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쉽다, '광복 70년 전북 70인'에 빠진 두 사람

애국지사 이인식·장태성 선생 이야기

등록 2015.08.28 21:07수정 2015.08.31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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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향토문화연구회가 '광복 70년 전북 70인'을 선정 발표했다.

70인 중에는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 정치인, 경제인, 사회운동가, 법조인, 종교인, 학자, 교육자, 의료인, 예술인 등이 포함됐다. 군산 출신으로는 윤석구(초대 체신부장관), 이영춘(의사), 채만식(소설가), 채금석(체육인), 고형곤(정치인·학자), 김선기(국어학자), 김판술(정치인·전 농림부장관), 양일동(정치인), 고판남(기업인), 최주한(경제인), 박래현(화가) 등이다.   

8월 17일치 <군산신문>에 따르면 전북향토문화연구회는 "70명의 인물을 가려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며 "본회에서 선정한 70인 모두가 그대로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자부하는 것은 다소 위험한 생각"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아쉬운 점은 광복과 무관한 인물도 선정되고, 꼭 포함되어야 할 인물이 빠졌다는 것이다. 그중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과 옥구농민항일항쟁을 이끈 우양 장태성 선생을 소개한다.

전 재산을 조국의 독립자금으로 헌납한 이인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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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월명공원에 세워진 애국지사 이인식 선생 동상. ⓒ 조종안


춘고 이인식 선생(1901-1963)은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 부농의 막내아들(3남 2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한다.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1916년 보성고에 입학한다. 만석꾼 아들이었던 그는 어려운 학우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선행을 베풀면서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다양한 친구를 사귄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 종로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 이인식은 시위 군중을 미국 영사관 쪽으로 유도하고 독립선언문을 살포하는 등 삼일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든다. 3월 5일 자택에서 각 전문대와 고보생 대표 63명이 그간의 투쟁내용 평가와 사후대책 등을 토의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0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옥중에서 많은 독립투사를 만나 외국에서의 활동상황과 독립운동자금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출소 후에는 암암리에 가산을 정리하여 상해로 건너가 거금 8000 원을 임시정부에 헌납한다. 1923년 일본으로 유학, 동경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대학에 다니면서 재일본 한국인 학생 항일결사의 일원으로 금우회(錦友會)를 조직하고 월보도 발간한다.

1925년 거사를 도모하다 일경에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되자 일부 동지들과 엿장수로 변장하고 중국으로 탈출한다. 그때부터 망명생활이 시작된다. 경술국치(1910)이후 '왕'으로 강등된 순종황제가 1926년 4월 25일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장례 후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인식은 국내에 잠입, 거사 활동, 정보수집, 군자금 조달 등 조국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친다.

1945년 8월 15일 염원하던 광복을 맞아 귀국한다. 하지만 조국은 그가 생각했던 그 조국이 아니었다. 이념을 앞세운 권력투쟁과 가난으로 사회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는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을 개탄하면서 임피로 내려와 임피중학교 제2대 교장을 맡는다. 그리고 "배워야 한다. 그래야 잘 살 수 있다!"는 일념으로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굶주린 소년·소녀들을 배움의 길로 인도한다.

헌신적인 교육열과 숭고한 교육 정신

군산시 나포 면장을 지낸 하영태(77) 씨는 "이인식 선생은 제2의 부모로 생각한다"면서 "5년간 농사꾼 노릇을 하며 공부해서 고급공무원까지 지냈는데, 어떻게 은혜를 잊겠느냐"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씨는 "이인식 선생은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다 약초를 캐어 학비를 만들게 하였고, 그도 부족해 봉급을 털고 수당을 환원해서 학생들 학비로 전환했다"고 덧붙였다. 

열두 대문을 열고 들어가야 안채가 나올 정도로 부호였음에도 거지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아 "만인덕덕(萬人德德) 이인식"이라고 하면 임피 읍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씨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 전부를 조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한 애국자요, 선각자이니 제자인 우리가 당연히 모셔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인식 선생은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상하고, 전북 교육의원 재직 중(1963년 3월) 생을 마감한다. 지금은 동작구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잠들어 있다. 군산 월명공원에는 동상이, 임피중학교 교정에는 석상이 세워져 있다. 석상 정면에는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 인생의 후배들아, 책을 가까이하여 후회 없는 삶을 살기 바란다.'라는 문구가 음각되어 있다.

옥구농민항일항쟁 이끌다 옥고 치른 청년 장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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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주년(2013)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식 모습. ⓒ 조종안


우양 장태성 선생(1909~1987)은 군산시 옥구읍 옥구면 옥정리 출신이다. 전주고보 3학년 때(1926) 동맹휴학과 일본인 교장 배척을 주도한 협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판결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는다. 당시 나이 17세. 그는 농민운동에 뜻을 품고 '이협사농장'이 있는 옥구군 서수면 용전리 이형노씨 집에 야학을 차리고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에 힘쓴다.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옥구농민 항일항쟁)는 1927년 11월 일본인 농장주들의 터무니없이 높은 소작료(75%) 요구와 일본 경찰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국내 농민운동의 대표적인 항일항쟁이었다. 군산 향토사학자들은 삼일운동의 연장이요, 독립운동으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당시 소작료는 전국 평균 48%, 전북지역은 42%~46%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1905년 지금의 군산시 서수면에 대농장을 설립한 가와사키(川崎)는 전제적 방식으로 농장을 운영하였다. 자신의 고향인 일본 니가타현(新潟県) 출신 지주들에게 옥구지역에 농장설치를 권장한다. 1926년 가와사키가 죽자 대형 농장경영의 유리함을 알게 된 지주들은 그해 주식회사 형태의 '이협사농장'을 설립하고 봉건시대 영주처럼 군림한다.

자료에 따르면 1920년을 기점으로 우리 민족은 80%가 농민이었고, 그중 전북은 68%가 소작농이었다. 특히 군산·옥구 지역은 일본인 농장의 밀집지대요, 농토 수탈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6년 옥구 농민조합이 탄생하였고, 청년 장태성의 도움으로 서수 농민조합, 서수 청년회가 발족한다. 눈을 뜬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의 폭압에 조직적으로 대항하는 항쟁의식을 갖게 된다.

1927년 11월 20일 이엽사농장은 소작농들에게 75% 고율의 소작료를 요구한다. 이에 장태성이 서수 농민조합 교섭위원으로 나서 ① 소작료를 45%로 조정해 줄 것 ② 포장은 비싼 가마니보다 '섬'으로 할 것 등을 호소한다. 그러나 농장 측에 무시당했고, 장태성은 임시총회를 열어 불납을 결의한다. 그리고 2차 방문하여 사정한다. 사정하고 호소해도 농장 측이 공갈·협박으로 불응하자 24일 정식으로 내지 않겠다는 뜻을 통고한다.

농장 측 신고를 받은 경찰이 장태성을 포박하여 군산경찰서로 압송하려고 임피역 주재소에 유치했다는 소식을 접한 농민들은 25일 야밤에 징을 쳐 500여 명이 삼거리에 집결한다, 그리고 '장태성 석방' 구호를 외치며 궐기하였다. 격분한 농민들은 임피역 주재소 기물을 파괴하고 장태성을 구출한다. 경찰은 26일 서수주재소를 습격한 조합원 200명 중 30명을 압송하는데 1927년 11월 29일치 <동아일보>는 '군산·옥구는 계엄 상태를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군산 경찰은 시위대 중 80명을 혹독한 고문으로 문초한 후 부녀자 30명은 석방, 51명은 검사국에 송치한다. 그중 34명이 기소되어 무료변론에 나선 가인 김병로 변호사 입회하에 모두 유죄판결을 받는다. 한편 34명 가운데 18명은 광복 후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고, 옥구 농민항일항쟁 기념비 부근은 2003년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 시설로 공식 지정되었다.

장태성 선생 본래 이름은 장태성갑(張台成甲)이다. 장수현 전 군산대 교수(장태성 선생 조카) 증언에 따르면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욱(公郁)이란 가명을 사용했다 한다. 광복 후 경남 통영과 부산에 거주하면서 장수봉(張壽奉)이란 이름으로 언론인,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부산의 국제신보 편집국장, 부산일보 부사장을 지냈다.

장수봉은 1978년 6월 7일치 <동아일보> 지역 인물을 소개하는 '신 8도기'에 충무·통영 출신 언론인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혁신계 인사로 분류됐던 그는 1980년대 초중반, 김철(제7대 대통령 후보)이 이끄는 한국사회당 고문. 공천심사위원. 전당대회의장을 맡기도 하였다. 세월의 굴곡만큼이나 이름을 자주 바꿨던 장태성. 광복 후 장수봉으로 다시 태어난 그는 1987년 2월 7일 새벽 보훈병원에서 시련과 영광이 점철된 생을 마감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와 매거진군산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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