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두고 즐거운 마음이 된 할머니

[시골에서 책읽기] 사노 요코, <사는 게 뭐라고>

등록 2015.08.09 10:37수정 2015.08.09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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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날이 이어지니, 아이들은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물놀이를 합니다. 물놀이를 마치고는 알몸으로 마당으로 뛰쳐나와서 물기를 말린다고 하면서 달리고 놀다가, 다시 땀이 난다면서 욕조로 들어가서 물놀이를 합니다. 후박나무 밑에 천막을 쳐 놓았기에, 아이들은 천막으로도 들어가서 놀다가, 햇볕이 나무그늘을 벗어나서 천막을 비출 무렵에는 마루로 놀이터를 옮깁니다. 집안에서 가장 시원한 곳을 찾아서 이리저리 옮기면서 신나게 놉니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작은아이는 꾸벅꾸벅 졸다가 눕다가 일어나다가 먹다가를 되풀이합니다. 이제 이를 닦고 자야겠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아버지가 도와줘." 하고 가늘게 말하는 작은아이 이를 닦아 줍니다. 이제 쉬를 하고 자리에 눕자고 하니, 스스로 마당으로 내려서서 쉬를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잠들 생각을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합니다. 두 아이 모두 졸린 몸을 견디며 그림놀이를 합니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놀다가, 또 한 번 힘을 뽑아내어 놀더니, 그야말로 남은 힘이 하나도 없어서 곯아떨어질 때가 놀이를 찾습니다.


옛이야기를 들먹여 봤자 아무 소용 없겠지만, 예전에는 빈 병을 가지고 가게에 가면 참기름이든 식초이든 무게를 달아 팔았다. 가게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참기름을 작은 구리 국자로 떠서 손을 높이 들고 병에다 가늘게 가늘게, 마치 끈처럼 떨어트리는 모습을 마술 구경하듯 감탄하며 보곤 했다. (29쪽)

만약 알루미늄포일로 끝냈더라면 그해 섣달그믐의 눈 내린 산길도 못 봤을 테고. (49쪽)

겉그림 ⓒ 마음산책

날마다 두 아이를 실컷 놀리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하루를 누리면서 사노 요코 님이 선보인 산문책 <사는 게 뭐라고>(마음산책, 2015)를 읽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썼다는 글을 읽는데, '죽음을 앞두고 썼다'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습니다. '사는 동안' 삶을 차분히 돌아보면서 쓴 글이라는 생각만 듭니다.

2010년에 한국말로 나온 <나의 엄마 시즈코상>(이레)이라는 산문책을 떠올립니다. 예전에 사노 요코 님 다른 산문책을 읽을 적에는 '사노 요코라는 그림책 할머니가 2010년에 죽은' 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2010년에 나온 산문책은 '치매에 걸려서 옛일을 까맣게 잊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기고는, 요양원에 늙은 어머니를 만나러 다니면서 어머니 옛모습을 되새기는 이야기'가 흐르거든요. 그무렵에 쓴 글에서는 '삶이 징글징글하다'는 느낌이 짙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는 게 뭐라고>라는 책을 보면, 사노 요코 님이 '암 진단을 받고, 몇 해쯤 더 살 수 있는가' 같은 말을 들으면서 속이 아주 후련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암이라는 병과 '죽음을 앞둔 날'을 알기 앞서까지는 '참말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고 해요.

또다시 옛날 엄마들은 대단하다고 입을 모았다.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궁리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52쪽)

"무슨 일이야?" "있잖아, 나 착한 할머니가 되어야 할지 못된 할머니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나 점점 못된 할머니가 되는 것 같아." "그럼 전엔 착한 할머니였단 거야?" "…… 더더욱 못된 할머니가 되어 간다고. 속도위반으로 달리는 폭주족처럼 말이야." "뭘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야. 난 말이야, 어릴 적부터 노코처럼 제멋대로인 애는 없단 소릴 부모님한테도 선생님한테도 들었다고. 이젠 아무렇지도 않아." (90쪽)

할머니는 굳이 '착한 할머니'여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쁜 할머니'여야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할머니입니다. 한류 연속극을 좋아하든 말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재규어를 짐차처럼 몰든 말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아들하고 오랫동안 말 한 마디 섞지 못하다가, 늘그막에 서로 소리를 높여 싸우면서 함께 살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생각하면, 얼린 밥을 녹여서 먹여도 밥잔치입니다. 스스로 즐겁게 생각하지 못하면, 으리으리한 식당에서 멋진 요리사가 차려 주는 밥을 먹어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마음결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서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씨를 어떻게 건사하느냐에 따라서 사랑이 바뀝니다. 마음밭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서 생각이 거듭납니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은 마음속에 늘 놀이가 있어요. 그래서 새로운 놀이를 언제나 찾아냅니다. 기쁘게 일하는 어른이라면 마음속에 늘 기쁨이 있어요. 그래서 어떤 일을 하든 늘 기쁩니다.

착한 할머니라 하더라도 '사는 보람'이 없다면 하루가 재미없습니다. 짓궂은 할머니라 하더라도 '사는 보람'이 있으면 하루가 재미있습니다. 남한테만 잘 보이도록 착할 수 없고, 남한테만 드러나도록 짓궂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 나라(한국)는 미국을 그처럼 좋아하는 것일까. 고바야시 총리도 미국에는 꼬리를 치지만 왠지 일본이 미국을 좋아하는 것과는 느낌이 약간 다르다 … (한국 연속극은) 스토리도 대부분 억지로 짜맞춰서 개연성이 없다. 보고 있으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데도 행복하다. 엄청나게 행복하다. 잘난 사람들은 모두 이 현상을 분석하려 들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좋아하는 데 이유 따위 없다. (121, 126쪽)

선전에 휘둘린 것도 아니고 잘난 평론가들의 꼬임에 넘어간 것도 아니다. 아줌마들은 스스로 한국 드라마를 발견했고, 땅속 마그마처럼 쓰나미처럼 우르르 몰려들어 한류를 띄웠다 … 외교관도 훌륭한 학자도 예술가도 못한 일을 아줌마들이 해냈다 … 아줌마들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둑에 구멍을 뚫었고, 상대의 땅에 우르르 몰려갔다. (134, 140쪽)

속그림 ⓒ 마음산책


삶은 바로 오늘 여기에서 빛납니다. 웃는 사람이 빛나는 삶입니다. 삶은 언제나 내가 스스로 빛냅니다. 네가 빛내 주지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빛나려고 할 적에 환하게 빛살이 터집니다. 놀이동무가 있어야 재미나게 노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놀이동무가 있든 없든 스스로 재미나게 놀려고 해야 하루가 재미납니다. 놀이동무도 있고 놀잇감도 많다 하더라도, 스스로 축 처지는 마음이라면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나한테 정규직 일자리가 있더라도 스스로 재미난 마음이 못 된다면, 내가 하는 일은 재미없습니다. 나한테 연봉 높은 일자리가 있더라도 스스로 기쁜 마음이 못 된다면, 내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삶이 기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책을 갖추었기에 더 똑똑하지 않습니다. 더 넓은 집을 누리기에 더 넉넉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이웃을 사귀기에 더 즐겁지 않습니다. 더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 보았기에 생각이 깊지 않습니다.

양반제라는 구제 불능 제도를 접한 나는 조선인도 아니면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144쪽)

흑심을 품은 게 아니다. 닷키나 나가세 도모야 같은 아이돌을 구경하듯 즐거웠을 뿐이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은 건강에 좋다. (200쪽)

참모는 재미있겠지. 세계지도를 펼치고 작전을 세우는 건 가상 세계의 놀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피를 보지도 않는 최고의 게임이다. 가상 작전은 전쟁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은 신분이 가장 낮은, 실제 몸뚱이를 가진 살아 있는 병사들이다. (209쪽)

산문책 <사는 게 뭐라고>를 읽는 내내 사노 요코 님이 빚은 그림책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라는 그림책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었나 하는 실마리를 가만히 풀어 봅니다. 따사로운 사랑을 받을 적에 비로소 이 땅에 태어나는 이야기가 흐르는 <세상에 태어난 아이>입니다.

<백만 번 산 고양이>라는 그림책에 담으려던 숨결이나 넋은 참으로 무엇이었을까 하는 수수께끼를 조용히 풀어 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안 죽고 산다 하더라도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재미도 보람도 기쁨도 웃음도 이야기도 없다는 대목을 넌지시 들려주는 <백만 번 산 고양이>입니다.

사노 요코라는 분한테 삶은 어릴 적부터 '큰 짐덩어리'였으나 '너른 사랑'이기를 바랐습니다. 사노 요코라는 분보다 이녁 오빠가 그림을 훨씬 잘 그렸다고 하는데, 오빠는 아주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고 해요. 삶을 '기쁨'으로 누리지 못한 나날을 할머니가 될 때까지 보내야 하던 이녁한테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 한 발씩 나아간다는 나날은 외려 '기쁨'을 찾은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웃지' 못하고, 마음껏 웃을 수 없었으며, 신나게 웃는 하루를 누릴 생각조차 없이 몰아치던 나날뿐이던 그림책 할머니는 바야흐로 이제부터, 그러니까 죽음을 몇 해 앞둔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웃는 삶'을 온 기쁨으로 누리겠노라 하는 다짐을 단단히 할 수 있구나 싶습니다.

본문 가운데 ⓒ 마음산책


나는 누워서 프로(프로 기사)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왠지 마술처럼 느껴졌다. 필요한 패를 차례차례 끌어모은다. 하지만 프로들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음침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마작은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해야 제맛 아닌가? (217쪽)

아주머니는 아흔이 넘어서도 귀엽고 섹시했다. 아주머니는 산과 들의 꽃 이름을 무척 많이 알려주었다. 나는 꽃 이름을 하나씩 외우는 것이 무척 즐거웠다. (232쪽)

솜씨가 좋은 '프로'나 '전문가'라 하더라도 웃으면서 일하지 못한다면 따분합니다. 솜씨가 어수룩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웃으면서 일한다면 아름답습니다. 얼굴이 예쁘장하거나 몸매가 빼어나야 멋진 사람이 아닙니다. 맑게 짓는 웃음에 환한 이야기꽃이 어리다면 누구나 아름답습니다.

삶이란 무엇일까요? 삶이란 노래입니다. 이름값이나 권력이나 훈장이나 돈 따위가 아닙니다. 삶이란 무엇인가요? 삶이란 춤입니다. 역사에 남아야 하지 않고, 예술을 해야 하지 않습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잔뜩 거머쥐어야 하지 않습니다. 삶이란 참말로 무엇이 되려나요? 삶이란 이야기입니다. 소근소근 나누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삶이고, 하하호호 웃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삶이며, 어깨동무하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삶입니다.

사노 요코 님 산문책 <사는 게 뭐라고>는 '이야기책'입니다. 이제 끝자락 삶을 붙잡으면서 마음껏 꿈을 펼치고 싶은 할머니가 노래하고 춤추면서 우리한테 나누어 주는 이야기꽃입니다. 삶이 뭘까요? 살면서 언제 기쁠까요? 깊은 한여름 밤에 풀벌레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셔요. 무더운 한여름 밤에 싱그러운 바람 한 줄기를 불러 보셔요. 깜깜한 한여름 밤에 별자리를 그리면서 두 팔을 벌려 보셔요.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글
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펴냄, 2015.7.15.
12000원

사는 게 뭐라고 - 시크한 독거 작가의 일상 철학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2015


#사는 게 뭐라고 #사노 요코 #산문책 #삶읽기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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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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