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토록 사랑한 여인이 그저 영상이었다니

[김성호의 독서만세 69] <모렐의 발명>

등록 2015.08.29 18:06수정 2020.12.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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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렐의 발명 책 표지 ⓒ 민음사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Adolfo Bioy Casares, 1914-1999)의 소설을 읽었다. 소설은 작품 자체도 유명하지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쓴 소개말로 더욱 잘 알려진 장편 데뷔작 <모렐의 발명>이다. 사형을 피해 도망친 수배자가 어느 무인도에 흘러들어 겪는 신비스런 일을 그렸다. 비오이 카사레스와 평생토록 깊은 우정을 나눈 보르헤스가 이 작품을 가리켜 '완벽한 소설'이라 칭한 건 너무도 유명하다.

<모렐의 발명>은 환상적인 사건을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에 따라 써내려간 비오이 카사레스의 대표작이다. 중남미 문학이 전성기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한 마술적 사실주의는 꿈과 환상 등 불확실한 상황을 소설의 구성 가운데 적극 차용하는 형식적 특징으로 널리 알려졌다. 흔히 환상문학이라고도 불린다. 비오이 카사레스는 보르헤스와 함께 바로 이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혀 왔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세르반테스상, 알폰소 레예스상 등 권위 있는 상을 수차례 수상한 세계적 작가의 대표작이 바로 <모렐의 발명>이기에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소설은 '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채택했다. 사형선고를 받은 주인공은 목숨을 건 항해를 통해 '빌링스'라 불리는 무인도로 도망친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밀물과 부족한 먹거리 등 거친 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한 무리의 사람들을 목격한다. 혹여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이 아닐까 두려워하며 숨죽여 지내던 그는 매일 오후 바닷가 바위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이름 모를 여인을 발견하고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든다.

검거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여인에 대한 간절함이 커지자 그는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려 마음먹는다. 그런데 여인은 자기 앞에 나타난 그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해 그를 공황상태로 내몬다. 아득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섬 안을 헤매던 그는 우연한 계기로 섬을 찾은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게 된다. 놀랍게도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술에 가까운 기술로 재현된 영상인 것. 과거에 이 섬을 찾은 모렐이란 남성이 자신이 발명한 기계로 그 자신을 포함해 함께 온 사람들을 찍어 매주 재현되도록 해놓은 것이다.

소설은 현실 속 인물인 주인공과 비현실적 인물인 재현된 사람들을 공존시키며 절묘한 균형을 빚어낸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보여지는 재현된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 심지어는 연모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재현된 여인의 모습은 이 소설의 독특한 균형감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사형수 출신의 탈옥수이자 무인도에서 한참을 지낸 외로운 사람으로서 화자의 정신상태를 독자가 온전히 믿을 수 없도록 한 장치 역시 소설에 미스터리 장르의 성격을 부여한다. 불안정한 심리상태의 화자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설정은 독자로 하여금 처음엔 연모의 대상인 포스틴과 그의 연인 모렐을 유령으로 보게 하고 나중엔 화자 자신을 유령으로 보게 한다는 점에서 미스터리적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환상소설을 쓰는 이유

소설은 상상의 발명품인 '모렐의 기계'로 인해 빚어진 일련의 환상적인 경험이 주인공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이로부터 화자가 공포와 사랑, 분노, 체념 등 복잡다단한 감정상태를 지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마술적이라 할 만큼 미스터리한 작품을 쓰는 이유에 대해 비오이 카사레스는 '우리가 사물들 전체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가정을 모험하기 위해, 혹은 당혹할 때 느끼는 흥분과 현기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나는 환상 소설을 쓴다'고 답한 바 있는데 이 소설은 그의 이러한 성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 할 만하다.


소설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으로 화자 이외에 편집자가 전지적 시점에서 몇 차례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한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소설의 주요한 설정으로 쓰이는데 대표적으로 화자가 아이아스와 키케로를 언급할 때가 그렇다. 우선 화자는 그리스 신화를 인용하며 가축들을 찔러죽이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장군으로 아이아스를 이야기한다. 이때 그는 아이아스의 이름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아이아스 또는 이미 이름을 잃어버린 어느 그리스 장군은'이라 표현한다. 하지만 아래 편집자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이아스가 맞고 정확한 인용이었음을 알려준다.

이 장면은 이후 주인공이 키케로를 인용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주인공은 키케로의 <신의 본질에 대하여>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나선 '나는 내가 정확하게 인용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편집자가 등장해 그가 이 문장의 가장 중요한 단어를 생략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소설은 이 장면들을 통해 주인공이 객관적 판단력을 잃고 주관적 환상에 빠져들고 있음을 암시한다. 불완전한 기억을 경계하는 화자의 모습이 불확실한 기억조차 옳다고 믿어버리는 상태로 변화하는 과정이 편집자를 적극 활용한 기법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비현실적 사건에 휘말려가는 주인공의 상황과 맞물려 독자에게 더는 화자의 이야기를 온전히 믿을 수 없음을 깨닫게끔 한다. 소설의 유일한 주요 화자인 주인공을 믿을 수 없게 된 독자는 불명확한 대지를 향해 발을 뻗는 모험가처럼 끊임없이 의심하며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이다.

비오이 카사레스의 소설 <모렐의 발명>은 한국의 독자가, 만약 보르헤스처럼 비오이 카사레스와 유사한 기법을 자주 활용하는 작가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다면, 이색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설정과 형식을 상당히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이 소설을 읽는 자체로 독자는 익히 알고 있었던 소설의 어느 한 경계까지 나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렐의 발명>이 가진 가치는 상당부분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스카프를 두른 여인은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겠다는 내 치료 요법은 어쩌면 상당히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절대로 희망을 갖지 않겠다는 것은 실망과 좌절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이고,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죽지 않기 위해서이다. 이내 나는 이런 감정이 두렵고 혼란스러운 냉담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 감정을 이겨 내야 한다. 도망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지독히 지루한 내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몸은 망가졌지만 그 결과 나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아마도 여인에게 관심을 갖겠다는 내 결심은 나를 과거, 즉 재판관 앞에 다시 서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살고 있는 이 철저한 연옥보다는 나을 것이다. - 41,42p

덧붙이는 글 <모렐의 발명>(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8.01. / 7500원)

모렐의 발명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08


#모렐의 발명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송병선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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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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