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봉 깎은 이명박, 연봉 깎는 박근혜

[게릴라칼럼] 이명박 '잡셰어링' 따라하는 박근혜 '임금피크제'

등록 2015.09.03 18:19수정 2015.09.0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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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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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담화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6일 담화를 통해 청년실업해결을 위한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전면도입을 예고했다. ⓒ 청와대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잊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만일 사람에게 망각이라는 것이 없다면, 숨을 거둘 때까지 되새기고 싶지 않은 아픔을 지고 살아야 한다. 죽음의 순간까지 그 고통은 하나도 무뎌지지 않고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하지만 망각은 저주이기도 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잊어서는 안 될 일을 잊는 것은 불의와 고통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잊지 않게 서로 보살피는 협력과 연대다.

서로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 기억을 후대로 물려주는 것은 사회 진보의 씨를 심는 숭고한 작업이다. 기억에서 멀어지는 것은 '자연'에 속한 일이지만,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 의지'에 속한 일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 과거 정부가 저지른 억울한 고난과 죽음의 책임을 묻는 것, 역사를 자신의 입맛대로 다시 쓰려는 권력과 맞서는 것은 모두 여기 해당할 것이다.

어디서 본 듯한 '임금피크제'

이러한 연대의 노력으로, 나는 독자들의 기억 하나를 되살리고 싶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열정적으로 추진하는 '임금피크제'가 있다. 혹시 이 이름에서 과거의 정책을 떠올리게 되지 않는가?

영어 몰입 교육의 선구자답게, 이명박 전 대통령과 그 일부 측근은 불필요한 영어 표현을 즐겨쓰곤 했다.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잡셰어링' 같은 말처럼 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정책은 여당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참담히 실패한 뒤 사람들의 관심에서 급속히 사라져갔다.


이 실패가 검증된 낡은 정책을 '임금피크제'라는 이름으로 먼지를 털어 꺼내 든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말도 영어를 포함하고 있다. 생소한 외국어는 정책의 본질을 흐리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임금 삭감제'와 비교해보라).

물론 '일자리 나누기'와 '임금피크제'의 차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일자리 나누기'는 사회 초년생 초봉을 삭감한 반면, '임금피크제'는 고령 취업자 연봉을 깎는 정책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게 같아진다. 임금을 줄인 만큼 채용이 늘어난다는 주장 말이다. 

'임금 피크제'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잡셰어링'이 시작된 2009년 이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면 된다. 우선 그 해 청년 고용률(통계청 발표 기준)은 전 해(42.3%)보다 곤두박질쳐 41.3%로 떨어졌고, 임기 후반인 2012년에는 더욱 떨어져 41.1%로 추락했다. 취업자들의 초임은 30%까지 대폭 줄었으나,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이 놀라운 결과는 '마이너스의 손'이라 불리던 이 대통령의 별명이 결코 빈말이 아님을 보여준다.

20대 초봉 깎더니, 이제 50대 연봉 삭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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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피크제를 도입하더라도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를 제대로 거쳐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사진은 지난 7월 4일 서울에서 열린 '공공-금융노동자 투쟁 결의대회' 때 모습. ⓒ 강연배


이명박 대통령이 성공한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표창 수여만큼은 역대 어느 정부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열정을 보여주었다. 4대강 사업 관련자에게 '보 터지듯' 쏟아진 훈장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잡셰어링 표창'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2009년에 시작한 정책에 대한 포창 수여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표창을 받은 기업들의 면모를 살피는 것은 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예컨대 신한은행은 2010년에 '일자리 창출 지원 유공 정부포상' 가운데 최고의 영예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평년의 4배 넘는 직원 채용'이 주요 수상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신한은행이 표창을 받기 한해 전 주목할 만한 보도가 나왔다. "중도에 짐 싸는 은행 인턴들"이라는 <연합뉴스> 기사(2009년 4월 2일 자)였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한 은행 인턴들이 중도에 그만두고 있다... 지난 1월 은행들 가운데 처음으로 500명을 채용한 신한은행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인원은 300명뿐이다. 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무려 40%나 되는 인원이 중도에 짐을 싼 것이다. 신한은행 인턴은 하루 7시간씩 주 3일 근무에 월 70만 원을 받는다. 이백순 행장은 이처럼 인턴들이 대거 나간 점을 의식한 듯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인턴 제도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사는 인턴들이 은행에서 돈 한 번 만져보지 못한 채 "하루 종일 객장 안내나 손님맞이만 하다가 퇴근한다"는 인턴 사원 말을 인용했다. 수상 이듬해에도 관련 기사가 "은행 인턴 정규직 전환 100명 중 2명"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2011년 7월 15 일자 <문화일보>에 실렸다. 

"국내 4대 은행(국민·우리·신한·하나)이 지난 2009년 잡셰어링(일자리 나누기) 이후 뽑은 인턴 100명 중 2명만 정규직으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권 인턴은 2∼3개월 정도의 임시직으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없는 데다 인턴 채용으로 정규직 공채 인원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지만 은행권과 금융노조 모두 손을 놓고 있다."

'마이너스의 손'이 벌인 '마술'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보여준다. 기업이 직원 임금을 삭감하거나 아예 공채 인원을 줄여 남은 돈으로 저임금 인턴을 대거 뽑아 생색내기로 활용한 것이다. 그저 '숫자'가 중요하다 보니, 채용된 사람에게 돌아가는 돈이 적을 수밖에 없고, 핵심 업무를 맡기기 위해 뽑은 사람이 아니다 보니, 정규직이 되거나 관련직으로 취업할 경험도 쌓지 못한 채 시간만 소모하게 된다.

정부도, 기업도 '보여주기'가 목표였던 만큼, 시간이 갈수록 흐지부지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엇비슷한 '쇼'가 잠시 반복되다가 사라질 뿐이다.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임금이 깎이거나, 정규직 채용 인원이 주는 피해를 입고, 구직자 역시 인턴직을 옮겨다니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임금피크제'가 구직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 시장 유연성' 요구하기 전에 복지 공약부터 지켜라

2011년, 중앙일보경제연구소는 '잡셰어링'에 관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제목과 부제만 봐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화려한 실패, 잡셰어링
기존 직원 양보 못 끌어내 만만한 신입 초임만 깎아
흉내만 낸 얼치기 정책 결국 3년 만에 없던 일로


심지어 같은 해, 여당의 김성태 의원조차 "초임 삭감 정책은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임금 삭감으로 만들어진 일자리는 6개월짜리 단기 인턴이 대부분이었다"고 비판했다. '임금피크 정책' 또한 같은 순서가 예정돼 있다. '누구 월급을 손보느냐'만 다를 뿐, 인건비를 아껴 고용을 늘린다는 목적과 방식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앞의 기사 "'노동개혁'이라고? 차라리 '중동 가라'고 해라"에서 분석했듯, 한국 기업은 돈이 없어 고용을 못하는 상황이 아니다. 사상 최대의 현금을 쌓아놓고도 오히려 고용을 축소해 왔으며, 이익을 생산 투자가 아닌 투기 목적으로 사용해 왔다.

더구나 '임금피크제'와 쌍을 이루는 '노동 개혁'에는 이명박 정부의 '잡셰어링'이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독소 조항들이 들어 있다. 바로 '정리해고 요건 완화'다. 비록 '60세 정년을 보장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정년 보장'과 '정리해고 요건 완화'는 상충하는 관계다. 고용주가 '무능'을 핑계로 직원을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을 때 '정년 보장'이 설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한국 평균 퇴직 연령은 50대 초반이며, 계속 앞당겨지는 추세다. '노동 개혁'은 임금을 줄이고, 취업 자리를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비정규직과 정리 해고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한국 정부, 재계, 보수언론은 한국의 노동시장 경직성이 고용을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의 고용보호지수(EPI)는 OECD 국가들 가운데 하위권에 속한다.

한국의 정규직 고용 보호 지수는 1997년까지 3.0대를 유지하다가 외환 위기 이래로 2.369로 떨어져 현재까지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비정규직은 2.125로 더욱 열악하다. 독일이나 스웨덴처럼 실직자의 최저 생계를 국가가 책임져 주는 국가들조차 한국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고용 보호를 제공하고 있다.

'노동 유연화'를 말하려면, 국가가 최저 생계비를 책임지는 사회 안전망부터 마련해 놓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시 국정 목표로 '일자리 중심의 창조 경제'와 '맞춤형 고용·복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복지 공약은 파기되거나 대거 후퇴했다. 이 상황에서 '노동 개혁'을 주문하는 것은 안 그래도 불안한 국민의 삶을 저임금과 정리 해고 위험 속에 내모는 행위다.

'임금피크제'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고?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임금피크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경제 전체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현 정부만큼 '소통'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적이 없다지만, '50대 임금을 줄이고 해고를 용이하게 해야 청년에게 일자리가 돌아간다"는 논리는 '제로섬 게임'의 사전적 정의다.

한 나라 경제를 책임진 사람이 기본 경제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저 국민을 바보로 여기는 탓일까, 아니면 둘 다일까? 어느 경우든, 최 부총리 겸 장관의 발언은 한국 경제가 표류하고 있는 이유를 말해준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에 '만만한 신임 초임'을 손봤다. 뒤를 이은 박근혜 정부는 '기존 직원'에 칼을 빼들었다. 당시 '초임 삭감'을 들고 나왔을 때 선배 직원들이 같이 싸워줬다면, 사회 초년생들이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신입 사원이나 구직자들이 '쌤통'을 외칠 수 없는 까닭은, 20대도 머잖아 50대가 되기 때문이다.

모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려는 정부와의 싸움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연달아 맞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이런 '연대의 정신'이다. 그 두 정부가 '연대'해 국민을 요리했듯, 우리도 함께 싸워가야 한다. '노동 개혁'이라는 이름의 저임금화-비정규직화 정책에 맥없이 투항할 때, 우리는 세대와 직위를 가로질러 불행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 던져질 것이다.

그들이 찾아와 공산주의자라며 사람들을 잡아갔다.
나는 항의하지 았았다. 난 공산주의자가 아니니까.
그들은 다시 찾아와 유태인이라며 사람들을 잡아갔다.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난 유태인이 아니니까.
그들은 다시 찾아와 노조원이라며 사람들을 잡아갔다.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난 노조원이 아니니까.
그들은 다시 찾아와 천주교도라며 사람들을 잡아갔다.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난 개신교도니까.
그들이 다시 찾아와 나를 잡아갔다.
그 때는 나를 위해 항의해 줄 이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 마틴 니묄러


○ 편집ㅣ조혜지 기자

#노동개혁 #임금피크제 #잡셰어링 #일자리나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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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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