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자학사관' 보수 '자만사관'을 넘어서

[서평] 이병천 교수의 <한국 자본주의 모델> ①

등록 2015.09.15 14:13수정 2015.09.15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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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본주의 모델> 표지 ⓒ 책세상

대한민국은 성공한 역사?

이병천 교수가 <한국 자본주의 모델>(책세상, 2014)을 펴낸 까닭은 이승만에서 박근혜까지의 역사를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평가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함이다.

현재는 과거의 누적인 까닭에 과거에 대한 평가는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진단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진단은 대안 모색으로 이어진다. 부제를 통해서 다시 설명하면 진보의 '자학사관'과 보수의 '자만사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것이 저자의 목표다.

보수의 자만사관은 기승전결식 사관으로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까지 달성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성공의 역사로 보는 사관이다. 흥미로운 점은 출발이 식민지 시기다. 일제 식민지 시기는 수탈의 시기가 아니라 근대화의 기본을 학습했던 기간으로 본다. 그러니까 식민지 시기에 대한민국 발전의 밑거름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승만 정권기는 북한 공산정권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식민지 기간 동안 닦아 놓은 법과 제도적 기반 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확립한 시기다. 또한 박정희 정권기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토대 위에서 강력한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발휘해 공업화에 성공을 거둔 시기로 정리한다. 그리고 이런 공업화를 자양분 삼아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으로 자만사관은 완성된다(본문 101쪽).

자만사관의 입장에서 보면 일제에 적극적으로 부역한 사람들에게 '친일' 혹은 '반민족 행위'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곤란하다. 그들은 근대화의 기술을 가장 앞장서서 익힌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 정권의 양민학살과 부정부패, 그리고 선거부정은 북한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애국'으로 설명할 수 있고, 박정희의 개발독재는 민주화의 기반을 닦은 것임으로 윤리적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윤리적 책임을 물을라치면 '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유와 민주가 가능하겠냐'는 반문이 바로 돌아온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자만사관의 허점을 하나씩 들춰낸다. 자만사관은 '연속'에 주목하는데, 박정희 정권기의 공업화와 식민지 시기의 연속성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공업화의 주역이었던 현대를 비롯하여 삼성·LG 등 고도성장 시대 및 그 후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군이 일제 강점기부터 연속된 기업이 아닐 뿐더러, 심지어 이 주역들은 1954년 귀속재산 불하를 중요한 발전 토대로 삼았던 기업으로 보기도 어렵다. 요컨대 식민지 시기의 경험과 본격적인 공업화에는 큰 단절이 존재했다는 것이다(본문 141쪽).

그리고 이승만 정권기의 농지개혁과 교육기회의 균등화가 1960년대 이후 공업화에 큰 기여를 했는데, 이 두 가지 역시 식민지 시기의 유제를 극복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생산적 유착과 비생산적 유착

이승만 정권기에 확립했다고 하는 '자유 시장 경제'도 조금만 들여다보면 자유 시장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자유당 엘리트와 재벌 사이의 퇴행적 유착이다. 당시 재벌은 "원조 물자의 배정, 귀속재산(적산)의 불하, 환차익, 고관세와 수입 허가, 정부 구매, 저리 융자 등을 통해 재벌은 거의 공짜나 다를 바 없는 거대한 특혜"(본문 67쪽)를 누렸고, 반대급부인 정치자금을 자유당에 상납했으며, 그 정치자금은 선거부정과 정치공작에 쓰였다.

그러면 박정희 정권의 공업화를 어떻게 설명할까? 저자는 이 시기의 공업화의 원인을 성과 규율 체계에서 찾는다. 박정희 정권기를 "재벌 총수가 실질적 통제권을 갖도록 하고, 노동자로 하여금 이 소유-통제권에 복종하게 만들고, 국가가 금융을 장악해 재벌에 특혜 금융을 제공하고, 진입 장벽을 쌓아 특혜를 주고 경쟁을 제한하며, 이에 상응해 재벌이 실적을 내도록 국가가 규율을 강제하는"(본문 83쪽) 체제라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공업화를 이끌었다고 본다. 이승만 정권이 '비생산적 유착'이면, 박정희 정권은 '생산적 유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유착은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정치적 독재와 특권 대재벌의 과두지배 체제가 행사하는 독단과 결탁을 감시할 수 있는 기제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더구나 유신체제는 "사적 재벌의 투자와 경제적 성공에 정권의 명운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산업 정책의 수행 과정에서도 제대로 투자 조정 역할을 하지 못했"(본문 116쪽)고, 그것은 결국 중화학공업에 대한 중복·과잉 투자로 이어졌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은 재벌이 부실해지고 파산하면 막대한 구제 금융을 투입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국민들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혜는 재벌이 독차지 하고 거기에 드는 비용은 국민 일반이 감당한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정치경제학의 관점으로 한국현대사의 동학을 파악함으로써 진보가 자학으로만 일관할 필요가 없는 근거를 제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만사관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문제점들을 들춰내고 있다.

무능했던 민주정부, 대안의 방향

한국 자본주의는 재벌 육성을 통해서 성장해왔지만, 재벌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그러므로 민주화 이후에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재벌개혁이고, 그 역할의 담당자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에 국가는 전면적으로 후퇴해버렸고, 그 결과 재벌은 시장을 장악하게 되는데(본문 136쪽), 문제는 민주정부 10년 동안 이 추세가 역전되기는커녕 더 강화됐다는 점이다.

뼈 아프게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요란했던 재벌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거기에 더하여 정규직의 절반 정도의 임금 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절반에 가까운 것도 민주정부 하에서 일어난 일이다. 민주정부가 한 일이라곤 구조개혁이 아니라 왜곡된 경제구조의 피해자를 돌보는 복지 안전망 확충이었다.

그러나 확충된 복지 안전망도 미약한 수준인 까닭에 삶을 스스로 책임져야 할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은 살길을 찾아 가망 없는 자영업에 뛰어들거나 부동산과 주식 등의 재테크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것의 결과가 바로 가계부채 1130조 원이다. 민주정부는 한국경제가 앉고 있는 핵심문제를 해결하는데 철저하게 무능했다는 것이다.

이런 진단 하에 저자는 대안의 기본 틀로 민주적으로 통제된 조정 시장경제와 보편적 연대체제의 합을 제시한다(본문 255쪽). 여기서 민주적 통제의 대상은 재벌이고 보편적 연대체제는 복지강화를 의미한다.

한편 저자의 재벌개혁안은 제대로 된 주주자본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장하성·김상조 그룹과도, 스웨덴 모델을 염두에 둔 재벌과의 대타협을 제시하는 장하준·정승일 그룹과도 다르다.

이병천 교수는 이해관계자, 즉 채권자, 공급자, 노동자, 주주 등이 고루 참여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을 제안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역동적 발전이 필요한 우리 경제는, 재벌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이 허용되고 중소기업의 발전이 지체된 스웨덴이 아니라 덴마크나 독일을 벤치마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다음 기사 보러 가기)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국 자본주의 모델> 서평의 첫 번째 글입니다.
#이병천 #토지정의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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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자유연구소(landliberty.or.kr) 소장. 토지 불로소득을 완전히 환수하는 토지공개념과 기본소득, 그리고 통일을 염두에 둔 대안 국가모델에 관심을 갖고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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