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민비가 아니다... 완전히 빗나간 산케이

[분석]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의 외교적 패착... 몸통은 고종이었다

등록 2015.09.02 21:24수정 2015.09.0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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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1일자 <산케이신문> 기사. ⓒ 산케이신문


일본 우익을 대변하는 <산케이신문>이 중국 전승절에 참가하는 박근혜 대통령을 '민비(명성황후)'에 비유해 논란을 일으켰다. 일본군과 로닌(전직 사무라이)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무참히 살해된 명성황후를 박근혜 대통령과 비유한 것은, 이웃 나라 국가 원수에 대한 협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논란을 일으킨 지난 8월 31일 자 <산케이>는 '미국·중국 양다리, 한국이 끊지 못하는 민족적인 나쁜 유산'이라는 제목 아래, 한국 외교에는 사대주의 유전자가 내장돼 있다고 말하면서 사대주의 외교를 '민족적인 나쁜 유산'으로 규정했다. 

기사에서는 "이씨 조선도 말기에 청나라->일본->청나라->일본->러시아->일본->러시아 등으로 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사대의 대상을 번갈아 바꾸었다"고 한 뒤 "그 DNA를 짙게 계승한 한국은 이씨 조선의 재현을 떠올리게 하는 완벽한 사대주의를 드러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를 겨냥해 '이씨 조선의 재현을 떠올리게 하는 완벽한 사대주의'라고 평가절하한 것이다.

<산케이>, 명성황후 죽음 당연한 결과로 인상 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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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초상화. 경기도 여주시 능현동의 명성황후 생가에서 찍은 사진.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으므로, 이 초상화가 황후의 실제 모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 김종성


또 이 기사에서는 일본이 1894년에 청일전쟁(일본식 표현은 일청전쟁)을 벌이고 1904년에 러일전쟁(일러전쟁)을 벌인 것은 조선의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선이 청나라에 사대하고 러시아에 사대함으로써 일본의 안보를 위협했기 때문에 청·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자, (조선은) 청나라에 다가섬으로써 일청전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을 독립시키자마자, (조선은) 러시아에 의존함으로써 일러전쟁의 유발 원인 중 하나를 만들었다."

이 기사는 '일러전쟁의 유발 원인'을 만든 주인공으로 명성황후를 지목했다. 기사에서 사용된 표현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민비'다. 기사에서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청나라의 속박에서 풀어주었는데도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위협했다고 한 뒤,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명성황후의 최후를 설명했다.


"민씨 일파는 1895년 러시아 군대의 지원으로 권력을 되찾았지만, 3개월 뒤에 민비는 암살당했다."

일본이 조선을 도왔는데도 명성황후가 일본을 배반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사실을 설명한 뒤 "민비는 암살당했다"는 문장을 보여줌으로써, 이 기사는 명성황후의 죽음이 당연한 결과라는 인상을 조장하고 있다.

이렇게 기사에서는 명성황후의 최후를 설명한 뒤,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사대주의를 하다가 암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도 그런 사대주의 외교라는 이야기로 결론을 맺었다. 명성황후의 최후를 박 대통령에게 '오버랩'하고자 하는 의도를 짙게 드러낸 것이다.

<산케이>는 명성황후가 일본을 배반했기에 시해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주장했지만, 명성황후 시해가 당시의 일본에 실질적 이익을 주지 못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의 손에 시해당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 사건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외교적 패착이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다.

1894년에 시작해 1895년에 끝난 청일전쟁 결과,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이 소멸했다. 이때부터는 일본이 조선 문제에 간섭했다. 그런데 청일전쟁 승리로 일본이 얻은 것은 조선에 대한 간섭권만이 아니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마관조약(하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를 단절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로부터 랴오둥반도(요동반도)·타이완·팽호열도를 빼앗았다. 랴오둥반도는 한국 서해 북부에 있고 팽호열도는 중국 대륙과 타이완(대만) 사이에 있다. 이 조약이 체결된 날은 1895년 4월 17일(음력 3월 23일)이다.

이 랴오둥반도 할양 때문에 자극을 받은 나라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다. 1860년에 만주 동부의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는 조선의 서해나 동해 쪽으로 진출할 해상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서해 북부의 랴오둥반도를 갖게 되면, 러시아가 서해 쪽으로 남진할 가능성이 희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는 랴오둥반도 문제에 개입했다. 중국 문제에 이해관계를 가진 독일·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의 랴오둥반도 지배를 반대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국간섭이다. 서양 열강의 눈치를 봐야 했던 일본으로서는 삼국간섭을 물리칠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포기했다.

청일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점부터 일본의 간섭에 시달리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이 러시아의 압력을 받고 랴오둥반도를 포기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들 부부는 '러시아라면 충분히 일본을 견제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게 됐다.

그래서 두 사람은 러시아의 힘을 끌어 들였다. 일본의 간섭 아래서 개혁이라는 핑계로 벌어진 각종 조치를 부정하고, 청나라가 갖고 있던 경제적 이권을 러시아에 넘겨주고, 친일내각인 김홍집 내각을 친러시아·친미 내각으로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런 상황을 관찰한 일본은 명성황후가 친러시아·반일본 정책의 몸통이라고 파악했다. 그래서 일본군 및 로닌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벌인 만행이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의 을미사변이다. 이 날 명성황후는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을미사변, 일본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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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초상화. ⓒ 위키피디어백과사전


그런데 그 뒤의 상황은 일본의 기대와 다르게 전개됐다. 일본은 명성황후를 없애면 일본의 영향력이 커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실제로 나타난 것은 러시아의 영향력 강화였다. 이것은 을미사변 당시, 일본의 판단에 오류가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 오류는 명성황후 옆에 있는 고종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고종이 몸통이고 명성황후는 유능한 협력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이전의 고종은 가급적 남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남을 앞세워 뭔가를 도모했고, 그것이 실패하면 남한테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은 뒤로 숨었다. 이런 그의 스타일이 압축적으로 드러난 때가 1884년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은 쿠데타에 필요한 독자 세력을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고종의 비밀 외교를 수행하던 측근이었다. 갑신정변 이전은 물론 그 당시에도 그는 고종의 뜻에 부합하는 행동만 했다. 고종의 뜻이라는 것은,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생겨난 청나라 군대의 내정 간섭을 종식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한양 시민과 하급 군인들이 벌인 임오군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가 1894년까지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그래서 1882~1894년에 고종의 최대 희망은 청나라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은 바로 그 청나라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였다. 따라서 그것은 고종의 의사에 부합했다.

김옥균의 회고록인 <갑신일록>에 따르면, 정변 직전 고종은 향후 발생할 일들을 김옥균에게 위임한다는 언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김옥균에게 정변 자금으로 쓰라며 어음까지 제공했다. 또 김옥균이 거사를 일으키자마자 이것을 신속히 승인해줬다. 그러다 거사가 실패하자 모든 책임을 김옥균에게 떠넘기고 김옥균을 역적으로 규정했다.

정변이 끝난 뒤 고종은 정변 개입 혐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더 김옥균을 비난하고 자신의 연루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례에서 잘 드러나듯이, 고종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남을 이용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사람이었다.

고종이 그러면서도 남한테 휘둘리지 않았다는 점은, 왕이 된 뒤 그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불행하게 됐는데도 유독 고종만큼은 항상 살아 남은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만약 고종이 남한테 이용만 당하는 사람이었다면, 조력자가 사라지는 순간에 고종도 사라졌어야 한다. 하지만 조력자가 사라져도 고종은 매번 살아남았고, 새로운 조력자가 나타나 고종을 보좌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을 대신해 10년간 국정을 총괄했지만, 결국 쫓겨나 불행해졌다. 김옥균은 고종의 뜻에 부합하는 정변을 일으켰지만, 거사가 실패한 뒤 역적으로 몰리다 중국에서 암살을 당했다. 명성황후는 지식과 수완을 바탕으로 고종을 도왔다가 일본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종만큼은 항상 살아남았다. 이것은 고종이 남을 이용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되, 남한테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조력자가 다 사라진 뒤 고종의 왕권이 극대화됐다는 점이다. 가장 가까운 조력자인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2년 뒤인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칭호를 사용했다. 이때가 고종의 정치적 전성기였다. 이것은 고종의 인생에서 몸통 역할을 한 것은 명성황후 같은 주변 인물이 아니라 고종 자신이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삼국간섭 직후 러시아를 끌어들인 주역도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은 이 점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래서 '명성황후를 시해하면 조선은 일본 것이 된다'는 판단 하에 을미사변을 감행했다. 일본의 판단이 오판이었다는 게 드러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을미사변 4개월 뒤인 1896년 2월, 고종은 일본의 감시 아래 있는 경복궁을 몰래 빠져나가 덕수궁 옆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겼다. 러시아의 보호를 받게 된 그는 내각에 포진한 친일파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리고 친러시아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힘입어 러시아가 합법적으로 조선 무대에 개입하자, 조선에서는 1876년 시장 개방(개항) 이래 처음으로 두 외세가 상호 견제하는 가운데 조선 군주의 위상이 강력해지는 초유의 상황이 조성되었다. 러·일의 세력 균형 속에서 고종의 왕권이 강해졌던 것이다. 어느 한 나라도 조선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에 고종은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런 구도에 힘입어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 칭호를 얻었다. 따라서 을미사변 이후 벌어진 것은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고종의 왕권이 강해졌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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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11월 11일 오전 중국 베이징 외곽 옌치후에 자리잡은 ‘국가회의센터’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개회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회의장에 도착,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일본은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의 몸통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명성황후가 아니라 고종이 몸통이었다. 그래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에도 조선의 친러 정책이 계속 추진돼 러·일 세력균형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세력 균형은 1896년에서 1898년까지 유지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조선 강점은 2년 더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이 세력 균형을 만들지 못했다면, 일본의 조선 강점은 1910년보다 몇 년 빨리 이뤄졌을 수도 있다.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 외교의 몸통을 정확히 파악해내지 못한 것이 조선 강점을 지연한 한 가지 요인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가 결과적으로 실패작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남의 나라 국모를 살해하는 정치적 부담을 감수한 것치고는 그리 큰 이익을 얻지 못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산케이> 기사는 객관적 본질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명성황후와 박 대통령을 '오버랩'하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산케이>가 '오버랩'하고자 한 명성황후와 박근혜 대통령의 사례는 역사적 맥락에서 봤을 때 객관적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산케이신문 #명성황후 #전승절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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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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