사정도 엿보인다"고 밝혔다.

이씨는 1, 2심에서만 재판을 스무 번 가량 치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은 2심 판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은 2010년 8월 상고심 기각을 선고하고, 벌금 800만 원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가) 돈을 법령에 어긋나게 사용해 작업장에 근무하는 장애인들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밝혔다.

이 같은 판결로 이씨는 결국, 산천제지를 떠난 것도 모자라 업무상 횡령죄를 범한 죄인 취급을 받게 됐다. 이 무렵, 그의 억울함은 극에 달했다. 대법원 재판 결과가 나온 후, 이씨는 이 모든 문제가 어디에서 잘못됐는지를 되짚었다.

그리고 지난 6월 19일 감사원에 '춘천시와 중앙지체장애인협회 사이에 체결된 위탁 운영 계약에 위법한 사실이 있다'는 민원을 제기했다. 여기서 이씨는 춘천시는 토지와 건물 등을 무상으로 빌려주었을 뿐, 실제 이 사업을 운영하는 주체가 아니므로 산천제지를 다른 기관에 위탁할 권리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와 동시에 중앙지체장애인협회 또한 위탁을 받을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산천제지를 실제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사업 주체는 '춘천시지체장애인협회'로, 중앙지체장애인협회는 단지 이름만 올려놓은 상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중앙지체장애인협회는 산천제지에 아무런 권한도 행사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이씨는 춘천시와 중앙지체장애인협회 사이에 체결된 위탁 계약이 "원인 무효"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감사원은 그가 분신을 하기 3일 전인 지난 17일 '이씨가 제기한 문제에 위법한 사항이 없다'는 내용의 간단한 회신을 보냈다. 이씨는 크게 낙담했다.

이병길씨는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산천제지의 주인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 같은 주장과 관련해, 춘천시는 지난 22일 "사업에 필요한 건물과 토지, 장비 등을 무상임대하고 매년 계약 기간을 연장해 왔으므로, 춘천시에 소유권이 있다"는 입장과 "중앙지체장애인협회와 체결한 위탁 계약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진행됐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이씨가 끝까지 산천제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춘천시의 한 관계자는 "이씨에게 시설에 대한 소유권이 춘천시에 있다는 사실을 그때그때 알려줬고, 그 사실을 이씨도 잘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씨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말을 덧붙였다.

"더 이상 구제받을 방법이 없나?... 정말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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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아들이 군 복무 중인 JSA경비대대를 방문했을 당시 판문점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이병길씨. ⓒ 공화의 방

하지만 산천제지의 소유권이 춘천시에 있다는 주장은 시가 산천제지에 무상으로 빌려준 부동산에만 해당된다. 산천제지의 사업권과 운영권은 '중앙지체장애인협회'가 아닌 '춘천시지체장애인협회'에 있었다. 따라서 이씨가 "춘천시와 중앙지체장애인협회 사이에 체결한 위탁 운영 계약은 불법"이라고 한 주장은 결코 허튼 소리로 볼 수 없다.

그의 주장대로 두 기관 사이에 체결된 계약은 적법성 여부를 충분히 따져볼 만한 문제였다. 그런데 감사원은 춘천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아무런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씨가 제기한 민원을 회신 공문 한 장 보내는 것으로 끝냈다.

이씨의 친구로 산천제지 설립 당시부터 함께 일했던 나환목씨에 따르면, 이씨는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감사원을 찾아간 이유는 회사를 되찾겠다는 생각보다는 춘천시와 중앙지체장애인협회 사이에서 벌어진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으려는 마음이 강했다. 최소한 자신이 제기한 민원에 대해 감사원으로부터 충분한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이씨가 십여 년 가까이 시달려온 싸움은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간 감사원 앞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곳에서 조용히 혼자 눈을 감아야 했던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감사원 회신을 받고 난 뒤, 그는 주변의 한 지인에게 "달리 구제받을 방법"은 없는지를 묻는 말과 함께 "정말 억울하다"는 말을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억울함을 호소하던 그의 육신이 24일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장마철 장대비 속에서 치러졌다. 이날 사람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겪었던 모든 원한을 잊고 편안히 잠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가 이 세상에 남긴 '한'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씨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함께하는세상'이라는 장애인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재기를 꿈꿨다. 하지만 함께하는세상을 설립하고 운영하는데도 산천제지만큼이나 많은 '장애'를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그에게 국가는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는데 오히려 국가가 더 큰 장애가 됐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고인이 된 이병길씨는 지난해 7월경 다음카페 '공화의 밤'에 이렇게 썼다.

"함께하는세상이라는 법인을 설립하고 쉼 없이 달려온 세월이 어느새 두 돌이 지났다.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정상을 몇 발짝 남겨두고 한 발짝 더 떼기가 이토록 힘이 든다."

그의 유언을 찾아볼 수 없는 지금, 그 말이 마치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처럼 들린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이병길 #산천제지 #함께사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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