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귀농부부 전과자 사건의 잔혹한 전말

괘씸죄 기소로 6년간 재판 3건... 항소심 '무죄', 검찰은 상고

등록 2015.09.03 10:17수정 2015.09.0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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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6일이었다. 장준하 선생님의 40주기 추모제를 하루 앞둔 그날 밤, 나는 '충주 귀농 부부 전과자 사건' 피해자로 알려진 박철씨 부부와 마주했다. 파주 장준하 공원에서 개최되는 40주기 추모제에 참석하고 싶어 부부가 함께 충주에서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난 자리였다.

오후 10시에 시작된 술 자리는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이어졌다. 그러면서 다시 듣게 된 그들 부부의 사연은 연거푸 술잔을 들게 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는 말이 있다. 나는 처음 박씨 부부의 사연을 접하고 정말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충주 귀농부부 전과자 사건'의 잔혹한 전말. 시간은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9년으로 돌아간다.

귀농의 꿈 박살 낸 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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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발생 당일 무리한 음주단속에 항의하며 실갱이중인 박철씨와 경찰관. 적법한 업무냐는 항변에 경찰관은 반말과 고함으로 응대했다. 노란 티를 입은 사람은 박씨의 아들. ⓒ 박철


내가 처음 이들 부부의 사연을 알게된 때는 2014년 9월이었다. 내 페이스북 메시지로 낯선 노크가 들어왔다. 남자는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한 번만 읽어달라고 청했다. 인권운동을 하며 평소에도 자주 겪던 일이라 내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이곳으로 자료를 보내달라고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휴대전화를 통해 메일 도착 알림이 들어왔다. 처음부터 큰 관심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저 그런 사건 중 하나가 아닐까 했다. 하지만 보내온 자료를 읽어가던 내 심장에 불꽃이 일었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시작, 2009년 6월 27일이었다.

당시 40대 중후반이었던 박씨는 충주의 한적한 마을로 이주한 귀농 1년 차였다. 서울에서 큰 가구점을 운영하던 박씨는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고 싶어 유치원 교육 공무원인 아내 최옥자씨를 설득해 귀농했다. 사건이 발생한 날은 부부동반 친목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한다. 술자리를 겸한 식사를 마친 후 박씨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동승해 귀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고3이었던 아들도 마침 학교에서 자율학습이 끝났다고 해서 부부는 아들을 데리고 귀가하고자 시내로 진입한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약속한 장소에서 아들을 찾고자 차를 서행하던 그때, 가로등도 없는 컴컴한 인도에서 2명의 남자가 박씨의 차량 앞으로 뛰어들었다. 당연히 부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음주운전을 단속하던 경찰관들이었다. 경찰관 한 명은 차량 전면부에, 다른 한 명은 차량 운전석 쪽으로 다가섰고 운전자인 박씨의 아내 최씨에게 음주 측정을 요구했다.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했지만 최씨는 침착하게 음주 측정에 응했고 당연히 결과는 '음주 무반응'으로 나왔다.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보조석에 앉아 있던 박씨는 화가 났다. 경찰의 행동이 너무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음주 단속도 좋지만 이처럼 무례한 방식으로 단속을 하는 것이 너무도 불쾌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경찰이 이런식의 음주단속을 했다는 이야기를 이전엔 들어본 적이 없다.

박씨는 순간 치미는 화를 누르지 못했다. 결국 욕설과 함께 "경찰이 이따위로 업무를 하는 것이 어디 있냐"는 항변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박씨에게 거친 항변을 들은 경찰관들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추가로 두 명의 경찰관이 현장에 도착했다. 잠시 후 박씨에게 욕설을 들은 경찰관 한 명이 박씨가 앉아있는 보조석 차 문을 열었다. 박씨의 주장에 의하면 경찰관은 "지금 뭐라고 했냐"며 자신의 귀와 목덜미를 잡아 차 밖으로 끌어냈다고 한다.

끌려 나온 박씨와 경찰 사이에서 본격적인 말싸움이 시작됐다.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어 음주단속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경찰 업무냐"라고 항의하는 박씨에게 경찰은 "뭐가 문제냐"라면서 반말과 고함으로 응대했다. 이러한 과정을 한 경찰관이 전부 비디오로 촬영하고 있을 때였다.

다시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경찰복을 입고 있는 것이 한심스럽다"며 마치 경찰만 아니라면 박씨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식의 자극적 표현을 쓰던 경찰관이 박씨를 향해 다가왔을 때였다. 박씨와 마주 섰던 경찰관이 순간 자신의 한쪽 팔을 하늘로 추어올리며 몸을 비틀거리는 것 아닌가.

왜 그랬을까. 문제의 경찰은 자신이 박씨에게 다가선 순간, 박씨가 자신의 오른 팔목을 뒤로 비틀어 꺾었다고 주장했다. 과연 사실일까.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당시 상황을 비디오로 촬영하고 있었으니 그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일은 꼬였다. 공교롭게도 그 장면만 비디오에 촬영되지 않았다. 꼬이고 꼬이는 사달의 시작이었다.

한편, 경찰들은 그때만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박씨를 공무집행 방해 사범으로 체포한다. 박씨의 항변에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경찰관들은 "너 잘 걸렸다"는 식으로 박씨를 사정없이 도로 바닥에 눕혀 제압한 후 손을 뒤로 해 수갑을 채웠다.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박씨의 아내가 경찰관들에게 애원했다. "남편이 저와 부부싸움을 해서 화가 나 그런 것이니 한번만 봐 달라"며 거듭 사정했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아내는 사정과 읍소를 반복했다. 하지만 비디오에서 확인되는 경찰관의 답은 무서웠다.

"아줌마. 아줌마도 체포할 수 있어요. 공무집행 방해예요. 가족이 다 다치고 싶어요?"

세 번의 재판, 두 번의 유죄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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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건으로 부부가 세번 기소되어 판결받은 사건. ⓒ 뉴스타파


결국 박씨는 애원하는 아내와 고3 아들이 보는 앞에서 땅에 뭉개진 채 경찰에 체포됐다. 경찰의 무례한 음주 단속에 항변했다가 그야말로 철저히 뭉개져서 수갑을 찬 것이다. 나는 이 체포 과정의 동영상을 수십 번 되돌려 봤다. 내가 봤을 때 이날 경찰이 한 행위는 정당한 공무수행으로 볼 수 없다. 특히 남편의 체포 상황 앞에서 사정하는 그의 부인에게 경찰관이 행한 발언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고 했다. 그날 경찰이 보인 행위는 '눈물'이 아니라 독기였다.

또한 미성년자인 고3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은 그 아버지의 명예와 인격권을 처참하게 깔아뭉갰다. 나는 정말 해당 경찰관에게 묻고 싶다. 자식 앞에서 그 아버지를 그처럼 처참하게 짓밟으며 체포한 것이 존엄한 공권력의 위상을 바로 세운 행위라고 믿는지. 결국 그날의 상처는 당시 고3 아들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으로 남았다.

아들은 아버지를 지켜드리지 못한 죄책감으로 이후 심각한 정서적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어느 날부터 아들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남지 않을 때까지 아들의 고통은 지속됐다고 한다. 아버지의 처참한 체포 과정을 무력하게 지켜본 그 아들의 고통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부터 더욱 기가 막히게 전개된다. 박씨는 이후 연행된 경찰에서 "나는 경찰관의 팔을 꺾은 사실이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경찰의 무리한 음주 단속에 화가 나서 욕설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팔을 비튼 적이 없다며 그는 일관되게 주장했다. 하지만 박씨의 억울함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하고 두 달여가 지나가던 2009년 8월 27일, 검찰은 박씨에게 벌금 200만 원의 약식 처분 명령을 내렸다. 피해자인 경찰관 주장처럼 박씨가 경찰의 팔을 비틀어 꺾었다는 것이다.

박씨는 정말 억울했다. 갑자기 차도로 뛰어든 경찰관에게 '순간 욱하여' 욕한 것이 죄라며 벌금형 처분을 내렸다면 박씨는 인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하지도 않은 행위로 벌금형 처분을 받은 것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랬다. 만약 이때 이전의 누구처럼, 박씨 역시 억울하지만 그냥 벌금 내고 '침 한번 뱉어 버리고 말았다면' 이전에 있었던 그 숱한 공무집행 방해 사건 중 하나로 그냥 끝났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내려진 억울한 처분을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청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더 큰 불행의 수렁으로 빠지는 본격적인 길이 될 줄은 박씨도 그때 몰랐다. 이후 최근까지 이어지는 6년간의 소송, 부부가 차례로 법정에 서는 세 번의 재판, 그리고 이어진 유죄와 유죄. 사실상 같은 사건으로 남편은 두 번, 또 그 아내 역시 기소돼 공무원에서 파면되는 결과로 이어질 줄이야 누가 상상했을까. 그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이었다.

박씨 "나는 팔을 비틀지 않았다"

정식 재판을 청구하고 1심 판결의 선고가 내려진 때는 이 사건 발생 근 1년이 돼 가던 2010년 6월 23일이었다. 이날 박씨는 정식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는다. 재판부는 "경찰관의 팔을 비틀지 않았다"라는 박씨의 주장을 배척하고 약식 처분과 똑같은 벌금 200만 원을 선고한다. 박씨는 좌절했다. 적어도 법원은 경찰·검찰과 다를 것이라고 믿었는데 역시나 자신의 주장을 검증조차 하지 않은 채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이었다. 박씨의 주장은 간결하다. '동작 감정'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정말 그 위치에서 내가 경찰관의 팔을 비틀 수 있는지 과학적인 검증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1심 재판부는 박씨의 요구를 거부하고 유죄를 선고했다. 억울했다. 결국 박씨는 항소한다. 1심 결과에 불복한 후 이 사건의 진실을 끝까지 밝히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 박씨는 항소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 법치 국가임을 믿었기에 박씨는 항소와 상고를 선택했지만, 그 믿음이 불어온 후폭풍은 이전의 고통과 수준이 다른 일이었다. 시작은 박씨의 항소심 첫 공판에서 부터였다.

박씨는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찰관을 다시 증인으로 채택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자 재판장이 새로운 제안을 하고 나섰다. "바쁜 경찰관을 두 번 부를 수는 없으니, 그럼 현장에 같이 있던 피고인의 부인을 부르자"는 제안이었다.  

법 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재판장의 제안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재판에서 가족을 증인으로 세우는 것은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가족이 가족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제안을 재판장이 먼저 하니 박씨는 오히려 당황했다. 그래서 박씨가 되물었다. "자신과 부부 사이인 아내의 증언을 믿겠냐"는 반문이었다. 그러자 재판장은 "한 번 들어나 보겠으니 다음 공판에 같이 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박씨 아내 "내 남편은 팔을 비틀지 않았다"

그날 박씨는 내심 재판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찰관은 지난 1심에서 동료 경찰관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동료 경찰관은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찰관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이는 박씨의 유죄 증거가 됐다.

반면 박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할 증거가 없었다. 현장에는 아내와 아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말을 재판부가 받아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그 아내를 재판장이 먼저 증인으로 채택해주니 이는 재판장이 자신의 억울함에 귀를 기울여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날, 박씨의 아내는 그 재판에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것은 엄청난 함정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2010년 10월 18일, 아내가 재판에서 증인 심문을 마치고 난 후였다.

이날 법정에서 박씨의 아내는 "남편의 주장은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남편이 경찰관의 팔을 꺾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그런데도 경찰관이 덤블링하듯 땅바닥에 뒹굴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를 본 남편이 "이런 쇼까지 하느냐?"며 현장에서 소리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다가온 2010년 11월 4일, 박씨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다렸던 항소심 선고일에 법정을 찾았다. 아내의 증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했으니 1심과 다른 결론이 내려질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박씨의 기대와 달리 재판부는 박씨의 항소를 또 기각했다. 더 놀라운 것은 유죄 선고를 내린 1심과 그 내용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박씨가 기대했던 아내의 증언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단 한 자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할 것인데 왜 항소심 재판부는 박씨의 아내를 증인으로 채택한 것일까. 더구나 재판장이 "들어나 보겠다"며 먼저 증인 채택을 제안하고도 왜 그 증언에 대해서는 사실인지 아닌지도 언급하지 않은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박씨 입장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 그 궁금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항소심 판결이 내려지고 두 달여가 지나가던 2010년 12월 28일이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던 그때, 박씨의 집으로 한 통의 등기 우편물이 도착했다. 그리고 뜯어본 우편물 안에는 박씨의 아내 '최옥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번엔 박씨의 아내가 '괘씸죄' 표적이 된 것이다.

이번엔 박씨의 아내, 무서운 '괘씸죄'?

마지막으로 대법원 상고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박씨의 집에 배달된 한 통의 편지. 발신처는 지방 검찰청이었다. 그리고 우편물에는 박씨의 아내 최옥자씨에게 '재판에서 위증한 혐의'로 출석하라는 소환장이 담겨 있었다. 피의자 신분이었다.

최옥자씨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평범한 교육 공무원이었다. 그러다가 귀농을 결심한 남편을 따라 충주로 내려왔다. 내가 만난 최씨는 지극히 평범하고 마음씨 착한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날 사건으로 시작된 검찰의 '괘씸죄'가 이번엔 부인을 정조준한 것이다. 등기 우편물을 받은 최씨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남편 박씨가 제기한 대법원 상고심이 2011년 1월 27일 재판에서 최종 기각 판결된 후, 최옥자씨 사건을 담당하던 재판부는 검찰이 위증죄 기소한 최옥자씨에게 1심 선고를 내린다. 결과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사회봉사 120시간이었다. 때는 2011년 4월 28일이었다.

최옥자씨 사건 1심 재판부는 그녀가 남편의 재판에서 행한 모든 증언이 전부 위증이라고 판단했다. 남편이 팔을 비트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말도, 또 넘어진 경찰관에게 남편이 "이런 쇼까지 하느냐?"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도 전부 위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최옥자씨에게 내려진 이날 집행유예 선고는 일반인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의미가 있었다. 바로 최옥자씨가 교육 공무원이라는 점이었다. 공무원은 형사 사건 재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 직위에서 파면된다. 따라서 이날 최옥자씨에게 내려진 위증죄에 의한 집행유예 처분은 공무원 신분으로서는 사형과 다르지 않은 판결이었다.

실제로 1심 재판부는 최옥자씨의 공무원 직위 파면을 겨냥했음을 판결문에 담았다. 재판부는 최옥자씨에 대해 "자신의 기억에 반하는 허위의 증언로 법원의 진실 발견을 위한 심리를 방해했다"면서 "이러한 행위가 국가의 사법 작용 혼란과 불신을 초래할 위험을 발생시켰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다음 문장이 이어졌다.

"그런데도 박씨 아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는 점, 그리고 피고인이 유치원생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쳐야 할 유치원 교사로서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범행을 저지른 점 등에 비추어 그 죄질이 불량하나, 피고인이 초범이며 피고인의 남편을 위해 위증한 점을 참작하여 사회 봉사를 조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1심 판결문에 적힌 이 글귀는 박씨의 부인에게 흉기가 돼 그대로 가슴에 박혔다. 그런데 그날부터였다고 한다. 사실 박씨의 아내는 이 사건 발생 후 매일같이 남편과 싸웠다고 한다. 도대체 왜 이 지경까지 일을 만들었냐며 남편을 원망하고, 또 미워했다고 한다.

대입을 준비하는 고3 아들의 정신적 고통을 지켜보면서, 또 검찰과 법원이 보내오는 우편물이 집에 쌓이면서 법정으로, 검찰청으로 매일처럼 불려다니는 자신과 남편의 처지 앞에서 어찌 마냥 웃을 수 있을까. 최옥자씨는 "매일같이 부부싸움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회고했다.

그런데 바로 이날부터 부부싸움을 멈췄다고 한다. 자신이 위증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날부터 최옥자씨는 오히려 남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편 심정이 바로 이랬구나" 싶었다는 것이다. "우리밖에 우리를 위해 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부부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쳤다.

한편, 박씨의 아내는 결국 1심의 선고를 끝내 뒤집지 못했다. 항소심과 대법원까지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국 2012년 12월 27일 최옥자씨는 공무원 직위에서 파면 처분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끝은 끝이 아니었다. 검찰은 집요했다. 이번엔 남편 박씨가 표적이 됐다.

아들의 탄원서까지... 정말 집요한 검찰

부부가 모두 전과자가 됐으니 이렇게 끝나나 싶었던 그때, 검찰의 '괘씸죄'는 참 집요했다. 그렇게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1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최옥자씨는 당연히 항소했다. 공무원 파면 처분만은 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한 결론이 있었다. 남편 박씨를 항소심 증인으로 채택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구한 것이다. 얼핏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라고 증언한 죄로 재판받는 마당에 이번엔 그 남편을 또 증인으로 세우는 것은 도발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부부에게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누구도 자신들의 억울함을 증명해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현장에 있던 이들은 모두 경찰관이었다. 그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니 무모하지만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무죄를 증언해 줄 남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유일한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를 항소심 재판부는 또 수용한다. 검찰 역시 동의했다. 결국 증인으로 채택된 것이다.

2012년 5월 7일, 남편 박씨는 아내의 항소심 재판에서 증언대에 섰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박씨는 "나와 내 아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라며 거듭 재판부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후 박씨가 법정에서 증언을 마치고 귀가하던 때였다. 박씨의 휴대전화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검찰청이었다. 그리고 듣게 된 말. "방금 전 재판에서 증언한 내용이 위증이니 다시 피의자로 출석해 조사받으라"는 연락이었다. 재판정에서 나온 지 불과 3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고 한다.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진짜 경악할 일은 따로 있었다. 2012년 5월 11일, 결국 박씨가 다시 위증죄로 검찰청에 불려간 날이었다. 이날 박씨는 검찰 조사 도중 정말 끔찍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검찰이 박씨 가족 중 또 한 명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 함께 있었던 또 한 명의 목격자, 즉 당시 고3이었던 아들이었다.

경위는 이랬다.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까지 연이어 피고인이 돼 재판을 받자 아들은 말할 수 없는 심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자신의 눈 앞에서 땅바닥에 깔린 채 수갑이 채워지던 아버지를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던 죄책감과 어머니마저 위증죄로 피고인이 되는 상황에서 어느 자식이 괴롭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 사건을 담당하던 1심 재판장에게 한 통의 탄원서를 보낸다.

검찰이 문제 삼은 것은 바로 그 탄원서였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우리 어머니의 주장을 살펴봐달라'는 탄원서를 낸 아들 역시 문제 삼을 수 있다는 취지의 경고였던 것이다. 나는 박씨가 전하는 말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털썩 주저앉는 심정이 들었다. 이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사실상 같은 사건으로 두 번 기소된 피고인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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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0일, 박철씨가 처음 고상만의 이메일로 자신의 사연을 보냈다. 그의 사연을 읽으며 나는 손이 부들 부들 떨렸다. ⓒ 고상만


결국 박씨는 사실상 같은 사건으로 두 번째, 가족으로서는 세 번째 사건의 피고인이 돼 재판정에 섰다. 그때가 2012년 7월 27일. 앞서 재판에서는 혐의는 '공무집행 방해'였지만 이번에는 '위증죄'였다. 그리고 2013년 1월 3일 열린 1심 첫 재판날, 박씨는 재판부에 국과수 감정을 요구한다. 이 모든 재판의 출발이었던 '경찰관의 팔을 비틀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동작 감정을 해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국과수로부터 돌아온 회신은 실망스러웠다. 감정을 할 수 없다는 답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영화 <부러진 화살>의 실제 모델인 박훈 변호사였다. 박씨는 박훈 변호사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다행히 박훈 변호사는 이같은 박씨의 호소에 화답한다. 검증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본 것이다. 2009년 6월에 시작된 첫 재판 이후 이미 4년의 시간이 지나간 2013년의 일이었다.

다시 해가 바뀐 2014년 4월 18일, 박씨의 위증죄 1심 판결이 내려졌다. 이날 박씨는 또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재판 과정에서 이전과 다른 사실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중에 가장 특별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찰이 증거로 삼은 현장 동영상 원본이 전부 폐기됐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검찰이 공소 사실 중 '박씨가 경찰관의 오른팔을 잡아 뒤로 비틀었다'는 것에서 '뒤로'라는 단어를 삭제했다는 점이다.

이는 물리적으로 박씨가 경찰관의 오른팔을 비틀 수 없다는 사실을 검찰도 일부 인정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즉, '팔을 비틀지 않았다'는 박씨의 주장이 사실일 수 있다는 강력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내려진 결과는 '역시나'였다. 2014년 4월 18일에 있었던 1심 선고에서 박씨는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는다. 이는 10일 전에 있었던 벌금 300만 원 검찰 구형보다 더 많은 액수였다. 이어진 재판부의 양형 이유는 더욱 기가 막혔다.

"피고인이 장기간 범행을 부인하면서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은 점, 그리고 부부가 이 사건으로 이미 유죄 처벌을 받았으며, 해당 경찰관이 여러 차례 수사기관이나 법정에 진술하기 위해 출석하면서 공무수행에 어려움을 겪어 엄벌할 필요성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번의 항소심이었다. 박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많은 이들이 알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호소하고 싶었다. 그래서 많은 곳에 연락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국민라디오에서 팟캐스트 '고상만의 수사반장'이었다고 한다. 2014년 9월의 어느날, 내가 박씨에게 연락을 받은 날이었다.

무죄면 전화로, 유죄면 문자로....

고백하자면, 너무도 황당한 박씨의 말을 나는 전부 믿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사례였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인권운동을 하며 공권력 남용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들었지만 이런 유형의 사건은 나 역시 처음이었다. 더구나 한 사건으로 부부가 각각 기소돼 세 번에 걸친 재판을 받는 사건은 믿을 수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판결문을 입수해 확인한 결과 박씨의 호소는 모두 사실이었고,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냥 지켜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역시 많은 이들에게 이들 부부의 억울함을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사람이 <뉴스타파> 송원근 PD였다. 나는 이 사건 전말과 자료를 전하며 박철씨가 원하는 '동작 감정'을 방송사가 검증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상처럼 <뉴스타파> 측은 호의적이었다. <뉴스타파>는 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사건 당시의 조건을 분석해냈다. 이후 2014년 12월 이러한 내용을 담은 방송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나 역시 '고상만의 수사반장'을 통해 이 사건을 다뤘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공권력의 괘씸죄를 고발했다. 이를 통해 충주에서 살던 한 평범한 부부가 어떻게 고통받았는지 알리려 했고, 많은 분들이 함께해 줄 것을 호소했다. 다행히 방송이 나간 뒤 돌아온 반응은 뜨거웠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반가운 소식은 '고상만의 수사반장'이 방송되고 내 휴대전화에 도착한 한 통의 문자였다. 이 사건의 주인공, 박철씨가 보내온 문자였다.

"처음 조사관님의 전화를 받고서 이틀 밤을 깊이 잤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아내가 깊이 잠든 모습을 보고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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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9일 세번째 기소사건 항소심 무죄 판결문. 박철씨에게 1심 유죄 선고가 파기된 후 무죄가 내려졌다. ⓒ 고상만


왈칵 눈물이 났다. 지금까지 고립돼 고통받았던 이들 부부에게 자그마한 위로라도 됐다는 말이 무척 고마웠다. 더불어 이런 과정을 통해 사건의 외면당했던 진실이 드러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8월 17일 오전 2시, 나는 박철씨 부부와 술자리를 마치면서 한 가지 당부를 했다. 세 번째 재판의 항소심 선고일인 8월 19일, 그러니까 이틀 후 선고에서 무죄를 받으면 전화로, 그게 아니면 문자로 소식을 알려달라고 청했다. 또다시 유죄가 내려졌다는 말을 육성으로 들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다. 내가 이럴진대, 당사자인 박철씨 부부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무려 6년을 끌어온 이 사건의 대단원.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8월 19일.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낮 1시 57분. 내 전화기에 박철씨의 이름이 떴다. 그것은 '전화벨'이었다.

"반장님. 고맙습니다. 무죄입니다. 무죄."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우리는 서로 만세를 불렀다. 만 6년에 걸친 박철씨 부부의 진실이 마침내 이긴 것이다. 박철씨가 무죄를 받을 수 있었던 건, 사건 당시 찍은 어두운 동영상을 밝게 조절한 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다른 모습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박씨에 의해 팔이 꺾였다고 주장하는 경찰이 쓰러질 듯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박씨는 허리를 똑바로 세운 채 다른 경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에 세 번째 사건의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박씨)이 박 경사의 팔을 잡아 비틀거나 한 일이 없음에도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인가 박 경사가 그와 같은 폭행을 당한 것처럼 행동한 것으로 볼 여지가 높다"고 판시했다.

피해자 자처하는 경찰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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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재판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고 난 후. 부부의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 보인다.(최옥자씨의 페이스북 사진) ⓒ 박철


박철씨 부부가 겪은 지난 6년의 고통은 그야말로 끔찍했고, 여전히 끔찍하다. 귀농 전까지 안산에서 큰 가구점 사장이었던 박철씨는 이후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해야 했다. 유치원 교사였던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무원 파면 후 최옥자씨는 골판지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고, 지금은 화장품 공장에서 일한다. 귀농의 꿈은 그날로부터 철저히 깨졌다. 남은 것은 고통과 상처뿐인 6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무죄가 내려진 항소심 재판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피해자를 자처한 경찰관을 상대로 항소심 재판장이 묻는 과정에서였다. 이날 재판장은 증인으로 출석한 피해자 자처 경찰관에게 "공무집행 방해로 입건되는 사람이 많으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쏟아졌다고 한다. 자신이 한 달에 평균 입건하는 사건만 6~7건 정도 된다는 답이었다. 이를 단순 계산하면 1년에 72건, 6년이면 432건이었다. 피해자를 자처하는 경찰관이 그처럼 입건해온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박철씨였던 것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지만 박철씨의 고통은 여전히 끝나지 않고 있다. 지난 8월 28일 박철씨가 남긴 페이스북 글은, 그래서 더욱 가슴이 아팠다.

"19일 항소심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무죄를 받는 순간, 나는 한동안 멍하게 법정의 천정만 올려다보고 있다가 재판부를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왔다. 법정을 나오자마자 창원의 박훈 변호사님과 인권운동가 고상만 선생님께 전화로 기쁜 소식을 전하던 감격, 전화기를 울리던 두 분의 만세 소리가 지금도 또렷하다.

하지만 상고 기한 마지막 날의 밤에 검찰이 상고장을 접수함으로써 사건은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게 됐다. 또 지루한 기다림과 불안한 날들이 시작됐지만, 만 6년을 버텨온 질김으로 또 버텨낼 것이다."

검찰이 이 사건을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다는 소식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들 부부의 고통은 계속돼야 하는가. 과연 이것이 '이 나라 법치의 눈물'인가.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함께해달라. 박철씨 부부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 달라. 누가 당하든 억울한 일이 아닌가. 권력을 쥔 자들의 횡포로 아직도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 이들 부부를 위해 이 나라 법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도와줄 것을 호소한다.

끝으로 나는 '충주 귀농 부부 전과자 사건'의 피해자, 박철씨와 그의 부인 최옥자씨에게 깊은 위로를 드린다. 힘내시라. 그리하여 반드시 대법원에서도 무죄를 받아내시라.

○ 편집ㅣ김지현 기자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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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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