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비밀번호, 4자리로 정해지는 이유

[재미있는 과학이야기 76] 한자릿수 늘수록 암기력은 떨어져

등록 2015.08.17 11:10수정 2015.08.1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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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우편번호가 미국처럼 이제 다섯 자리로 바뀌었네요. 외우기가 훨씬 쉬울 거 같아요. 전에 미국에서 (한국) 우리 집으로 소포 보낼 때 우편번호 기억을 못해서 매번 찾아봐야 했거든요. "

15년전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다가 지난해 귀국한 청년 김씨는 지난 1일부터 시행된 새 우편번호 제도에 반색했다.

우편번호 자릿수가 6개에서 5개로 단 1개 줄었을 뿐인데, 김씨 말처럼 정말 기억하기가 한결 쉬워졌을까? 두뇌와 신경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김씨의 말은 '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 두뇌가 평소 작동하는 방식을 감안하면, 6자리 숫자와 5자리 숫자는 속된 말로 단순한 한 '끗' 차이가 아니다.

평소 5~9자리 숫자를 기억하고 활용

두뇌 연구 전문가들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평소 대략 5~9자리의 숫자를 기억하고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 번호는 보통 10자리로 구성돼 있어 한 번 듣고는 여간 해서는 제대로 암기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휴대전화 번호의 앞 세자리, 즉 010 등을 제외한 나머지 7자리만이라면 그런대로 꽤 긴 시간 암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숫자 등에 대한 기억은 이른바 '단기 작동 기억'(working memory)의 형태로 두뇌에 보관되고 활용된다. 단기 작동 기억의 알기 쉬운 한 예는 길을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변에 대한 기억이다. 예컨대, 길에서 행인으로부터 "저기 사거리 보이죠. 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지자 마자 오른편에 있는 두 번째 건물"이라는 답을 들었다면, 이 같은 말에 대한 기억이 단기 작동 기억이다.

숫자 암기 또한 단기 작동의 기억의 가장 흔한 형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흥미롭게도 숫자를 낱낱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한 예로 주민등록번호 앞자리 즉 801227이라는 6자리 숫자가 있다고 가정할 때, 8,0,1,2,2,7 등 6개의 숫자 하나 하나를 낱개로 기억하지 않고, 80,12,27 등 2개씩으로 묶어 기억하는 등이 일반적인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801, 227 등 3개씩을 한 덩어리로 해 암기할 수도 있다.


헌데 끊어서 읽는 덩어리의 자릿수가 크면 클수록 기억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12자리 숫자가 있다면, 이를 6자리씩 크게 두 덩어리로 나눠 외우기는 매우 힘들다. 은행 계좌번호처럼 보통 자릿수가 많은 것들을 외우기 어려운 이유이다. 우편번호가 6자리에서 5자리로 한자리 줄은 것만으로도 외우기가 훨씬 쉬워지는 건 이처럼 숫자를 다루는 인간 특유의 단기 작동 기억 방식 때문이다.

단기 작동 기억은 지능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다. 즉 단기 작동 기억이 좋을수록 지능지수가 높을 확률이 그만큼 크다. 단기 작동 기억은 컴퓨터의 램(RAM)과 흔히 비유된다. 컴퓨터의 메모리는 크게 램과 하드 디스크 메모리로 나눌 수 있다. 하드 디스크에는 프로그램과 파일, OS 등 영구적 정보가 보관된다. 반면 램은 그때 그때 연산을 할 때마다 작동하게 돼 있다. 컴퓨터의 작동 속도는 인간의 지능에 비유될 수도 있는데, 실제로 램의 성능이 좋을수록 컴퓨터는 빠르게 돌아간다.

아파트 현관문의 전자 키나 각종 번호작동 열쇠 등을 유심히 보면 보통 4자리 정도의 숫자로 설계돼 있다. 물론 자릿수가 커질수록 보안성은 향상되지만, 한자릿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비밀번호'에 대한 암기력은 급격하게 떨어지는 단점과 불편함이 있다. 이는 일상에서 흔히 이용하는 대다수 열쇠의 비밀번호가 4자리 정도로 정해지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열쇠의 비밀번호나 우편번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자릿수가 하나 적어지면 전체 숫자의 풀(pool)은 1/10로 줄어든다. 예를 들면, 6자리 숫자는 100만 개의 조합이 가능하다. 반면 5자리 숫자의 조합은 10만 개에 불과하다. 가능한 숫자의 조합이 외워야 할 대상이라면 그 대상이 자릿수 하나가 줄어들 때 마다 1/10로 떨어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의 숫자 기억 혹은 암기 능력은 자릿수 하나가 줄 때마다 단순하게 10배로 늘어난다고는 할 수 없다. 단기 작동 기억과 연계해 숫자를 영구 기억으로 저장하는 방식이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자릿수가 긴 숫자의 경우 끊어서 기억하거나 연상력을 동원하는 등 특수하기 때문이다. 숫자 하나에 대응하는 방식에서도 인간의 두뇌가 얼마나 복잡미묘하게 움직이는 지를 유추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위클리 공감(korea.kr/gonggam)에도 실렸습니다. 위클리 공감은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행하는 정책주간지 입니다.
#우편번호 #숫자 #단기 작동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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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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