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웃기는 여자들" 수녀들과 함께한 저녁

[여행 책에 없는 유럽 종단기13] 생폴드방스 수녀원 더 깊게 들여다보기

등록 2015.08.30 13:56수정 2015.08.30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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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폴드방스의 도미니코 수녀원 주변들 거닐다 ⓒ 송주민


* 전편에 이어 계속

오후에는 머물던 수녀원을 나와 주변을 거닐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생폴드방스의 번화한 성채 마을과 전혀 다른 분위기다. 분주한 무대의 조용한 뒤편 같이 느껴지는 차원이 다른 풍경이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이 적막함이 싫지 않다. 숲으로 향하는 길이 여기저기로 보인다.

아마 지금은 봄일 거야. 불꽃처럼 하늘로 솟은 푸른 사이프러스 나무를 바라보며, 한적한 숲길을 느긋하게 배회한다. 막 새해가 떠오른 한겨울이나, 여기는 벌써, 아니 아직도, 내내 계속 봄인 듯하다. 햇살은 적당하게 따사롭고, 구름이 흩어진 하늘은 파랗다. 돌담을 뒤덮은 진녹색의 넝쿨이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사이프러스는 계속해서 미풍에 흩날린다.

함께 온 그녀는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나는 그 속도에 맞추지 않고 더 천천히, 홀로, 아예 길 위에 서버린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이제 그녀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없는 낯선 세상 속에 놓여 있다. 어깨에 힘을 완전히 빼고, 코로 숨을 크게 천천히 들이쉰다. 풀 냄새가 섞인 맑은 공기가 느껴진다. 바람 불어와 사이프러스를 스치며 내는 소리가 귓가에 가득하다.

수녀님들과의 저녁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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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폴드방스에 있는 도미니코 수녀회의 입구 풍경 ⓒ 송주민


그리고 저녁, 수녀님들의 식탁에 초대를 받았다. 그동안 수녀원 한편에 마련된 방문자들의 집에서 프랑스인들과 식사를 함께 해온 터였다. 수녀님들과 방문자들은 분리된 공간에서 생활하고 머물렀다. 한국 출신의 수녀님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수녀원, 머나먼 고국 땅에서 온 손님들을 그냥 보내기 아쉬웠던 것일까. 우리는 일반인은 들어가 보기 힘든 곳, 그러나 그녀들은 항상 일상을 사는 곳, 그것도 음식을 함께 나눠 먹는 자리에 초대된 것이다.

이곳은 제한된 외출 정도만 허용하는 이른바 '관상 수도회'('관상'이란 넓은 의미로는 실천적 태도와는 상대적으로 인식·명상·묵상 등의 정관적 태도를, 좁게는 신앙에 의한 진리를 논리적인 논증에 의하지 않고 경험적·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함- <두산백과> 요약)라고 한다. 사회 참여나 포교, 교육 등에 헌신하는 활동 수도회와 구별되는 개념이다.

오래된 돌로 지어진 수녀원 건물을 바라보다가, 비밀의 문을 통과하는 기분으로 현관문을 들어선다. 조금씩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금기(?)를 깨고 들어가는 듯한 호기심과 낯섦이 주는 어색함이 상존한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식탁에는 정갈한 하얀 수도복과 검정 베일을 내려쓴 수녀님들이 둘러앉아 있다.

우리와 비슷한 피부색의 익숙한 인상들인데, 어딘가 나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세상에서 온듯한 풍모, 차원이 다른 시공간 속으로 나 홀로 들어온 듯한 어색하고도 묘한 분위기가 주위를 온통 감싼다. 둘레에는 하얀 벽면, 중앙에는 '자비의 예수'를 뜻한다는 그림이 걸려 있다.

시각에 확 빼앗겼던 오감이 차차 제자리를 찾고, 음식 냄새가 진하게 전해진다. 향이 강한데, 이것은 카레다. 게다가 빨간 고춧가루가 묻은 김치, 또 하얀 쌀밥까지. 한국에서 온 우리 입맛을 고려해 특별히 준비해주신 것이라고. 그 옆으로 프랑스식의 바게트와 샐러드도 놓여 있다.

"우리 웃기는 여자들이야. 하하하."

음식을 앞에 두고도 여전히 긴장하는 낯빛이 역력한 나를 보며, 원장인 로사 수녀님이 던진 말이다. 그 말에 수녀님들 모두 한바탕 크게 웃는다. 나도 부끄러운 웃음이 나고, 여전히 눈을 둘 곳을 찾아 헤매지만, 조금은 긴장이 풀린다. 밥도, 카레도 한국에서 먹던 맛과 비슷하다. 수녀님들의 식탁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다. 흥겹게 서로 음식을 즐기듯 나눠 먹고 있다. 와인도 한 잔씩 하신다. 물론 우리가 와서 더 신경 써서 마련한 식탁일 게다.

이 음식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지금도, 그 전에 방문자들의 집에서 매 끼니 수녀님들이 차려준 맛있는 프랑스식 식사를 먹을 때도, 궁금했다. 수녀원 어딘가에, 일반인은 들어가지 못하는 비밀의 정원이나 텃밭이라도 있어서, 직접 기른 먹거리를 내 주는 건 아닐까?

"저기 아래에 마트에서 남은 식료품들을 가져다주지. 그걸로 해먹는 거예요."

유통기한은 조금 지났으나 먹기에 지장이 없는, 우리로 따지면 푸드뱅크 같은 곳에서 제공하는 먹거리를 조리해 음식을 해먹고 내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프랑스에서 가장 서민적인 마트라고 하는 곳에서 기증해주고 있단다. 말을 듣는 순간, 그 찰나 실망감이 확 밀려온다. 나는 수녀님들이 키운 무공해 식재료를 상상하고 있었다.

우리가 못 들어가는 수녀원 뒤뜰에는, 세속의 때가 없는 일용할 양식이 싹트고 있는 줄 기대했던가. 그런데 마트라니. 그것도 신선도도 떨어져 버린 잉여로운 식재료들. 환상이 여지 없이 무너진다. 어쭙잖게 보고들은 바, 수도원은 '기도하고 노동하며' 손으로 직접 일궈 가는 자급자족 공동체라는 인상이 내게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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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들이 따라준 후식용 스파클링 와인 끌레레뜨 드 디(Clairette de Die). 맛있어서 찍어놓았다. ⓒ 송주민


수녀님이 알 길 없는 와인을 한잔 건넨다. 끌레레뜨 드 디(Clairette de Die)라고 적혀 있는데, 탄산이 수북한 스파클링 와인이다. 디저트로 어울리는 달콤하고 청량감 있는 술이란다. 마셔 보니 정말 달콤하고 맛있다. 와인 맛을 모르는 사람도 후식 음료로 잘 즐길 만한 맛이다.

"이 와인, 누가 준 줄 알아? 수녀원에 자주 오는 나이 든 여성 분, 남편 문제로 엄청 힘들게 사는 분인데. 술도 그렇고 폭력도... 그 분이 힘들 때마다 피해서 여기 머물다가 가곤 하는데, 이번에도 도망 나오다가 아차, 성탄 선물! 지하 창고로 가서 이것을 굳이 가져왔다지 뭐야. 우리들 챙겨준다고. 그 모습이 얼마나 고마우면서도 웃기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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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생폴드방스 수녀원 주변을 거닐다. ⓒ 송주민


여기도, 이 찬란한 햇살로 덧칠된 땅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이고, 인생은 고(苦)로 둘러싸여 있다. 프랑스에서도 한국에서 보고들은 가정 문제가 그대로 들린다. 폭력 속에서도 계속, 어쩔 수 없이 한평생 살아가는 여성에 서린 한. 그렇게 사연 담긴, 손에서 손으로 전한 음식을 지금 먹고 있다. 이 카레, 저 샐러드, 남겨진 마트 식품들, 세상에서 선택받지 못한 잉여로운 식료품을 양식 삼아, 지상에서의 질긴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모습에 아까의 실망감은 옅어지고 오히려 더 정감이 가는 감정에 휩싸인다. 그녀들은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수녀원에서 연금이 쓰이는 방식

오갈 데 없는 고아들과 함께 언덕 위에서 시작한 수녀원이란다. 그리고 지금, 여기도 그렇고 프랑스, 아니 유럽 전역의 수도원들은 지원자 절대 감소로 명백을 유지하기가 힘든 현실이라고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수녀원을 운영해갈지 불현듯 궁금하다. 그런데 "하느님이 알아서 채워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응답만이 돌아온다. 누군가 그랬다. 수도원이 부자라서 망하는 경우는 봤어도 가난해서 망한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그래도 알아서 다 '주님'께서 해주신다니. 실상보다는 종교적인 레토릭이 짙게 묻은 표현이 아닐까? 여기도 좋든 싫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속세의 의식주 모두를 필요로 하는 곳이지 않나. 어딘가 갸우뚱하는 표정을 짓자, 한 가지 힌트는 주신다. 듣다 보니 흥미로운 말이다.

"프랑스에서는 노인이 되면 연금이 제법 나오잖아. 나이 든 수녀님들의 연금을 받아다가, 젊은 수녀들 연금 보험료를 내주며 쓰곤 하지. 전에는 나이 든 수녀님들이 많아서 연금이 꽤 됐는데, 지금은 반대가 되었네. 그렇게 순환이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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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폴드방스 도미니코 수녀회 수녀님들의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받다 ⓒ 송주민


사유 재산이라고는 없는, 재산을 온전히 포기하고 들어오는 곳이다. 함께 온 그녀도 14년 전 여기 들어올 때 모든 걸 정리하고 왔다고 했지, 그래서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 한국에 갈 비행기 삯조차 없었다고. 수도원 기행을 쓴 공지영 작가가 "수도자들은 사유 재산이 없지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뒤까지도 수도원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 줍니다. '능력껏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 사회가 바로 수도원 안에 실현돼 있더라고요. 꼭 혁명이 필요한 건 아니었던 거죠"라고 <한겨레>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본 기억이 난다.

개인의 복지 수당을 공동체 내에서 쪼개 쓰고 있는 모습, 그것도 노인들이 받는 수당을 젊은 사람에게로 이전하는 모습이 뭐랄까, 세속에서 나타나는 양태와는 전혀 다르게(젊은 세대의 세금으로 노인들의 기초 연금을 충당하는) 이뤄지는 세대 간 연대가 독특하게 느껴진다. 물론 젊은 수녀님들도 노인 수녀님들께 기여하겠지. 당장 여기 식탁 자리에서도, 거동은 물론 식사마저 불편한 노구의 수녀님에게 옆에 있는 수녀님들이 한 수저 한 수저 먹여주고 있지 않나.

*다음 편에 계속

○ 편집ㅣ조혜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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