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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진보', 그 대결의 허무한 결말

[안 뻔(Fun)한 티켓북] 두 정의의 충돌과 어설픈 마무리, 뮤지컬 <데스노트>

15.08.19 15:39최종업데이트15.11.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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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평범해보이는 고등학교 교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에게 선생님이 설명한다.

"법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는 순간 억압됩니다. 만약 법이 억압되면, 자유는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법과 정의가 없어지면 인간은 최악의 동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이에 반문한다.

"법과 정의는 완전히 별개의 것 아닌가요?"

그는 자신이 세상의 정의를 믿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바보 같은 권력의 도구. 정의란 것은 과연 누가 정한 걸까? 저 눈 먼 권력 가진 놈이 정해 놓은 기준. 미친 듯이 따분한 이 세상 속에서, 정의란 것은 보이지 않아."

그럼 그가 진실로 믿는 정의는 무엇인가.

"그 무언가 나의 마음을 채운다면, 그것이 정의라고 할 수가 있어. 그게 답이야. 나의 정의는 어디에. 난 찾아낼 거야."

극을 여는 넘버 '정의는 어디에'를 통해, 이 학생은 그만의 정의를 찾겠다고 선언한다. 학생의 이름은 야가미 라이토. 그리고 그의 앞에 한 권의 검은색 노트가 떨어진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이처럼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존재하는가',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묵직한 질문으로 그 막을 올린다.

보수적 정의와 진보적 정의의 충돌

뮤지컬 <데스노트>에서 라이토로 분한 홍광호(왼쪽)와 사신 류크 역을 맡은 강홍석(오른쪽) ⓒ 씨제스컬쳐


지난 6월 20일 경기도 성남아트센터에서 막을 열었던 뮤지컬 <데스노트>가 지난 15일, 연장 공연까지 무사히 마치고 국내 초연을 종료했다. 동명의 만화 <데스노트>가 원작인 이 작품은, 만화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국내 관객에게 이미 익숙한 작품이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원작을 압축하고 생략하는 과정에서, '정의'라는 키워드에 초점을 맞춘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두 명이다. 데스노트를 이용해 새로운 정의를 세우려는 야가미 라이토. 그리고 정의를 참칭하는 그를 붙잡아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L(엘). 이 두 캐릭터는 각자가 다른 정의를 내세우며 자신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이 두 세계관의 갈등과 충돌을 음악과 어우러지는 드라마로 풀어낸 것이 뮤지컬 <데스노트>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라이토는 빛을 뜻하는 영어 '라이트(Light)'와 발음이 비슷하다. 작 중에도 빛과 함께 캐릭터가 묘사되는 부분이 여럿 눈에 띈다. 스스로를 신이라 칭하고 자신만의 정의를 펼치려는 라이토는 빛의 환상에 빠진다. "이상하다, 온세상이 더 아름답게 빛나고 거리에는 환한 미소 넘치네"라고 노래하며, 그가 본 '아름답고 이상적인' 세계는 그를 점차 광기로 몰아넣는다.

라이토가 추구하는 정의는 언뜻 진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기존 사법체계를 믿지 않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려는 측면에서 그의 반동적 행동은 기득권을 부정하는 좌파적인 무언가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라이트(Light)'는 '라이트(Right)'와도 발음이 비슷하다. 영어 라이트(Right)는 '옳다, 맞다'라는 정의의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오른쪽, 보수'를 뜻한다. 다소 과한 해석일지 모르지만, 그가 천명하는 정의는 보수적·우파적 정의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라이토의 정의는 사법체계의 구멍을 피한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징벌적 정의'이다. 그는 "그렇지만 결국 썩은 인간들은 언젠가는 제거해야 해"한다면서 "썩은 인간들은 없애는 거야"라고 노래한다. 그는 인간의 교화를 믿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타락한, 인간성을 잃은 이들이 '존재'하며 그 '절대악'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이건 꿈이 아냐, 이젠 믿어야 해. 썩은 인간들은 없애는 거야. 지옥 같은 세상 뒤엎을 수 있어, 심판의 시간. 사로잡힌 영혼, 비명을 질러도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각오했어. 나의 희생. 난 정의로운 세상을 내 손으로 만들 거야, 끝까지.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이젠 나의 손에 맡겨진 이 정의의 심판. 세상을 내 뜻대로 세워 볼까. 썩은 세상 두고 보지는 않겠어. 오직 나만 할 수 있어. 새로운 세상의 신이 되리라."

그는 그 스스로가 일종의 철인이 되려 한다. 그 자신이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가 교도소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그가 혹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면 어떡하는가? 그는 일말의 재고 여지도 없는 철저한 악인가? 이 모든 질문에 답을 내리는 건 '키라'라는 '만들어진 신'의 이름을 뒤집어 쓴 라이토 자신이다. 이 뒤틀린 엘리트주의는 '나 아니면 아무도 못한다'는 미묘한 사명감을 불어 넣고, 자신의 행위를 '희생'으로 정당화 한다.

라이토의 정의는 인간이 스스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자율성을 빼앗는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역사를 진보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다스림'을 받아야만 하는 객체로 전락한다. 권력을 빼앗기고, 스스로 판단할 능력도 부재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중은 이런 '키라'의 지배에 열광한다. 흡사 강력한 권력을 등에 업은 전체주의 독재자, 그리고 그에 열광하는 대중일반이 겹친다.

반면, 이에 맞서는 엘은 다르다. 그는 류크가 지적했던 것처럼, 키라로 분한 라이토의 정의에 심대한 구멍이 있음을 파악한다.

"거창한 이상을 내세운, 건방진 멍청이. 생명을 가지고 놀면서, 착각에 빠졌어. 세상에 겁날 게 없겠지. 신이 된 것처럼. 너에게 지옥을 보여줄게. 이 세상의 규칙을 뼈저리게 알려주지. 끝을 알 수 없는 게임. 이제 시작하는 거야. 인정사정없는 게임. 주사위는 던져진 거야."

라이토와 엘 모두 '선'은 아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고, 원하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악'을 규정하는 기준이 '자신을 거스르느냐 아니냐'로 정하는 순간, 라이토의 도덕률은 붕괴한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 구체적이지 않은 허상에 방해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한다. 그는 더 이상 정의가 아니라 광기에 지나지 않는다. 엘 역시 거짓말에 능하며, 함정을 파는 데 거리낌이 없다. 진실을 알기 위해 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감금하고 고문하는 등 '착한' 면모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엘은 인간이 더 진보할 수 있음을 믿는다. 그는 라이토의 행위가 정의가 아니라 그저 살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설사 구멍이 있더라도 인간은 스스로 건설한 체제 내에서 자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인간을 단죄하는 건 신이나 막강한 권력의 독재자가 아니다. 우리의 손으로 선출하고, 견제하고, 참여하는 우리이고, 그 우리가 투영된 구조다. '이상'을 내세운 라이토가 오히려 극단적인 현실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진 캐릭터라면, 그 이상을 부정하는 엘은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상주의자이다.

허무한 끝, 재연도 흥행할 수 있을까

뮤지컬 <데스노트>에서 엘 역을 맡은 김준수 ⓒ 씨제스컬쳐


1막만 놓고 보면 <데스노트>는 근래 어떤 뮤지컬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흡입력을 뽐낸다. 세계관은 물론이고, 긴박한 전개와 치열하게 갈등하는 인물이 관객의 혼을 뺀다. '정의는 어디에'부터 '데스노트', '게임의 시작' 등 화려한 넘버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다. 작곡가가 무려 <지킬 앤 하이드>의 프랭크 와일드혼이니 말 다했다.

그러나 1막의 희열과 환희는 2막에서 지루함과 허무함으로 뒤바뀐다. '죽음의 게임' 장면이나 '놈의 마음속으로'을 열창하는 테니스 씬 정도만 박수를 이끌어낼 뿐이다. 원작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사유나 소이치로, 마츠다 토타의 이야기 생략은 너무 과하다. 반면 미사와 렘의 이야기는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을 할애하고도 미사의 기억을 지우고 렘이 데스노트에 '엘'의 이름을 쓰는 부분의 인과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나 다름없는 엔딩은 원작의 '덧없음'을 살리기는커녕 극 자체를 허무하게 만들었다.

뮤지컬 <데스노트>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원작 <데스노트> 숙지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원작만화 <데스노트>를 본 후 뮤지컬 <데스노트>를 관람한다면, 어쩔 수 없이 두 작품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뮤지컬 <데스노트>는 원작에 비하면 이래저래 허술한 레플리카(복제품)에 불과하다. 그 어설픔을 혼신을 다한 배우들의 노력으로 눈가림하고 있을 뿐이다.

뮤지컬 <데스노트>는 가히 정상급 배우들을 엄선해서 캐스팅했다. 배우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절정에 달한다. 일본 오리지널 영상 몇 개만 찾아봐도, 일본 무대와 비교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국내 배우들이 얼마나 훌륭한 실력으로 극을 소화했는지 알 수 있다. 작품의 격조를 업그레이드할 정도로 배우들은 기대 그 이상을 해냈다.

그러나 어쩌랴. 아무리 빛나는 스타들을 모셔왔지만, 그 별들이 제대로 된 별자리를 그리지 못한다. 서사 자체가 허술하니 배우의 열연으로 이를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

뮤지컬 <데스노트>의 초연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국내 초연이라는 호기심과 더불어 어떤 작품에서도 만나보기 어려웠던 캐스팅 덕분이었다. 바꿔 말하면, 이정도 라인업의 캐스팅이 아니고서는 뮤지컬 <데스노트>의 재연을 보러 갈 관객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질문이 나온다. 배우의 티켓 파워에 기대고, 애정 깊은 팬들의 '회전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원작의 명성, 화려한 무대, 빛나는 배우, 눈길을 끄는 의상, 귀를 사로잡는 음악. 이 모든 것이 '좋은 뮤지컬'이 갖춰야할 요소이지만, 이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뮤지컬도 '극'의 일종이다.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인물과 이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알맹이 없이 겉치장에 집중한 작품에, 언제까지 관객은 지갑을 열어야 하는가. 관객의 지갑은 화수분이 아니다.

부디 뮤지컬 <데스노트>의 재연은 다르기를 바란다. 아니라면, 유튜브에 업로드 된 홍광호와 김준수의 넘버로 귀를 정화하는 데 족하다. 새로운 변화를 주지 못한다면, 굳이 14만 원을 주고 이 '배우낭비극'을 다시 보러 가기는 힘들 것이다.

▲ 뮤지컬 <데스노트> 포스터 지난 6월 20일부터 시작된 뮤지컬 <데스노트>의 초연이 지난 15일 마무리됐다. 당초 9일에 막을 내릴 예정이었지만, 관객들의 호응에 힘입어 15일까지 연장 공연을 시행했다. 훌륭한 흥행 성과를 거뒀지만, 이대로 다음 재연도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 씨제스컬쳐



뮤지컬 데스노트 정의 홍광호 김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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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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