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외버스 타고 헌책방에 다녀오다

[시골에서 헌책방 나들이] 경남 진주 <동훈서점>

등록 2015.09.15 11:59수정 2015.09.15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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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에서 삼천포시(사천시)로 갑니다. 삼천포에 있는 용산초등학교에서 이야기 마당이 있습니다. 자가용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흥에서 삼천포까지 그리 멀지 않습니다. 두 시간 남짓 달리면 될 테지요. 그러나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에서 순천을 거치고 진주를 돌아서 삼천포로 가자면 여섯 시간쯤 걸립니다.

서울에서 시골로 가는 길은 어디로든 잘 뚫립니다. 시골에서 서울로 가는 길도 어디에서나 잘 뚫립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시골로 가는 길은 어디나 한참 에돌아야 합니다. 아무래도 서울을 오가는 사람이나 서울에서 오가는 많을 테지만 시골을 찾아가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가용을 장만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이 없으니 거의 세 곱이나 되는 길을 멀리 에돌아야 합니다만, 시외버스를 타기 때문에 한결 느긋하게 버스에서 쉬거나 책을 읽습니다. 자가용을 달린다면 운전대를 잡을 테지만, 시외버스를 타기에 책을 잡거나 공책을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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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 ⓒ 최종규


순천을 거쳐 진주에 닿습니다. 고흥에서 새벽바람으로 길을 나선 터라 삼천포로 가기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넉넉히 남습니다. 바로 다른 시외버스를 탈 수 있지만, 한 시간쯤 진주에 있는 헌책방을 찾아가자고 생각합니다. 시외버스 역에서 남강 다리 쪽으로 갑니다.

남강 다리를 건넙니다. 그러면 다리가 끝나는 길 한쪽에 헌책방이 있어요. 남강을 마주 보는 헌책방 <동훈서점>입니다.

<동훈서점> 어귀에 조그마한 책이 겹겹이 있습니다. 겹겹이 있는 책이란 책 탑입니다. 책탑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제법 묵은 책이라 할 <기타무라 마소토시/김영덕 옮김-별의 물리>(전파과학사,1981)라는 책이 보입니다. 2010년대 책도 아닌 1980년대 번역인 책이지만 문득 손이 갑니다.

버스 타고 6시간, 헌책방에서 본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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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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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대훈문고서적 띠종이 ⓒ 최종규


두 별 중에서 밝은 쪽을 으뜸별, 어두운 쪽을 버금별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크기와는 관계가 없다. 버금별이 하나만 아니라 둘, 셋 또는 그 이상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른바 세 짝별, 네 짝별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119쪽)

꽤 낡은 책을 펼치는데, 간기 자리에 '대훈 문고 서적' 띠종이가 붙었어요. 대훈 문고 서적은 아마 진주에 있던 작은 새 책방이지 싶은데, 이곳은 아직 그대로 있을까요. 간기 자리에 띠종이가 그대로 붙었다면, 이 책은 새 책방에서 안 팔렸다는 뜻입니다. 안 팔린 책이라면 반품을 해야 했을 텐데, 책이 많이 망가져서 폐기했을 수 있고, 책방 문을 닫으면서 책방과 함께 버려졌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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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나온 재미난 책. ⓒ 최종규

<송태우-흙은 살아 있다, 도라지 효소를 이용한 건강농법>(전국농업기술자협회 출판부,1981)이라는 작은 책을 봅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나온 책입니다. '효소 농법'은 한국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나왔어요.

이런 농법이 왜 나왔는가 하면, 비료와 농약과 비닐을 함부로 많이 쓰는 바람에 흙이 끔찍하게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일본에서는 오리농법이나 유기물 농법이나 우렁이농법이나 온갖 농법을 많이 살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 같은 환경 여건에서 인위적 불균형과 시달림을 받아 나오면서도 무감각하게 살아 나오고 있다. 이 같은 환경 여건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토양보전에 전력을 기울여야 될 것이다.

토양을 비옥하게 보전하려면 지금까지 사용해 나온 농약, 화학비료 그리고 부패한 퇴구비 위주의 화학 농법에서 탈피하여 맛좋고 향기로우며 토양 미생물과 토양 부식이 풍부해지는 균류가 분비하는 효소를 응용한 완전퇴구비, 즉 발효시켜 만든 퇴구비를 주체적으로 사용하는 유기농법으로 탈바꿈하여야 … (16쪽)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비료와 농약과 비닐을 쓰기 전까지 '흙이 망가질' 일은 없었습니다. '더 많이 거둬들이려'고 하면서 흙이 망가졌습니다. 한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을 벌이면서 흙이 망가졌습니다. 비료는 비료대로 흙을 망가뜨리니 언제나 새로운 비료를 더 많이 뿌려야 합니다. 농약은 농약대로 흙을 망가뜨리기에 늘 새로운 농약을 더 많이 쳐야 합니다. 비닐은 비닐대로 흙을 망가뜨리니 비닐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맙니다.

시골에서 흙을 가꾸는 사람이 비료와 농약과 비닐에 기대면 어떻게 될까요? 해마다 비료와 농약과 비닐에 들이는 값을 치르느라 허리가 휘지요. 이러면서 흙은 더 망가지기만 하고, 몸까지 망가지지요.

"아름다운 책 하나를 만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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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쌓인 책에서 내 마음에 들어올 책을 헤아린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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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한테 선물할 그림책도 헤아린다. ⓒ 최종규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서 하동에서 우체국 일꾼으로 일한다는 분이 '마음 닦기'를 하면서 쓴 '선시(禪詩)'를 담은 작은 시집 <山中村子-흰 고무신 위에 뜬 달>(가리출판사,1989)은 진주에서 나왔습니다. 진주는 작은 도시이지만, 이 작은 도시에서도 지역출판을 한 발자국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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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나온 지역출판 작은 시집 ⓒ 최종규

진주에 있는 헌책방을 찾아왔기에 이 같은 책을 만납니다. 진주에 있는 헌책방에서는 진주에서 비매품으로 나온 책이 깃드는 책 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이나 큰 도시에 기대지 않는 작은 목소리를 진주에 있는 작은 헌책방에서 마주합니다.

한참 책을 살피다가 살짝 밖으로 나옵니다. 기지개를 켜면서 따사로운 햇볕을 받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서 헌책방을 찾아오는 손님은 매우 드뭅니다. 날이 갈수록 차츰 줄어드는 듯합니다. 인터넷이 발돋움한 한국인 만큼, 인터넷 헌책방도 많아서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아주 손쉽겠지요.

그런데 헌책방에서는 모든 책을 목록으로 올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주 찾을 만한 책을 목록으로 올립니다. 작은 목소리를 담은 작은 책은 인터넷 목록에 못 오르기 마련입니다. 인터넷으로만 책을 장만한다면 '으레 볼 수 있는 책'만 보고 그칩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면서 헌책방으로 찾아오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헌책방으로 나들이하려는 분이라면 자가용을 놓고 시외버스나 시내버스를 타고,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찾아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버스를 타고 헌책방으로 오는 길에 책을 한두 권 읽을 수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책을 몇 권 장만한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책을 한두 권 읽을 수 있어요.

자전거를 타고 헌책방 나들이를 즐긴다면, 우리 집과 헌책방 사이에 어떤 마을과 길과 바람이 감도는가 하는 대목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이웃이 어우러진 마을을 찬찬히 느끼면서 책방마실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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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에서 작은 꽃송이가 터지다. ⓒ 최종규


숨을 고르고 책방으로 다시 들어서려는데, 헌책방 문간에 노란 꽃송이 하나가 나를 쳐다봅니다. 작은 꽃 앞에서 쪼그려 앉습니다. 네가 이곳에서 늘 손님을 기다리는구나. 너는 이 자리에서 책손 누구한테나 꾸벅꾸벅 절을 하면서 반갑다고 노래하는구나. 곱네. 예쁘네. 사랑스럽네. 네 숨결을 받으면서 아름다운 책 하나를 만나는구나.

다시 책방으로 들어서니, <동훈서점> 유리문 둘레에 쌓인 '계몽사 문고'가 보입니다. 아까 골마루를 돌 적에는 못 본 책입니다. 숨을 살그마니 고른 뒤에 새롭게 돌아보니, 이렇게 아까 놓친 책이 확 눈에 들어오는군요. 이 '계몽사 문고'는 몽땅 사야 하는지, 아니면 낱권으로 살 수 있는지 여쭙니다. 낱권으로 사도 된다는 말씀에 우리 집 아이들하고 나중에 함께 읽을 책을 고릅니다.

1. <멜빌/이가형 옮김-흰 고래 모비 딕>(계몽사,1984)
14. <김용운-재미있는 산수 교실>(계몽사,1984)
20. <키플링/유경환 옮김-정글 북>(계몽사,1984)
23. <카와바타/조풍연 옮김-비둘기 통신>(계몽사,1984)
25. <이원수·김영일 엮음-무지개 동산>(계몽사,1984)
44. <비이헤르트/유경환 옮김-검둥이 피이터>(계몽사,1984)
47. <한낙원-우주 항로>(계몽사,1987)
54. <바이코프/정관호 옮김-위대한 왕>(계몽사,1984)
55. <버어넷/이규직 옮김-비밀의 화원>(계몽사,1984)
63. <마아테를링크/김창활 옮김-파랑새>(계몽사,1987)
75. <와일더/오정환 옮김-긴 겨울>(계몽사,1987)
82. <바우만/박종서 옮김-사냥꾼의 동굴>(계몽사,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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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하게 맞닥뜨린 사랑스러운 동화책 꾸러미. ⓒ 최종규


새로운 번역으로 읽어도 나쁘지 않다고 느낍니다. '계몽사 문고'는 아무래도 영어나 러시아말이나 프랑스말이 아닌 일본말로 옮긴 책을 다시 옮긴 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외국말을 곧바로 한국말로 옮긴 판도 있을 테지만, 일본말로 나온 책을 슬그머니 '중역'한 책이 많을 수밖에 없던 지난날이에요. 그래도 이러한 묵은 어린이 책을 장만하는 까닭은 '중역'을 했어도 어린이 눈높이를 잘 헤아려서 한결 부드럽고 쉬운 말을 골라서 옮겼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나중에 '중역으로 나온 판'하고 '외국말을 한국말로 곧바로 옮긴 판'을 나란히 놓고 읽을 테지요. 여러 가지로 옮긴 판을 서로 맞대면서 읽기도 할 테고, 더 나이가 들면 아예 외국말로 된 책을 스스로 찾아서 읽을 수 있습니다.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떠올리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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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 동화책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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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읽던 동화책을 가만히 그려 본다. ⓒ 최종규


"졸리다고 자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다. 내 말을 잘 들어야만 한다. 물론 시어 칸이 정글 안에서 널 죽이지는 못할 거다. 그러나 그 이유는 널 귀여워하는 발루 등 우리들 때문인 것이 사실이야. 그런데 이리의 우두머리 아켈라가 저 모양으로 늙어 빠졌으니, 이젠 사슴 한 마리도 못 잡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이리들이 그를 우두머리라고 할 것 같으냐? 잘 생각해 보아라. 널 처음으로 이리 무리의 회의에 데리고 왔을 때, 거기 나왔던 이리들은 모두 다 늙었다. 그 대신 젊은 이리들은 시어 칸이 꾀어, 사람의 아이가 이리 무리 속에 끼인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너는 이제 얼마 안 있어 곧 어른이 될 터이고."
"어째서 사람이라고 해서 이리와 같이 살 수 없다는 거야? 나는 정글에서 태어났고, 정글의 규칙을 지켜 왔어. 내가 발에 찔린 가시를 뽑아 주지 않은 이리들은 없을 거야. 우리들은 모두 같은 형제가 아냐?" (정글 북 94쪽)

서른 해쯤 앞서 이 책을 읽던 무렵을 떠올립니다. 서른 해쯤 앞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된 학교에 다닐 즈음, 그때에는 이런 책이 있기만 한 대목으로도 고마웠습니다. 학교도서관조차 없던 그때에는 학급마다 집에서 책을 한 권씩 가지고 와서 학급문고를 꾸몄는데, 학급문고로 모인 책은 늘 보잘것없었지만, 그래도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가져온 책은 눈에 뜨였고, 그런 책 몇 가지를 여러 차례 되 읽으면서 즐거웠습니다.

어느 작품이고 그 주인공은 비참한 운명에 쫓기고, 죽음의 공포에 떨면서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들뿐이었읍니다. 청년 시절에 겪어야 했던 고통들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어두운 작품들을 쓰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895년, 프랑스 여배우 조르제트 르발랑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됨으로써 그의 작품은 차차 밝아지기 시작했읍니다. 그의 생애와 예술을 이해해 주는 지혜로운 아내와 같이 살게 되자, 이제까지는 눈을 돌렸던 생활에서 기쁨을 발견해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랑새 작품해설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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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 ⓒ 최종규


책 한 권은 마음으로 읽는다고 느낍니다. 마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책을 읽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책 한 권을 쓰는 분도 마음으로 쓰겠지요. 마음이 아닌 무엇으로 책을 쓸까요.

책이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 되는 까닭은, 책이 마음 밥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생각하여, 마음으로 사랑을 가꾸는 길을 열기에 책 한 권이 반갑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북돋우도록 돕는 책이기에 아름답습니다.

"이봐, 형. 뭘 하는 거더라?" "된장국 만드는 거야." "어떻게 만들어?" "아아, 어떻게 하는 거지? 응, 그렇다! 우선 풍로에 불을 피운다." "어떻게 피우지?" "그렇지. 겨울이라면 화로에 불이 있지만……." "물어 보고 올까?" 샴페이는 어머니한테 달려갔다. "어머니, 풍로에 불 피우는 거 어떻게 해요?" "호호호호." (비둘기 통신 236쪽)

예쁜 헌책방, 아쉬움을 삼키며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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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책들 사이에서 어떤 책을 고를까 하고 생각에 잠긴다. ⓒ 최종규


고흥 시골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두 아이를 그립니다. 두 아이한테 선물할 만한 그림책도 장만하자고 생각합니다. 어떤 그림책이 좋을까 하고 살피다가, <주디스 커/장미란 옮김-모그와 고양이 대회>(한국몬테소리,2003)하고 <백미숙(글),이선희(그림)-작은 숲이 된 의자>(대교소빅스전집,2009)를 봅니다.

주디스 커님이 빚은 '모그 이야기'는 낱권 그림책으로 몇 가지만 번역되었습니다. 전집 그림책 사이에서 번역된 책이 있었군요. 헌책방에서 책을 살피기에 전집 그림책도 낱권으로 만납니다. <작은 숲이 된 의자>도 낱권 그림책으로는 만날 수 없던 판입니다. 버려진 걸상이 숲에서 아주 멋진 숨결로 거듭난 이야기를 담은 재미난 그림책인데, 왜 이러한 그림책이 전집으로만 묶이고 낱권으로는 나오지 못했을까요.

'나는 어둠이 무섭지 않다.'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자신에게 말해 보았지만, 움직이거나 숨을 쉬는 자기의 소리를 들으면 어둠이 당장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덤빌 것만 같았읍니다. 낮은 밤만큼 나쁘지 않았읍니다. 어둠도 덜 했고, 주변에 있는 것이 모두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읍니다. 메어리와 캐리는 번갈아 코오피 빻는 기계로 밀을 빻았읍니다. 이 작업은 조금도 쉴 수가 없었읍니다. 엄마는 빵을 굽고 청소를 하고 난로에 건초 장작을 댔읍니다. (긴 겨울 1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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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남강다리가 잘 보인다. ⓒ 최종규


책을 더 살피면서 쉬고 싶으나 삼천포로 가야 합니다. 아쉽다는 생각을 삼키면서 책값을 셈합니다. 앞으로 또 삼천포로 나들이할 수 있으면 진주에 다시 들르자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주에 들를 일이 생겨서 이 작고 예쁜 헌책방에 즐거이 나들이하자고 생각합니다.

'와일더'라는 글쓴이 이름과 <긴 겨울>이라는 책 이름이 무척 낯익고 애틋합니다. 바로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요 '초원의 집' 연작 가운데 한 권입니다.

책 이름으로도 "긴 겨울"이라 붙이는데, 참말 겨울은 늘 길었습니다. 모두 다 꽁꽁 얼어붙어서 겨우내 언제나 덜덜 떨면서 긴 나날을 보냈습니다. 물이 얼지 않도록 늘 틀어 놓았고, 집에서 오들오들 떨다가도 바깥에서 동무들이 놀자고 부르면 어느새 이불을 박차고 뛰쳐나갑니다. 처음에는 덜덜 떨면서 놀지만, 어느덧 몸에서 땀이 솟아 겉옷을 하나둘 벗고 가볍게 뛰어놉니다.

긴 겨울은 그야말로 긴 겨울이지만, 이 긴 겨울에도 아이들은 누구나 겨울 추위를 씩씩하게 맞닥뜨리면서 연을 날리고 팽이를 치고 딱지를 접으며 눈을 굴리고 나무를 타면서 놀았습니다. 어머니는 뜨개질로 장갑을 마련해 주시느라 부산했고, 귀가 얼지 말라며 털모자까지 떠 주셨습니다. 우리 집도 이웃집도 모두 같았습니다. 집집이 겨울이면 뜨개질로 부산하지요.

아직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인데, <긴 겨울>이라는 묵은 동화책을 읽으면서 어쩐지 서늘하고 춥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하, 그만 책에 빠져들었군요. 진주에서 삼천포로 달리는 시외버스에서 아름다운 동화책 한 권을 읽으면서 내 어린 나날 모습과 '로라 잉걸스 와일더'님 어린 나날 모습을 겹쳐 보았습니다.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아이들이 눈부시게 웃고,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어른들이 해맑은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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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마주하든 마음을 열고 찬찬히 어루만집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헌책방 나들이 #헌책방 #헌책방 마실 #책방마실 #동훈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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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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