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가라고 하더니, 연봉 깎고 정규직 없애겠다고?

[게릴라칼럼] 현금 쌓아둔 채 고용 안 하는 기업들 인건비까지 줄여주겠다?

등록 2015.09.01 13:45수정 2015.09.07 14:10
13
원고료로 응원
a

박근혜 대통령이 8월 2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남북 고위급 접촉과 노동개혁 등 현안에 대해 발언한 뒤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런 말이 있다. "불의와의 싸움은 건망증과의 싸움이다."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그렇지 않다면, 나라를 '말아먹었던' 사람들에게 다시 표를 주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말아먹었다'는 평가가 가혹하게 들린다면, 새누리당이 그리스 외환위기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그리스가 "수렁으로 빠졌다"고 표현했고, 홍준표 경남지사는 아예 "망했다"고 말했다.

한국 상황을 보면 '제 코가 석자'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텐데도, 이들은 대서양 너머 지중해 국가에까지 설익은 논평을 내놓기 바쁘다. 개인적으로 '외환위기'와 깊은 인연이 있어서일까?

1997년 한국 외환위기를 자초한 것은 신한국당으로, 새누리당의 전신이었다. 당사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을 "망하게" 만들어, 지금까지도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 정당의 '적통'을 물려받은 것이 현 집권 여당인 셈이다.

홍준표 지사는 김영삼 대통령과 인연이 닿아 1996년 신한국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했고, 김무성 대표 역시 같은 시기에 신한국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었다. 김 대표는 김영삼 대선후보 추대대책위원회 총괄국장과 이명박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냈다. 두 정치인이 '모셔온' 대통령들 면모만 봐도, 이들이 '경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기는 어렵다.

그리스보다 큰 고통 속에 사는 한국인


1997년의 한국과 2015년의 그리스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한국인이 겪었던 고통이 지금 그리스 국민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에 요구한 조건은 그리스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그로 인해 국민들이 당한 고통은 말이나 숫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그리스가 최근 경제위기 여파로 지난 2년간 자살률이 35% 급등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한국은 1996년부터 1998년 사이 자살률이 45% 넘게 치솟았다. 10만 명당 비율을 보면 더욱 끔찍해, 2008년 한국의 자살률은 최고를 갱신한 그리스 자살률의 2배가 넘었다. 국민들을 이런 재앙 속에 몰아넣고도, 여당 책임자들이 단 하루 구류조차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나마 현재 상황이 나아졌다면 '아픈 과거'였노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한국이 위기의 바닥에 떨어졌던 1998년 당시 청년 고용률은 40.6%였다. 2013년 현재 고용률은 이보다 열악한 40.1%이다. 일자리는 수만 줄어든 게 아니라, 질적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빠졌다.

한국의 이런 처지는 더 우울한 통계로도 드러난다. 최근 발표된 '2015 OECD 건강통계'를 보면, 한국의 10만 명당 자살자는 29.1 명이었다. 이 수치는 외환위기에 갱신된 기록 18.4명의 무게를 쉽게 압도한다.

사람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환경에서 자녀를 낳지 않는다. 최근 들어 그리스의 출산율이 급락했듯, 한국도 외환위기를 겪으며 1.4명 대로 떨어졌다. 지난해 출산율은 1.21 명이었다. 1997년의 위기는 현재 진행형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깊고 고통스러워졌다.

박근혜발 노동개혁은 '중동 판타지 시즌2'

지난 3월, 대통령은 난데없이 '중동' 이야기를 꺼냈다. "청년 일자리는 중동을 중심으로 해외에 많이 있"으니, 실업 문제는 거기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기이하게 들릴지 모르나, 나는 이 발언에서 대통령의 '진솔함'을 느꼈다. '중동으로 가라'는 고용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다는 솔직한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제 나라 국민을 향해 '일자리는 다른 나라 가서 알아보라'고 말하는 지도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지 모르나, 적어도 담백한 선언이었다.

난데없이 메르스가 찾아와 무지갯빛 '중동의 꿈'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나,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 번 해 보라"는 재담을 할 때도 나는 웃지 않았다. 대한민국에 청년이 모두 사라지면, '청년 실업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창의적' 논리는 '중동 판타지 시즌2'에 해당할 "노동개혁"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지난 6월, 나는 정부가 공개한 <노동시장 개혁 추진방안> 보고서를 무척 인상 깊게 읽었다. 이제까지 그렇게 감추고, 덮고, 왜곡해 온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노동자 간의 "불합리한 임금 격차"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사태가 심화되고 있다는 경고까지 덧붙이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비정규직과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임금 격차를 줄이거나,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짧은 생각이었다.

반대로, 보고서는 정규직 임금을 깎고 '정규직 과보호'를 철폐해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고용안정에 있으므로, 정규직 임금을 깎고 해고를 쉽게 만들면 정규직-비정규직 사이의 '격차'가 해소된다는 논리다.

부자 기업, 가난한 국민

a

경찰, 집회 참가자 얼굴 향해 캡사이신 발사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8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 도로를 점거한 채 '노동시장구조개악저지 집중행동' 대회를 진행하자, 경찰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참석자 얼굴을 향해 캡사이신을 조준발사하고 있다. ⓒ 유성호


이제까지 삶이 괴로웠더라도, 앞으로 상황이 나아진다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과 여당은 국민이 겪어 온 고통으로 충분치 않다고 한다. 50대 직장인 월급을 깎고, 해고를 더 쉽게 만들어야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임금피크제'를 주장하는 정부나, 이를 두 손 들어 반기는 기업과 보수언론의 논리는 이렇다. 50대 중반 취업자들의 월급을 깎으면 기업에 여윳돈이 생겨 청년 고용을 늘린다는 것이다. 그건 기업이 돈이 없어서 사람을 못 뽑는 경우에나 해당하는 말이다.

현실은 정 반대다. 지난 10년간 한국 10대 기업의 유보율은 매년 기록을 갱신해, 지난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유보율이 높다는 것은, 벌어들인 돈을 사내에 쌓아놓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기업이 돈을 생산투자에 쓰는 것도 아니다. 지난 10년간 기업들의 자산을 분석해 보면, 현금성 자산과 단기투자자산은 증가한 반면, 기계나 설비 등의 투자는 오히려 감소했다.

기업이 기록적 액수의 현금을 쌓아온 온 지난 10년 동안, 청년 고용률은 꾸준히 하락했다. 돈은 남아도는데, 고용은 오히려 줄여온 것이다. 게다가 생산율은 꾸준히 늘어난 반면, 실질임금은 외환위기 이후로 계속 답보상태다. 일은 더 많이 하는데, 임금은 늘지 않은 것이다.

한국의 노동소득 분배율 역시 외환위기 때보다도 낮다. 사람을 뽑기는커녕, 뽑아놓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제대로 분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데도 정부는 기업들의 인건비를 줄여주겠다며 팔 걷고 나섰다. 기업들이 돈이 많은데 채용을 안 하고 있으니, 돈을 더 쥐여주면 채용을 할 거라는 논리다.

차라리 '중동 가라'고 해라

그럴 바에야, 그냥 '중동 가라'고 말하라. 그곳에 일자리는 없지만, 적어도 이미 취업한 사람의 박봉이 줄지는 않을 테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는 기업들이 배만 불리며, 자신을 키워 준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해 온 행태를 바로잡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연히 기업들에게 공정한 분배, 고용안정, 생산투자를 요구할 일이었다.

하지만 임기 절반도 지나지 않아 '경제민주화'는 '노동개혁'으로 탈바꿈했다. 국민들이 일자리를 못 구하는 것은 '과보호' 탓이라는 것이다. 정규직에서 임금을 줄이고, 고용안정을 빼면 비정규직이 된다. '노동개혁'은 정규직을 없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런 게 해법이라면, 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현재의 낮은 출산율을 유지하면, 2500년쯤에는 인구가 30만 명 선으로 줄어들 것이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구직 희망자'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노동개혁 #임금피크제 #비정규직 #고용률 #박근혜
댓글1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