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만든 국민공천? 그게 다였다

밀실공천 해소, '조직 동원' 논란은 계속 돼

등록 2015.10.02 13:50수정 2015.10.02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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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일이 아니다. 여의도 정치권은 총선이 다가올 때마다 공천 방식을 두고 치열한 싸움을 벌여왔다. 최근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방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 공천 참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나오는 정치권의 단골 메뉴다. 매번 이름과 시행방식만 달라질 뿐이다.

당원이 아닌 일반 유권자가 정당의 공직후보자를 선출하는 '국민공천'의 역사는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무현 대통령 만든 '국민참여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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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16일 광주 염주종합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 광주 경선 당시 1위를 차지한 노무현 후보.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2년 전국을 뜨겁게 달군 축제는 월드컵뿐만이 아니었다. 정치 분야에서는 '국민참여경선'이 단연 화제였다. 새천년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의 전신)이 처음 도입한 국민참여경선은 정당의 주요 행사인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 국민을 참여시킨 제도다.

그동안 정당 보스들이 장악해온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자는 취지에서 미국의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 방식을 빌려왔다. 일반 국민의 관심을 유도해 후보 인지도를 높여 대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겠다는 계산도 깔렸다.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한국 정당 사상 최초로 지역별·성별·연령별 기준의 국민선거인단을 구성하고 만 20세 이상 모든 유권자에게 참가 자격을 부여했다. 다만 국민선거인단으로 선출되면 민주당에 가입해 당비를 납부해야 했다. 일반 국민의 참여 비율도 미국처럼 100%가 아닌 50%로 제한됐다. '제한적 오픈프라이머리'인 셈이다.

새로운 정치실험으로 시작한 국민참여경선은 예상치 못한 '바람'을 불러왔다. 2002년 3월 9일 제주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순차적으로 실시된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은 당내의 '이인제 대세론'을 깨고 노무현이라는 스타를 만들어냈다. 새천년민주당의 선수로 최종 선출된 노무현 후보는 이후 '이회창 대세론'까지 무너뜨리고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반신반의로 도입된 제도가 민주당의 재집권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야는 본격적으로 공직후보자 추천 과정에 국민 참여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앞서 새천년민주당의 국민참여경선 당시 ▲ '돈 선거' 논란 ▲ 조직동원 ▲ 정책대결 실종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선거 승리'라는 경험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하다는 판단이었다.

'조직동원' 문제 수면 위로... 말만 '국민 공천'?

2004년 총선 때는 이른바 '상향식 공천'이 화두로 떠올랐다. 1인 보스의 밀실공천을 완전 타파하고 국민이 직접 정당의 대통령·국회의원 후보 등을 뽑을 수 있도록 정치를 개혁한다는 명분이다.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조직동원 문제가 수면 위로 불거지자 회의론이 솔솔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국민참여경선을 통한 공천을 적극 내세웠던 열린우리당은 외부에서 야심차게 영입한 유력 정치신인들이 토착 후보들에 밀려 줄줄이 낙천하자 당황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뒤늦게 경선이 아닌 영입·심사 등의 기존 후보 선출 방식으로 우회했다.

2006년 지방선거 역시 선거인단 투표와 여론조사 방식의 국민참여경선이 실시됐지만 참여율 저조라는 한계를 드러냈고, 사실상 국민이 후보 선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국민참여경선에 대한 우려는 2007년 대선이 다가오자 또 다시 가라앉았다. 열린우리당은 한 발 더 나아가 미국형 오픈프라이머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원의 참여 비율을 독립적으로 보장한 기존 방식과 달리, 오픈프라이머리는 당원과 국민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당원의 권한을 강화하겠다는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의 기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당시의 범여권은 오픈프라이머리를 계속 추진했다. 이길 후보를 뽑아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의 '노무현 바람'을 재연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당원 10만 명 보다 국민 100만 명이 뽑은 후보가 더 경쟁력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범여권의 이 같은 전략에 '빨간 불이' 켜졌다. 영입을 시도했던 고건 전 총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대선 출마 포기를 선언하면서,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흥행 카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열린우리당 탈당파 등으로 구성된 대통합민주신당 역시 오픈프라이머리를 표방한 대선후보 경선을 시행했지만, 각 후보 캠프가 선거인단을 조직적으로 긁어모으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무늬만 오픈프라이머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국민 없는 국민경선'이라는 오명을 쓴 이들의 오픈프라이머리 시도는 결국 흥행 실패와 대선 참패로 막을 내렸다.

'노무현 바람'은 없고 '내부 갈등'만 남다

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국민 누구나 참여 가능한 오픈프라이머리 방식이 잠시 주춤했다. 주로 하향식 공천이 이뤄지거나, 제한적 국민참여경선으로 회귀했다.

미국형 오픈프라이머리가 다시 떠오른 시점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다. 박영선 민주당 후보와 시민사회 출신인 박원순 무소속 후보가 단일화하는 과정에서도 국민참여경선이 도입됐다. 국민여론조사 30%, TV토론 배심원 평가 30%, 국민참여경선 40% 방식이었다.

이에 따라 박원순 후보가 서울시장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됐고, 박 후보는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서울시장으로 당선됐다. 야권 전체로 보면 국민참여경선이 승리를 안겨준 것이지만, 제1야당인 민주당은 최초로 서울시장 선거에 후보를 내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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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1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민주통합당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명숙 대표와 문성근 최고위원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 유성호


2012년 총선 때는 여야 모두 국민참여경선을 전면 확대해 도입키로 결정했다. 현장투표, 모바일투표, 여론조사 등의 방법을 동원해 국민의 참여 비율을 극대화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특히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모바일+현장투표' 방식의 완전국민경선으로 후보를 공천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당원이 아니어도 선거인단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사실상 미국형 오픈프라이머리를 표방한 셈이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의 완전국민경선은 시행 초반부터 '블랙홀'에 빠졌다.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 선거인단 모집 과정에서 과열·혼탁 현상이 전국적으로 만연해졌고, 급기야 광주에서는 투신자살 사건까지 발생했다. 또한 예비후보들이 지지자들을 선거인단에 최대한으로 등록시키려 시도하면서 대리등록 등의 문제가 발생했고, 경선에 불복한 일부 경쟁자들은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민의를 반영한 상향식 공천을 시행하겠다는 애초 취지가 무색해진 순간이다.

민주통합당은 같은 해 대선 때도 '2002년 흥행 재연'을 외치며 '전국순회투표 + 모바일투표' 방식의 완전국민경선을 도입했지만, 오히려 ▲ 계파 갈등 ▲ 폭력 ▲ 공정성 논란 등으로 당내 분란만 키운 채 대선 패패의 고배를 마셨다. 

"오픈프라이머리를 요술방망이로 착각하는 듯"

2015년 10월, 총선을 앞두고 또 다시 '오픈프라이머리'가 화두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안심번호를 이용한 국민공천제'라는 명분을 전면에 내세웠다. 여야 모두 '어게인(Again) 2002년'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의 분위기는 회의적이다. 오픈프라이머리가 선거 때만 반짝 이용되는 '이벤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참여율 저조' '조직동원' '내부분란' 등의 고질적 문제 역시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당직자는 "오픈프라이머리를 한국 정당 정치의 발전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고질적 문제들을 해결해줘야 하는데, 지금의 정당들은 '어떻게 하면 선거에서 국민 관심을 많이 끌어 모을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라며 "정치 자체에 발전이 없으니 국민참여경선 방식의 공천도 더 이상 '약발'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픈프라이머리를 선거에서 이기게 해주는 '요술방망이'로 착각하는 듯하다"라고 꼬집었다.
#국민참여경선 #국민공천제 #오픈프라이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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