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열 봉지, 스튜어디스의 친절이 슬펐다

[리뷰] 이상헌의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등록 2015.09.07 21:32수정 2015.09.0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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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도 더 지난 일이다. 일본 도쿄에서 일하는 사촌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물론 비행기를 탔다. 나는 비행기를 타면 되도록 맥주는 꼭 마시려고 한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 왠지 꼭 마셔야 할 것 같다.

그날도 나는 맥주를 맛나게 마시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 아마 스튜어디스 한 분이 내 옷에 뭘 흘렸는지 그랬던 것 같다. 별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냥 "괜찮아요"하고 맥주나 더 마셨다.


그런데 내게 뭔가를 흘린 스튜어디스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 자리로 오더니 땅콩 열 봉지쯤을 두 손에 안겨주는 게 아닌가. 짭조름한 맛이 맥주에 딱 어울리는 땅콩이라 탐이 났지만 차마 더 달라고 하지 못했던 건데 말이다. 나는 이 무슨 횡잰가 싶어 고맙게 덥석 받았다.

속으로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나의 쿨한 행동이 스튜어디스의 마음을 움직였구나 싶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이 아름다운 세상! 하지만 반면 그간 얼마나 까칠한 고객들을 많이 만났길래 이 정도에 이리 마음을 주나 싶어 마음이 안 좋기도 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내가 얼마나 쿨한 사람인지 자랑을 해야겠다 싶어 스튜어디스 친구에게 슬쩍 이 얘기를 꺼냈다.

"그렇게 해서 땅콩을 열 봉지나 받게 된 거야. 내가 좀 착하긴 한가 봐? 그게 통한 거 같지?"
"그건 아닐 거야."
"왜? 우리 마음이 통한 게 아니라구?"

"아니 귀찮아서 그랬을 거야. 앞에선 괜찮다고 말하고 뒤에서 컴플레인 거는 고객이 많아. 그래서 입막음용으로 준 거지. 너가 몰라서 그러는데 땅콩을 열 봉지나 줬다는 의미는 그 스튜어디스가 엄청 간절했다는 말이야. 땅콩이든 뭐든 수량이 얼마나 간당간당한데. 그걸 열 봉지나 준 거잖아. 너가 나중에 컴플레인 걸 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거겠지."


"야, 내가 얼마나 착하게 생겼는데. 너도 참."
"가장 요주의 인물이 한국 남녀 20~30대야. 전 세계에서 가장 까칠하고 대접 받길 좋아하는 고객이지."

"그래?"
"그래."
"컴플레인 걸리면 힘들어?"
"장난 아니지. 나도 컴플레인 걸릴까 봐 얼마나 가슴 졸이는데. 컴플레인이 한 번 걸리면 고객이 거짓말을 했든 안 했든 다 내 잘못이 되거든. 나 혼자 다 감당해야 하고. 나도 옛날에 한 번 걸려봤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어."

"짜증 난다. 회사가 왜 그러냐. 너 완전 힘들겠다. 그런데 그 스튜어디스분... 내가 정말 고마워서 그랬던 건 아닐까?"
"전혀. 고마운 사람에게 마음을 표시할 만큼의 여유가 우리한텐 없어. 우리는 나쁜 일이 벌이지지 않으면 그게 가장 고마운 거야."

친구의 말을 들은 나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그냥 내 식대로 행동했을 뿐이므로 내게 꼭 고마움을 표현하길 바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땅콩을 받았고 기분이 참 좋았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내게 땅콩을 준 이유가 내가 뒤에서 구린 행동을 할 가능성 때문에 그랬다니! 뭐가 그들을 맥주나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나 곡해하게 만들었던가,

고객은 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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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 생각의 힘

친구가 스튜어디스라 사정을 좀 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또 회사가 얼마나 야박하게 직원을 대하는 지도. 갑자기 이때의 일이 생각난 이유는 국제노동기구에서 일하고 있는 경제학자 이상헌의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를 읽어서였다. 책에서 이상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동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아 생활해 나가는 곳이다. 노동과 임금이 자발적 의사에 기초해 교환되는 노동 계약이 핵심이다. 자발성과 자유 때문에 노예 '계약'과 구분된다.

하지만 노동 계약에는 빈틈이 많다. 특정 액수를 받고 특정 시간 동안 일하기로 약속하는 게 일반적이라지만, 정작 어떻게 일할지는 애매하다. 실제로 이를 특정해서 계약서에 일일이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이를 '불완전 계약'이라 부른다. 노동 계약의 태생적 운명이다. 자유롭게 계약한 뒤 일터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불확실성의 공간이 열린다."(책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중에서)

이상헌은 이러한 노동 계약의 빈틈이 노동자에게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떻게 일할지"가 "애매"하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는 고용주가 원하는 방식에 맞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항의하는 고객을 달래기 위해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면 꿇을 수밖에 없는 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확장된다.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고객은 금세 자신이 왕이 된 것으로 착각한다. 노동자를 향해 삿대질을 하거나 욕지거리를 해도 왕인 고객은 전혀 죄책감이 없다. 왜 그런가. "고용 관계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은 고객에게도 홀대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로 삶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같은 사람인데 어느 순간에는 왕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에는 거지가 되는 것이다. 고객의 옷을 입으면 삿대질을 하다가, 노동자의 옷을 입으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유발한 것은 물론 기업이다. 하지만 이런 기업이 활개 치게 만든 것은 결국 우리 고객이다. 그래서 이상헌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우리 모두 힘을 모아 기업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불량 기업에 대해서만 불매 운동을 할 게 아니라, 직원에게 과잉 친절을 강요하는 기업도 거부하는 식으로 말이다. 둘은, 우리 모두 조금 불편해지자는 것이다. 어디 가서 왕대접받을 생각일랑 그만둬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은 왕이 아니다. 고객은 자신의 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사는 소비자일 뿐이다. 기업도 왕은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 서비스와 자본을 잘 버무려 이윤을 내고자 할 뿐이다. 고객도 기업도 노동자의 영혼을 요구할 권리도, 파괴할 권리도 없다. 기업이 존중하지 않은 노동은 고객도 존중하지 않는다."(<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중에서)

고객이 왕이 아니라는 생각이 널린 퍼진 사회를 상상해 본다. 고객과 노동자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비스를 주고받는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땅콩 열 봉지를 받았던 그 횡재의 순간을 떠올려 본다. 스튜어디스가 내게 뭔가를 흘린 그 상황도 되짚어본다.

앗,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아름다운 사회였다면 나는 땅콩 열 봉지를 결코 받지 못했을 것 같다. 스튜어디스는 나의 "괜찮아요"를 그 말 그대로 믿고 컴플레인 걱정 없이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럼, 나는 조금이라도 서운했을까? 전혀. 나는 그저 사촌 동생을 만날 생각에 들뜬 채 맥주나 계속 홀짝거리고 있었을 테지.
덧붙이는 글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이상헌/생각의힘/2015년 07월 27일/1만5천원)

개인블로그에 중복게재합니다.

우리는 조금 불편해져야 한다 - 국제노동기구(ILO) 이코노미스트 이상헌이 전하는 사람, 노동, 경제학의 풍경

이상헌 지음,
생각의힘, 2015


#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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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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