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덕분에 가을을 먹네"

여기저기서 가을이 오고 또 오고 있습니다

등록 2015.09.02 16:06수정 2015.09.0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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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 않아 황금물결이 출렁일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 전갑남


소문 없이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한낮의 열기는 뜨겁지만, 새벽엔 이불을 끌어 당깁니다.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참, 절기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처서가 지나고부터 더위가 한결 누그러졌습니다. 이제 늦더위가 물러가는 것은 시간 문제인 것 같습니다.


들녘도 하루 하루가 다릅니다. 나락 모가지가 쑤욱 올라오고, 색깔이 달라졌습니다. 누런 빛이 돌기 시작합니다. 들길 하천 변 부지런한 농부 손에 자란 수수는 알이 통통하게 여물어가고 있습니다.

어디 가을을 느끼는 것은 들판 뿐입니까? 이웃집 아저씨는 며칠 전부터 산에 가서 도토리를 줍습니다. 이른 알밤도 한 됫박을 주워 우리 집까지 인심이 닿습니다. 산에도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들에서 들리는 가을 소식이 산을 타고 올라가는 것 같습니다.

어느새 가을, 풍요로워지는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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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토란, 들깨, 서리태, 고추, 야콘, 고구마 등이 가을 들머리에서 씨를 맺고 열매를 튼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 전갑남


우리 텃밭에서도 가을을 느낍니다.

이른 아침, 아내와 나는 텃밭을 둘러 봅니다. '밤새 얼마나 자랐을까?', '뙤약볕에 시들시들한 것들이 다시 싱싱해졌을까?' 우리는 기대를 갖고 아침을 엽니다. 밤새 내린 이슬을 머금고, 작물도 잠에서 깨어난 듯 생기가 돕니다. 텃밭을 돌아보면 반갑고 신이 납니다.


서리태가 붉은 꽃을 피우고, 이른 녀석들은 꼬투리를 벌써 만듭니다. 사람 키 만큼 자란 들깨도 꽃 필 자리를 만드느라 부산합니다. 해가 짧아지면 어떻게 꽃을 피워 자손을 퍼트릴 생각을 할까요? 시원찮게 크던 토란도 제법 키가 컸습니다. 키다리 토란이 가뭄에 목말라 지난해만 못합니다.

네물고추를 딴 고추밭은 많이 늙었습니다. 수확의 기쁨을 주고, 이젠 늙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 동네 고추밭은 내남없이 시원찮습니다. 심한 가뭄에 시달리면서도 뿌리를 내리고, 그나마 수월찮은 풍성함을 안겨줘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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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배, 포도, 감, 모과, 대추 등이 결실을 앞두고 열매가 통통해졌습니다. ⓒ 전갑남


쉼 없이 넝쿨을 뻗은 고구마밭은 기세가 등등합니다. 아내는 '풀 반 고구마줄기 반'이라고 게으름을 탓합니다. 그래도 고구마가 풀은 이긴 것 같아 다행입니다. 고구마 밭고랑에 팥을 심었는데, 줄기 위로 고개를 쳐들어 꽃이 맺혀 있습니다. 함께 자라난 게 신통방통합니다. 한 고랑 심은 야콘도 수확을 앞두고 있습니다.

주먹만 하게 커진 사과는 달린 무게를 지탱하느라 가지가 휘어집니다. 빨간색 물이 들었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대추나무, 감나무도 가을을 반깁니다. 울퉁불퉁 못생긴 모과 열매도 탐스럽습니다.

고구마 밭고랑을 지나 배나무가 있는 데로 왔습니다. 누런 봉지 속의 배를 만져본 아내가 놀랍니다.

"여보, 배가 살이 통통해졌어요!"
"그래? 올핸 많이 달린 것 같아!"
"엄청나네요. 작년엔 시원찮던데, 해거리를 하는 모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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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를 옮겨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땅맛을 본 듯 많이 자랐습니다. ⓒ 전갑남

"그러게 말이야. 배는 그렇고, 포도 한 송이 따 볼까!"
"포도가 벌써 익었을까요?"
"그럼, 벌써 까맣던데! 이맘 때 포도 나올 때잖아!"
"그럼, 한 봉지 따 봐요!"

묵직한 것으로 하나 골라 전자 가위로 땄습니다. 흰 봉지 속의 포도송이가 궁금합니다. 아내는 건네 준 포도봉지를 무척 조심스레 벗깁니다. 토실 토실 보라 색깔의 포도 알갱이가 탐스럽습니다.

아내는 한 알을 따서 입에 넣으며, 수다스럽게 말이 많습니다.

"와! 이렇게 달까? 포도가 맛있게 익었어요. 시큼하지만 맛이 들었어! 당신, 올해는 몇 봉지 씌웠죠? 한 300봉지? 아무튼 올 가을엔 포도 먹느라 이가 보라색으로 물들겠네!"

아내가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나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가을 김장무를 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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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밭이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솎아줘야 잘 자랍니다. ⓒ 전갑남


가을을 느끼는 하이라이트는 김장밭입니다. 말복 전, 나는 배추씨를 파종하였습니다. 포트에 깨알 같은 배추씨를 한 알 한 알 넣었습니다. 씨를 넣은 지 나흘 만에 떡잎이 나오고, 스무날 가까이 가꿨습니다. 옮겨 심은 지 일주일이 남짓 되었는데, 벌써 땅맛을 본 것 같습니다. 제법 의젓하게 자랐습니다.

무씨는 본 밭에 직접 뿌렸습니다. 올핸 김장무, 강화순무, 이웃집 아주머니가 씨를 구해온 청피홍무, 총각무를 심었습니다. 시차를 두고 뿌려, 총각무는 막내입니다. 아내는 무 밭을 보더니 일감을 찾은 듯 말을 꺼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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솎아낸 무밭이 한결 많이 자랐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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솎아낸 열무, 우리가 거둔 것이라 소중합니다. ⓒ 전갑남


"여보, 언제 이렇게 컸죠? 우리 무 솎아야겠어요. 지금 열무김치 담그면 딱 좋겠네!"

그렇습니다. 작물 자라는 것을 보면 하루가 소중합니다. 무는 씨 뿌리고 3주 조금 되었는데, 벌써 솎을 때가 된 것입니다.

무 밑에 숨어 자란 잡초가 먼저 뽑힙니다. 벌레 먹고 보잘 것 없는 것을 솎아냅니다. 삐딱하게 자리 잡은 놈도 선택받지 못합니다. 튼튼하고 모양 좋은 것들도 간격을 고려하여 뽑혀나가는 수가 있습니다. 줄을 잘못 선 안타까운 녀석들입니다. 서로 엉겨서 싸우면 부실할 수밖에 없어, 어느 녀석은 아깝지만 사람 손에 들립니다.

너희들, 이제 싸우지 말고 잘 자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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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양념으로 맛있는 열무김치로 탄생하였습니다. ⓒ 전갑남


한참 무를 솎다가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무를 솎아내는 원리는 뭘까?"

생뚱맞은 내 물음에 아내는 '무슨 답을 듣고 싶어서일까?'하고 머뭇머뭇합니다. 그러다 이내 말합니다.

"선택과 집중, 그거 아네요! 서로 싸우지 말라고!"

아내는 내가 말하고자하는 속내를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쉽게 대답이 나오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작물을 재배할 때, 기본 원리는 경쟁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다닥다닥 너무 배게 자라면 서로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솎아줘야 합니다.

잡초를 뽑는 일은 선택한 작물이 풀과 경쟁에서 이기라고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모를 부어 내는 것도, 또 배게 자란 열매나 어린 싹을 솎아내는 것도 선택받은 것들이 제구실을 잘하라는 것입니다. 잘 자라도록 배려하고 도와줘야 튼튼하게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경쟁하고 싸워 부실하게 자라나서 모두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작물을 키우는 원리와 사람 사는 세상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경쟁하며 싸워서 이기려고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 남습니다. 경제논리는 더욱 그렇습니다. 상대보다 앞서야 이깁니다. 정의로운 경쟁은 뒷전이고, 반칙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순위 매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른바 줄 세우기를 하지요. 그리고 뒤쳐진 성과에는 채찍을 가합니다. 결과에 집착하다가 과정을 등한시하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했어도 결과가 나쁘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합니다. 최고보다는 최선이라는 덕목이 더 중요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경쟁 사회가 안타까움을 주는 일이 많습니다.

아내와 도란도란 무를 솎다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무밭이 시원해졌습니다. 서로 엉겨 답답하게 크다가 사이가 띄워지니까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습니다. 흙 속의 양분도 나눠먹고, 이젠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무를 솎아내고 북주기를 하였습니다. 듬성듬성 난 잡초를 뽑고, 호미로 흙을 살살 긁어 뿌리 근처로 밀어줍니다. 무가 곧추 섭니다. 북돋아준 손길에 밑이 실한 무로 자랄 것을 기대해봅니다.

솎아낸 무가 수월찮습니다. 아내는 다듬어 씻고, 절여 다시 씻고, 갖은 양념을 하여 열무김치를 담습니다.

김치 담그는 일이 만만찮습니다. 아내는 힘든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애써 가꿔 담근 김치인지라 표정만큼은 밝습니다. 아내의 수고에 한마디 하였습니다.

"김치가 아주 연하고, 참 맛깔스러워. 당신 손맛과 애씀으로 우린 벌써 가을을 먹네!"
#가을 #가을 작물 #가을 과일 #열무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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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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