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도와 싸움질에 무기정학까지
'노가다'하던 고졸, 변호사 되다

[공부해서 남 주자②] '사회적 약자의 허위자백 사건' 맡은 박준영 변호사②

등록 2015.08.08 18:57수정 2015.08.08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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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해서 남주나"라는 말이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학벌을 얻어 출세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있다. 과거 공부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었고, 공부는 낙오자를 양산하는 게임으로 변질됐다. 1% 소수만이 승자독식의 수혜자가 되고, 나머지 99%는 불행하다. 공부에 대한 인식 전환이 없으면, 우리사회는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 "공부해서 남주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4월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에 이어 지난 5일 '사회적 약자의 허위자백 사건'에 모든 것을 내건 박준영 변호사를 만났다. - 기자 말

☞ 박준영 변호사 인터뷰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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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상을 떠난 가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 우측이 박준영 변호사의 유년 시절. ⓒ 이희훈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빚은 평생 박준영 변호사를 옥죄었다. 그래서일까. 박 변호사는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연수원생 시절, 부잣집 딸을 만나기 위해 '마담뚜'(중매쟁이)와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스무 번 넘게 선을 봤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할 때 삼성과 대형 로펌에 잇따라 원서를 넣었다. 그는 그때 갑작스럽게 마라톤을 완주했다.

자기소개서의 제목은 '말아톤'. 고졸 출신 연수원생이 명문대 출신 연수원생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삼성과 대형 로펌은 고졸 변호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삼성이나 대형 로펌에 들어갔으면, 철저하게 기득권의 수족이 돼 살았을 것이다. 빚 때문에 너무 힘들었고, 편안한 삶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박 변호사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열심히 살았다"고도 했다. 국선변호사로서 열심히 돈을 벌었다. 하지만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을 접하면서 '사회적 약자의 허위자백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됐다. 변호사 사무실을 내놓으면서까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이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고 재심을 추진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황금만능시대에 특별한 괴짜다. 그는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마지막으로 '개천에서 용 난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는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많다. 자신의 경험 탓이리라. 박 변호사는 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점심을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짜장면과 볶음밥으로 때우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와의 인터뷰 시간은 5시간을 넘겼다.

자퇴, 무기정학... 그는 이미 실패한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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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변호사의 어린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 ⓒ 이희훈


그의 유년·학창시절은 불우했다. 부모님 고향인 전남 완도군 노화도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장사로 그럭저럭 생계를 꾸려나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노름에 빠졌고 술을 먹으면 어머니를 때렸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했고,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그는 집이 싫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광주로 유학을 떠났다.

방황이 시작됐다. 박 변호사는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무단결석을 밥 먹듯 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뒤 자퇴했다. 서울 왕십리 프레스 공장에서, 인천 정비 단지에서 일했다. 그때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발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따라."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또래보다 1년 늦게 고향의 종합고등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때는 취업반이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고 싸움질도 많이 했다. 후배들을 데리고 서울로 가출하기도 했다. 3년 동안 무단결석 일수가 100일을 넘었다. 고3 선생님은 그의 생활기록부에 '준법정신이 미약하다'고 썼다. 운 좋게 목포의 한 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1학기 때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도 받았다.

이후 군대에 다녀왔고, 제대 후에는 복학하려고 우럭·광어 양식장과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막노동) 일을 했다. 1997년 2학기 때 복학하려 했지만, 장학금이 사라졌다. 박 변호사는 "나보다 공부 못했던 친구들은 좋은 대학에 갔는데, 나는 '이 모양 이 꼴'이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면서 "이런 상황을 뒤집고 싶었다"고 했다. 그해 7월 법대에 다니던 군대 선임 '배 병장'을 따라 서울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다.

그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비웃었다. 할아버지는 "건방지게 감히 사법시험을 공부하느냐"고 화를 낼 정도였다. 고시촌에서도 고졸인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혼자 옥편을 찾아가면서 공부했다. 학원 갈 돈이 없어서 강의 테이프를 샀다. 샤워할 때도 테이프를 들었다. 시간을 아끼려, 고시원 방에서 '혼밥'했다. 주변에서 "유난스럽다"는 얘기가 나왔다.

박 변호사는 200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방황했다. 이듬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는 생각에 사법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은행에서 2억 원을 빌려 아버지가 남긴 빚 일부를 갚고, 사법시험을 공부할 때 생활비를 대준 외삼촌에게 1억 원을 빌려줬다. 이 돈이 문제가 됐고, 카드 8개로 돌려막기를 했다. 버티지 못하고 연수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다.

빚 때문에 연수원을 휴학하는 경우는 유례가 없었다. 그는 별정직 공무원 신분임에도 과외를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 연수원에 있으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했나.
"사법시험 발표 전에, 다들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기도한다. 하지만 연수원에 들어가 폭탄주 마시고 고급요리를 먹는다. 저는 바에서 여자를 앞에 두고 술도 먹었다. 그런 상황에서 소수자나 약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때 약자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은 결국 기득권층을 대변하고 있다. 저 또한 그렇게 살려고 했다."

사회적 약자를 내쫓는 변호사가 싫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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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능력이 있고, 나 혼자 잘 나서 변호사가 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가족의 희생이 있었고, 사회적 관점으로 봤을 때 난 운이 좋았다. 내 가족을 돌봐야 하는 생각에 좋은 결혼과 좋은 직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 불운한 사람을 위해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 이희훈


2006년 1월 연수원을 졸업한 뒤, 연수원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수원의 한 변호사 밑에서 일하게 됐다. 월급 500만 원. 빚이 많아 생활이 넉넉지는 않았다. 그해 치른 결혼식에서도 축의금을 받아 식대를 내야 할 만큼, 여윳돈이 없었다. 변호사 사무실 일도 하면서 국선 변호사 일도 했다. 돈을 모아 2007년 7월 개업했다.

이후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을 접하면서 그의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그는 유명해졌고, 사회적 약자의 허위자백 사건에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그는 "잘 나갔다, 외국 맥주만 마시고 양주도 자주 마셨다, 소줏값이 얼마인지 몰랐다"면서 "하지만 곧 변호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했다.

-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왜 변호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나.
"변호사는 돈을 받고 변호하는 사람의 이익을 대변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사회적 약자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주택이나 상가의 계약 기간이 끝났다면 세입자가 짐을 싸야 하는 게 법 논리 상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짐을 싸지 않고 버티는 그들을 쫓아내는 선봉장 역할을 해야 했다. 회의감을 느꼈다."

- 노숙소녀 살인사건 때 상처를 받은 것도 변호사 생활에 회의를 느끼게 된 이유인가.
"당시 인권을 얘기하는 분들한테 도움을 요청했지만, 도움을 거의 받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 등의 가치를 추종하는 분들 중에 자기 뱃속을 채우면서 자기가 좋아서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이 많다. 그건 자위행위다. 가치가 아니라 사람을 봐야 한다.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할지 생각해 봐야 한다."

- 수원 노숙소녀 살인사건 이후 억울함을 토로하는 사건이 많이 들어왔을 것 같다.
"저 또한 돈 벌 수 있는 사건보다는 국가보안법 사건과 재심 사건을 했다. 하지만 돈 되는 일을 해서 내가 고용한 변호사와 직원들에게 월급을 줘야 했다. 과부하가 걸렸고, 양립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 2013년에는 안철수 의원 쪽으로부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 제의를 받기도 했다. 더 잘 나갈 수 있는 기회 아니었나?
"그때 두 번이나 저를 찾아왔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데,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거절했다."

현재 그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돈 좀 벌어놓고, 좋은 일 해도 되지 않을까. 그의 말이다.

"내가 능력이 있고, 나 혼자 잘 나서 변호사가 됐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가족의 희생이 있었고, 사회적 관점으로 봤을 때 난 운이 좋았다. 내 가족을 돌봐야 하는 생각에 좋은 결혼과 좋은 직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 불운한 사람을 위해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는 말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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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시스템이 갈수록 한 번 실패한 사람이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든다"면서 "저는 여러 번 낙오했지만 아버지가 믿어줬기 때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도 믿음을 주면 변할 수 있다" ⓒ 이희훈


그는 법조계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변호사 생활 10년을 하면서, 변호사의 사회적 역할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말을 이었다.

"사법시험 합격 수기를 보면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를 돌보겠다는 내용이 빠짐없이 들어간다. 신임 판사나 검사들이 선서할 때도 이런 내용이 들어간다. 하지만 법조인들이 정말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법 집행을 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사회적 강자들은 법이 없어도 자기 권익을 실현할 수단을 갖고 있다. 사회적 약자는 법의 보호가 있어야지 자기 권익을 실현할 수 있다. 법의 저울은 사회적 약자 쪽으로 좀 더 옮겨져야 한다."

- 지금까지의 인생에 후회는 없나.
"이 사회의 보통 가장이다. 어린 자식을 키우고 있고, 가족을 소중히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힘들면 가족 생각이 난다. 좀 더 안정적인 토대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 다들 '앞으로도 돈 안 되는 사건을 할 거냐'고 묻는다.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다만 '사람은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는 말을 믿는다."

그는 인터뷰 말미 방황하는 청소년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회 시스템이 갈수록 한 번 실패한 사람이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든다"면서 "저는 여러 번 낙오했지만 아버지가 믿어줬기 때문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방황하는 청소년들도 믿음을 주면 변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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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영 변호사 ⓒ 이희훈



○ 편집ㅣ곽우신 기자

#박준영 변호사 #공부해서 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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