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의 구구절절 옳은 말 바꿔봤더니

[백승권의 생존글쓰기⑨] 갈비처럼 맛있는 글을 써라 : 선경후정(先景後情)(1)

등록 2015.09.02 20:00수정 2015.09.0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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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도 정연하고 내용도 빠짐없이 쓴 것 같은데 읽은 사람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면, 당신의 글은 분명 큰 문제가 있다. 생생하게 쓰지 않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쓰지 않은 것이다. 읽는 사람의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도록 쓰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말인즉슨 옳은 얘기만으로는 터럭 한 오라기도 옮기기 힘들다.

그림을 그리듯 쓴 글, 마음을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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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사망에 애도 물결 지난 2011년 10월 6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애플 스토어에 스티브 잡스의 사진과 그를 추모하기 위한 꽃들이 놓여 있다. 잡스는 지난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연합뉴스/EPA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죽음'은 삶이 발명해낸 최고의 발명품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길을 열어주기 위해 헌 것을 치워버리듯 삶을 변화시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시끄러운 타인의 목소리가 여러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다른 것들은 모두 부차적일 뿐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소감은 어떤가? 구구절절 옳은 얘기요, 인생의 훌륭한 통찰이 담긴 메시지다. 그런데 당신에게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별로 없다. 머리는 이해했는데 마음은 공감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이런 얘길 하는 거지?''누굴 가르치려고?'라는 물음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떨까?

"17세 때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언젠가 성공할 것"이라는 글에 감동받아 33년 동안 거울 앞에서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할 것인가?" 물었습니다. 1년 전 시한부 췌장암 판정을 받았지만, 세포 분석 결과 드물게 치료 가능한 종류로 판명 나 기적처럼 살아났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할 때 가장 필요한 도구입니다. 이 같은 경험을 통해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글은 죽음에 대한 의견과 주장만이 아니라 경험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이 이야기는 당신의 기억 속에 달라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은 가끔씩 기억을 재생하며 '참, 감동적인 이야기야.'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두 글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의 후반부를 요약한 것이다. 두 글은 모두 5문장, 271자로 이뤄졌다. 똑같은 텍스트를 똑같은 분량으로 요약했지만, 당신에겐 사뭇 다르게 읽혔다. 당신은 앞의 글보다 뒤의 글이 훨씬 좋게 다가왔을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두 글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앞의 글은 죽음이라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명하고 있을 뿐 당신의 머릿속에 작은 삽화 한 장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뒤의 글은 매일 같이 거울 앞에서 좌우명을 외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모습, 췌장암으로 죽을 뻔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모습 등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장면 속에 죽음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앞의 글은 논리와 의견만 담고 있고 뒤의 글은 이야기와 사실도 함께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은 의견(느낌)과 함께 그림을 그려주어야 한다. 슬프다는 말만으로는 읽는 사람이 슬픔을 전해 받을 수 없다. 슬프다고 말한 뒤 슬픈 장면을 보여주거나 슬픈 장면을 보여준 뒤 슬프다고 말해야 비로소 슬픔은 전달된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낫다. 먼저 그림을 그려준 뒤 나중에 의견(느낌)을 말하는 게 공감을 극대화하는 방법이다.

살과 뼈가 조화를 이루는 글을 쓰자

이런 글쓰기 방법은 역사가 아주 깊다. <시경>, <전당시>를 비롯한 한시의 대부분이 이런 기법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두 편의 시를 감상해보자. 
 
강이 파라니 새가 더욱 희고,
산이 퍼러니 꽃빛이 불붙는 듯하구나.
올봄이 보건대 또 지나가니,
어느 날이 돌아갈 해인가.
(江碧鳥逾白 / 山靑花欲然 /今春看又過 / 何日是歸年)
- 두보, 절구(絶句)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기에
웃으며 답하지 않지만 마음은 그저 한가롭네.
복사꽃 계곡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이곳이 인간세계 아닌 별천지라네.
(聞余何事棲碧山 / 笑而不答心自閑 / 桃花流水杳然去 / 別有天地非人間)
- 이백, 산중문답(山中問答)

두 시는 강, 산, 문답 장면, 복사꽃, 계곡물 따위의 풍경을 먼저 그리고 있다. 시를 읽으면 한 폭의 동양화가 머릿속에 자동으로 연상된다. 시가 끝나갈 즈음에서야 시적 화자의 느낌과 의견이 드러난다.

이렇게 경치를 먼저 그리고 느낌과 의견을 나중에 밝히는 창작기법을 선경후정(先景後情)이라 부른다. 선경후정은 한시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글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작법이다. 에세이나 칼럼은 물론이고 보고서, 보도자료, 연설문, 자기소개서, 설명문, 안내문, 이메일 등 생존글쓰기 전반에 활용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글쓰기 도구가 바로 선경후정이다.

선경후정을 다양한 글의 분류 잣대로 풀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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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승권


이야기-사실-관찰-구체-개별-묘사가 한 묶음이다. 논리-의견-평가-추상-보편-설명이 또 한 묶음이다(사실-관찰-구체-개별-이야기를 설명의 방식으로 진술할 수도 있다. 여기선 그 문제는 논외로 하자). 논리-의견-평가-추상-보편-설명이 뼈라면 이야기-사실-관찰-구체-개별-묘사는 살이다. 살이 없는 뼈로는 맛을 느낄 수 없다. 뼈의 표면을 살이 도톰하게 둘러싸고 있어야 갈비처럼 맛있는 글이 된다.

당신과 우리는 그동안 논리-의견-평가-추상-보편-설명에 지나치게 의존해 글을 써왔다. 생존글쓰기의 세계는 짧게, 공식적으로 쓰는 것이 미덕이다. 여기서 오해가 생긴다. 짧게, 공식적으로 쓰는 것을 부지불식간 논리-의견-평가-추상-보편-설명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살을 다 발라버리고 뼈만 남기는 것이다.

이야기-사실-관찰-구체-개별-묘사로 글을 쓰면 분량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 축사 요약문에서 본 것처럼 꼭 그렇지만은 않다. 문장을 경제적으로, 효율적으로 쓰는 능력을 키운다면 분량을 늘이지 않고도 살과 뼈가 조화를 이루는 글을 쓸 수 있다.

당신이 이렇게 뼈만 앙상한 글을 쓰게 된 것은 어쩌면 당신 탓이 아닐지도 모른다. 당신은 학생 시절부터 당신의 모습이 뼈만 앙상한 글로 표현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생활기록부에 적힌 글이 바로 그것이다.

"학업에만 열심히 함. 다른 학생에 대한 관심과 봉사는 전혀 기대할 수 없음. 의사소통에 문제가 큼. 자신의 생각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한 의미 파악에 노력하지 않음. 본인의 장래 희망에 대해 굳은 의지가 없고 부모의 말에 좌우되는 의지박약의 모습을 보임."

"수업 태도가 좋으며 성적도 우수해 모든 교과 선생님들로부터 신망이 두텁고, 어떤 시간 어떤 수업에서도 높은 집중력을 발휘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 급우들의 귀감이 됨. 온순하고 원만한 성품으로... 수행평가나 중간평가가 있는 날이면 실력이 부족한 친구들을 직접 챙길 정도..."

(SBS <취재파일>, "평가인가 악플인가"…어느 고3 담임교사의 학생부 기록)

한 학생을 두고 고등학교 3학년과 2학년 담임교사는 각각 이렇게 상반된 내용으로 생활기록부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적었다. 1년 사이에 이 학생이 180도 달라진 것일까 아니면 담임의 평가 기준이 180도 달라진 것일까, 도저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두 글은 모두 학생에 대해 구체적으로 관찰한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이 글을 통해 학생과 학부모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의 평가와 의견(주장)뿐이다. 그런 평가와 의견에 도달하게 된 근거인 관찰과 사실이 없다. 결과적으로 학생 본인과 학부모는 공감과 동의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당하게 됐다. 도대체 담임은 어떤 사실을 두고 이런 평가를 내렸을까? 담임이 말해주지 않는 한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당신의 글도 혹시 이 담임처럼 읽는 사람이 공감하고 동의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다음 회에서 다양한 생존글쓰기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 편집ㅣ박정훈 기자

#백승권 #생존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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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을 위한 보고서 보도자료 작성 교육, 일반인을 위한 자기소개서와 자전에세이 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는 실용글쓰기 전문강사입니다. 동양미래대 겸임교수,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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