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았던 '통일교사' 김형근 선생 가는 길

지병으로 짧은 생 마감해... 화장후 국립 5.18민주묘지 구묘역 안장

등록 2015.09.30 11:40수정 2015.09.3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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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새벽 3시 25분 지병으로 투병중 56세의 나이로 별세한 통일열사 고 김형근 선생 추모의 밤 행사가 29일 오후 7시 전주효자장례타운에서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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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열사 故 김형근 선생 추모의밤 행사에서 추모객들이 묵념을 하고 있다. ⓒ 추광규


이날 밤 행사는 '통일의 꽃으로 부활하소라'라는 주제로 '통일열사 김형근 선생 민주통일장 장례위원회'가 주관했다. 이날 행사는 추모객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생애를 뒤돌아보는 시간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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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열사 故 김형근 선생 추모의밤 행사에서 약력을 읽고 있다. ⓒ 추광규


황민주 장례위원장(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전북본부상임의장)은 추도사를 통해 "파란만장이란 말은 바로 선생님의 일생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라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밝은 웃음을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이라고 추도했다.

이어 "유엔에 질의를 통해 북한이 반국가 단체가 아니고 1991년 이래 유엔의 회원국가라는 답을 받아내기도 했다"면서 "한 언론의 왜곡보도로 시작된 8년 동안의 말할 수 없는 억압과 핍박을 잘 견디시며 '나는 통일을 염원하고 학생을 사랑한 죄 밖에 없다고 절규하시던 선생님!"이라고 강조했다.

황 장례위원장은 끝으로 "선생님은 가신 것이 아닙니다"면서, '빈소를 찾는 모든 추모객들의 가슴에 선생님은 뜨거운 믿음으로 살아계십니다"면서 애끓는 마음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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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객들은 추모의 노래로 님을위한 행진곡을 함께 합창했다. ⓒ 추광규


이날 추모의밤 행사는 추도사에 이어 약력소개와 함께 조사로 이어졌다.

이규재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의장은 "수많은 동지들이 선생의 요양을 진중하게 지켜보며 선생의 건강회복을 기원해 왔다"면서, "그러나 우리의 응원도 선생의 노력도 결국 수포로 돌아갔습니다"고 말했다.


이어 "예사 병마가 아니라 잔인무도한 식민지 분단의 동토에 뿌리내린 병마였기 때문이겠지요"라면서, "자주 민주 통일의 문지기로서 평생 활약한 선생을 파쇼공안 개들이 허구한 날 물어뜯어 덧난 상처들 때문이겠지요"라고 마음을 표현했다.

이규재 의장은 계속해서 "범민련 남측본부가 선생의 그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가겠습니다"면서, "우리 모두가 그토록 염원한 자주 민주 통일의 새 세상으로 더 빨리 더 힘차게 진군하라는 절규로 가슴깊이 새기겠다"고 강조했다.

이 의장은 마지막으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는 반드시 김형근 선생의 열정을 더 강렬히 새기면서 '우리 민족끼리' 기치 높이 들고 제2의 6.15시대를 하루빨리 열고 말 것입니다"면서 선생을 떠나보내는 마음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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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목사가 조사를 하고 있다. ⓒ 추광규


고 김형근 선생이 1978년 전북대학교에 입학한 후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던, 전주 남문교회 당시 대학부 교사였던 한상렬 목사(65세 전주 고백교회목사)는 고인과의 인연을 설명하는 한편 남은 자들의 각오를 강조했다.

한 목사는 "김형근 선생의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무언의 유언이 들리는 듯했다"면서, "용서하소서! 부디 건강 예방하소서! 제발 하루빨리 통일 시켜주소서!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면서 김 선생의 생애 마지막 침묵 속의 유언을 전했다.

추모의밤 행사는 조사에 이어 조시 낭송, 추억담, 관촌중 제자들의 영상으로 이어졌다.

김형근 선생이 2005년 전북 임실 관촌중 재직당시 학부모로서 인연을 맺은 김영숙씨는 추억담을 통해 "선생님을 알게 된 게 10년이 넘는다"면서, "처음에는 선생님과 교육방침에 대해 의견충돌로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중학생이던 아이가 이제 26살이 되었다"면서, "우리 아이가 앞으로 생활하면서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추억하면서 잊지 않고 살아갈 것 같다"고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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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애 선생의 씻김굿. 한 선생은 남북분단을 상징하는 무명베의 한 가운데를 가르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 추광규


이날 행사는 고양곤(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북지역본부 본부장), 오은미 전 전북도의회 의원의 추모노래가 이어진 후 한영애 선생의 씻김굿으로 이어졌다.

한편 통일열사 고 김형근 선생의 유해는 30일 오전 화장된 후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 구묘역에 안장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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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 외부에는 많은 현수막이 선생을 기리고 있었다 ⓒ 추광규


김형근 선생 걸어온 길

성명: 김형근(金亨根)
1959년 11월 5일생, 김제출신
1975년 1월 만경 중학교 졸업
1978년 1월 전주 신흥고등학교 졸업
1978년 3월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입학
1979년 12월 계엄철폐 학내 시위 주도 수배
1980년 3월 전북대학교 학원자치위원회 활동
1980년 4, 5월 전북대학교 학내외 시위 주동
1980년 5월 5.18 민주화 운동관련 수배. 학교 제적.
1980년 7월 말 체포되어 헌병대 영창에 투옥
1980년 9월 초 군보안대에 강제징집.
1982년 10월 경 군보안대에 의해 수감. 피의자 조사 녹화교육 받음
1984년 복교 조치로 전북대학교 3학년 복교
1985년 3월 전두환 퇴진 학내시위 관련 전북대학교 제적
1985년 9월 복학조치로 다시 복교, 학내외 민주화운동 주도
1986년 1월 전북 민주화운동협의회 사회부장
1986년 4월 전두환 타도 민주쟁취 시위주도, 수배.
1986년 겨울 집시법 위반 혐의로 체포 후 전주교도소에 투옥,
1987년 6월 초 석방후 6월 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
1987년 9월 익산에 인문사회과학 서점 '황토서점'을 개점
1988년 8월 전북대학교 졸업
1992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이리익산지부 사무국장
1993년 서적 판매 관계로 국가보안법 등으로 기소
1995년 1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전북 집행위원장
1995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
1996년 4월 전주교도소에서 출감
1997년 10월 전주에서 김형근 아카데미아 논술교실 개설
1999년 11월 관촌중학교 교사 로 발령
2003년 4월 (사단법인)해오름 예술창작원 상임이사
2006년 1월 전교조 전북지부 통일위원장
2006년 3월 군산동고등학교 교사
2006년 10월 전북통일교사모임 사무국장
200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동년 6월23일 석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세번 압수수색 및 1번 투옥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형근 #한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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