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주교 비웃는 원숭이, 압권은 '빨간 엉덩이'

[행복사회 유럽 22]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시 학생이 되고 싶다

등록 2015.08.31 16:16수정 2015.08.3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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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한 지 거의 30년만에 대학교 교정을 거닐었다. 스스로 '민족적 음주가무 및 민주적 고성방가 특성화대학'으로 규정한 모교를 잠시 들렀다.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가며 쳐다보던 것과는 기분부터 달랐다. 상전벽해처럼 변한 캠퍼스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동안 타임머신을 탄 이방인의 심정이 되었다. 모든 시공간이 낯설어 현재로부터, 현실로부터 강제로 격리된 착각이 들었다.

그때 그 시절, 대학은 내게 학문의 전당이나 배움의 터전이 아니었다. 학생의 신분임에도 학업은 게을리하고 주로 음주가무와 고성방가로 보석같은 청춘을 소일하고 탕진했다. 감옥이거나 병영같은 고등학교에서 벗어나자 더 큰 감옥과 병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대학이었다. 나는 그 비루하고 막막한 시공간 안에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충분히 실망하고 좌절했다. 술로 소일한 변명이다.


돌이켜보면 1980년대는 맷집과 담력이 약한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맨 정신이나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다못해 유치한 공명심이나 무모한 야심이라도 좀 있었더라면. 나는 좌도 우도 아닌 채 중심과 노선을 못 잡고 술집이 늘어선 저잣거리를 시정잡배처럼 배회했다. 왼쪽에 대해서도, 오른 쪽에 대해서도 선뜻 다가가거나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렇다고 중간이나 중도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이쪽도 저쪽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신념과 정체성은 더욱 굳어갔다. 하다 못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무자비하고 야비한 말'들에 대해서는 짜증을 내거나 화를 냈다. 대신 좌든 우든 편견을 두지 않고 모든 치졸함과 천박함과 추악함에 대해서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모든 부정과 불의와 위선에 대해서 분노의 화살을 쏘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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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벨베르크 고성 아래 ‘하이델베르크 대학광장’ - ⓒ 정기석


'나의 대학시절'은 여전히 아프고 슬픈 현실이다

그렇게 대학시절 오직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찬 한낱 회색빛 아웃사이더로서 자아를 탄탄히 구축했다. 다행히도 교실 밖에서 만나 읽은 몇 권의 책,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늘 곁에서 도움을 주었다. 일상이 전장이나 생지옥 같았던 그 시절 그 대학에서 그렇게나마, 그런 식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찾은 대학에는 여전히 아프고 슬픈 기억과 상처의 술비린내가 도처에 진동하고 있었다. 시간은 많이 흘렀으나 이 나라와 사회, 그리고 학교는 그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진보하지 않았다. 나아지기는 커녕 절망스럽게도 반사회적, 비도덕적 말세의 나락으로 역주행, 퇴행하고 있다.


교문을 나서면서 그 시절, 기형도 시인의 시를 비틀어 지은, 우리 대학의 현실에 침을 뱉는 심정으로 노래한 졸시 '나의 대학시절'이 저절로 떠올랐다. 30여년 방치한 여전히 아프고 슬픈 우리 대학의 안타까운 현실을 나는 그만 목격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막걸리통이 가득하였다

소나무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소주병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술을 퍼마시려 주저앉았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콜린윌슨을 읽었다, 그때마다 술이나 한잔 하자는 초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달래철이 오면 친구들은 고모집과 애기능 언덕으로 흩어지듯 나뉘었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알콜중독자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던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술을 못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술판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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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성에서 조망한 하이텔베르크 중심가.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성령교회’ - ⓒ 정기석


하이델베르크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술통이 있다

만약 지금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면 처음부터 초·중·고 등 각급 학교를 다시 다니고 싶다. 아니면 학교를 아예 안 다니고 싶다. 학비와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독일로 넘어가 하이델베르크대학 쯤에 입학하고 싶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이미륵 작가처럼 다시 대학생 노릇을 하고 싶다.

술은 이제 그만 좀 마시고, 분노도 적당히 조절하고, 성실하고 진지한 학생으로서의 본분은 한시도 잊지 않으며 인간과 사회의 진실을 다시 공부하고 싶다. 정의롭고 지혜로운 교수나 선생의 지도를 받으면서 용기있고 창조적인 학우나 도반들과 협동하고 연대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그런 동지들과 함께 새 나라를, 새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을 열심히 학습하고 토론하고 연구개발하고 싶다.

지난해 5월, 대학의 도시 하이델베르크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반나절을 보냈다는 말은 본 게 별로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느낀 점이 많았다. 하이델베르크는 듣던 대로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게다가 가장 지적인 도시였다.

짧은 그 도시에서의 기억에서 앞자리를 차지하는 건 단연 술통과 술집이다. 아마도 나의 대학시절을 온통 지배한 게 술이라 그럴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고성 지하실의 22만리터가 담기는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 술통, 그리고 추억의 명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인, 하이델베르크 대학가 학사주점 '붉은 황소(Roten Ochsen)'.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조망한 대학 도시 하이델베르크는 중세 동화의 나라의 풍광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픈 역사를 애써 감추고 있다. 지난날 참담한 전란의 폐허를 딛고,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재건된 것.

17세기에 30년 종교 전쟁, 프랑스 루이14세의 팔츠계승전쟁으로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었다. 당시 살아남은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라곤 하이델베르크대학 부속교회인 성령교회(Heiliggeistkirch), 기사회관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볼 수 있는 동화같은 건축물들은 대부분 18세기에 당시 유행안 바로크 건축 양식으로 재건축될 수밖에 없었다

개중 하이델베르크 시가지의 무게중심을 잡고 있는 성령교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유독 일본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는 사연이 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를 상징하는 스테인드글라스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원폭 이후 그곳에서 나온 잔재를 가지고 원폭 희생자를 위로하고 비극을 잊지 않으려 만들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파괴를 겨우 면한 성령교회가 인류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상징물을 품고 있는 역사적인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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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교회가 서 있는 마르크르트 광장 - ⓒ 정기석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때문에 파괴

누구나 하이델베르크에 입성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은 단연 하이델베르크 성(Schloss Heidelberg)일 것이다. 도시를 휘감고 도는 네카어(Neckar) 강변에서도 100m 높이에 우뚝 서 있는 웅장하고 중후한 붉은 사암 건물을 외면할 도리가 없다. 이 성 또한 30년 종교전쟁, 프랑스 루이14세의 침략전쟁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심지어 낙뢰의 천재지변도 성을 피해가지 않았다. 이후 비워둔 성이 무주공산처럼 방치되자 시민들이 성채에서 돌과 벽돌을 훔쳐가면서 성은 더 망가졌다.

어찌보면 고성이 이렇게 망가진 근본적인 원인은 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다. 대학의 지적 세례를 받은 하이델베르크 시민들은 어느 도시보다 혁신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종교개혁 당시 가장 먼저 전체 시민들이 개신교로 개종할 정도였다. 당시 프리드리히 5세가 구교에 대항하는 신교의 중심인물이 되면서 하이델베르크는 유럽 대부분이 파괴되는 30년 종교전쟁의 주역이자 주무대가 되고 만다.

지금도 성은 여전히 폐허나 다름없는 외관이다. 관광객들이 보기에는 돈 많고 역사관이 깊은 독일정부에서 왜 그렇게 방치하는지 의아스럽다. 하지만 그 이유를 듣고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완벽한 복원이 어려우면 차라리 복원하지 않는다 게 독일 문화재관리의 원칙이라는 것.

어설프게 손을 대서 위작이나 모조품처럼 만드느니 차라리 그냥 파괴된 상태로 놔두는 게 문화재의 원형으로서 더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폐허 같은 하이델베르크 고성은 전혀 폐허 같지 않다. 아릅답고 장엄한 역사와 문화의 콘텐츠가 가득 차 있는 느낌을 받는다.

13세기부터 짓기 시작한 이 특별한 고성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건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 술통이다. 1751년에 만들어진 일명 하이델베르크 툰(Heidelberg Tun)이다. 정확하게 22만1726 리터의 용량이다. 당시 이 지방에서 나는 백포도를 세금으로 받아 와인으로 담가 놓으려고 이렇게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술통 위로 사람이 올라가 춤을 추고 연주하는 공연무대로 삼을 만한 정도의 크기다. 

이 술통과 관련해 '믿거나 말거나' 야사도 전해진다. 전쟁이 나서 적으로부터 소중한 와인통을 지키라고 파케오(Perkeo)라는 난쟁이를 고용했다. 그런데 지키라는 와인통은 지키지 않고 하루 15병씩 와인을 퍼마시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희비극이다. 하지만 아직도 난쟁이는 쫓겨나지 않고 조각상으로 부활해 술통 옆을 단단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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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 성 지하실의 세계에서 가장 큰 와인술통 - ⓒ 정기석


막스 베버가 가르치고 한나 아렌트가 배운 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Ruprecht-Karls-Universität Heidelberg)은 명실공히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다. 신성로마제국 알프스 산맥 북쪽에서는 프라하 카를 대학교, 빈 대학교 다음으로 3번째다. 루페르트(Ruprecht) 1세가 세워 1386년에 교황 우르바누스 6세의 인가를 받았다. 개교한 지 600년이 훌쩍 넘은 것이다.

그동안 5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세계적 명문대학답게 위인과 명사 동문이 즐비하다. 철학자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 헤겔, 그리고 현대사회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막스 베버가 교수로 재직했다. 독일의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도 이 대학 출신이다.

독일계 유대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여기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는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불륜 관계였던 하이데거 아래서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나치에 적극 협력하던 하이데거에 환멸을 느끼고 하이델베르크로 떠났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의 지도를 받는다. 아렌트는 권력은 '한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으며, 그것은 집단이 함께 유지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타인의 의지에 반하는 경우의 권력은 폭력으로 규정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며 품게된 신념일 것이다.

이 대학 지질·고생물학 연구소는 인류의 조상을 모시고 있다. 성전이나 사당이 있는 게 아니다 '하이델베르크인의 하악골' 화석이 전시되어 있다. 바로 '호모 에렉투스'의 그것이다. 비록 공부를 열심히 한 건 아니지만 나는 명색이 학적부상으로는 지질학 전공 석사다. 그 유명한 화석을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심지어 하이델베르크 대학로의 명소 '붉은 황소(Roten Ochsen)'도 그냥 지나쳤다. 고양이가 어물전을 그냥 지나친 셈이다. 반나절 도보여행이라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가에 있으니 일종의 학사주점이다. 1839년 개업 이래 6대째 슈펭겔(Spengel) 집안에서 가업을 잇고 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술집이다. 작가 마크 트웨인, 영화배우 존 웨인과 마릴린 먼로, 그리고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도 이 술집을 다녀갔다.

뮤지컬 영화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의 촬영장소로 특히 유명하다. 황태자 카를 하인리히가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 와서 카페에서 일하던 케티와 사랑에 빠진다는 한국 드라마 같은 내용이다. 붉은 황소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아쉽게 발 길을 돌릴 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칼 황태자 역의 마리오 란자가 힘차게 선창하는 '드링크, 드링크' 노래 소리 환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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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명화 ‘황태자의 첫사랑’의 무대 ‘붉은 황소(Roten Ochsen)’ - ⓒ 정기석


하이델베르크에서는 원숭이가 사람을 가르친다

고성에서 구 시가지 마르크트 광장(Grote Markt)으로 내려와 성령교회 담벼락에 붙은 작은 상점과 카페를 둘러보는 재미도 괜찮다. 내처 네카강변으로 다가가면 카를 테오도르((Karl Theodor Brucke) 다리를 놓칠 수 없다. 홍수로 유실된 목조다리를 18세기 말에 개축했다. 개축자 '칼 테어도르'의 이름도 붙이고 동상도 세웠다. 현지인들은 오래된 다리라는 의미로 '옛 다리(Alte Brucke)'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리 입구에는 작은 원숭이 청동상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다. 원숭이가 살아서 재주를 부리는 것도 아닐 텐데. 하이델베르크가 철학의 도시였음을 상징하는 철학적인 조형물이라고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원숭이가 왼손으로 동그란 거울같은 청동원판을 들고 있다. 듣고보니 사연이 심상치 않다.

15세기에 하이델베르크는 도시의 문장으로 원숭이를 새겨넣었다. 원숭이는 서양에서는 한국의 개처럼 욕이 되는 불경한 동물이다. 그런데 욕의 화신을 도시의 문장으로 사용하다니. 하이델베르크는 급진적인 진보성향의 도시이자 철학의 도시로서 특별한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의 사회상을 원숭이에 빗대어 비유, 세태를 풍자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가장 천시되고 추하게 취급되는 원숭이가 사람처럼 비스듬하게 서서 비웃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에게 정면으로 청동거울원판을 내미는 듯하다. 사람들이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원숭이의 모습과 비교해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압권은 원숭이의 빨간 엉덩이다. 당시 대주교의 종교적 간섭이 심했기 때문에 대주교가 사는 마인츠 방향으로 엉덩이를 들이밀게 만들었다고 한다. 마인츠 대주교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스러운 민심을 대변하는 모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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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테오도르 다리 입구, 철학있는 진보적 하이델베르크 시민을 상징하는 ‘원숭이 청동상’ - ⓒ 정기석


철학 있는 교육이 나라를 구할 것이다

불과 반나절 동안이었지만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고성에서, 대학에서, 술집에서, 그리고 원숭이 상에서 소중한 깨달음을 얻는다. 철학이 없는 민족은, 교육이 잘못된 국가는 고난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선진국 독일, 독일 국민의 의식수준과 생활방식은, 바로 독일 교육의 성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독일에서 사실상 교육의 시작인 유치원을 책임지는 정부부처는 교육부가 아니라 사회복지부다. 교육의 시작을 단순한 교육행위가 아닌 보편적 시회복지서비스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유치원 3년 동안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자연 속에서 다른 친구들과 사이좋게 놀고 어울리는 법을 배울 뿐이다. 아이들이 모국어 조차 깨우치지 못하고 3년 내내 허송세월(?)해도 학부모는 전혀 항의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4년 동안은 줄곧 동일한 선생님이 담임을 맡는다. 아이들을 최소한 4년 정도는 내내 지켜봐야 그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겨우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아이가 공부를 할지, 기술을 배울지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는 아이의 미래를 학부모에게 자신있게 추천하고 학부모는 교사의 신중한 결정을 믿고 따른다.

독일의 대학 도서관에서 산만하게 들락날락거리는 학생은 대개 한국유학생이라고 한다. 일단 체력과 집중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선택한 학과와 학문에 대한 통찰이나 신념이 부족해서 그렇다. 반면 독일 학생들의 체력과 집중력은 대단하다. 어릴 때부터 축구 등 운동이 생활화되었다. 학원이나 독서실 골방 책상에 붙어 앉아 시험공부만, 숙제만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독일 대학생들은 스스로 하고 싶어하던 공부를 하니 집중력이나 흥미가 안 생길 리 없다. 고등학교에서는 한국처럼 입시공부에 대한 강제와 부담이 없었으니 대학에 와서 본격적으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공부와 연구에 재미를 붙인다. 한국 유학생들은 이미 고등학교 때 공부에 지치고 매력도 잃은 상태로 독일로 건너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농부가 되려는 아이는 농업전문학교에서 철저히 공부해야 한다. 졸업하고도 수년간 농장에서 현장실습을 마쳐야 국가고시를 봐서 농부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농부자격증이 있어야 농부로 인정받고 농업을 직업 삼을 수 있다. 아무나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농사 뿐 아니라 농식품 가공도 마찬가지다.

모두 교육이, 철학이 문제다. 그게 모든 변화와 혁신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확신하다. 정확히 그 지점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앞으로 수십 년이 걸리든, 수백 년이 걸리든. 6백년이 넘은 대학을 가진, 독일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보적인 도시 하이델베르크가 그 사실을 결과로 증거하고 있다. 

○ 편집ㅣ장지혜 기자

#하이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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