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는 아무나 하나, 여긴 '고시' 합격해야 농부

[행복사회 유럽 25] 잘츠부르크의 농부 자격증, 국민 먹을거리 책임진다

등록 2015.10.10 09:49수정 2015.10.1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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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내내 너도밤나무를 태워 훈연하는 훈제 생햄 훈제실 ⓒ 정기석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아무나 농민이 될 수 없다. 농사를 짓고 싶다고 무작정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일단 농민으로 인정받으려면 자기 수입의 절반 이상은 농업에서 벌어야 한다. 만일 그 기준대로 하자면 우리나라의 평균 농민은 사실상 농민이 아니다. 우리 농민들의 연평균 농업소득은 농가소득의 30%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275만여 명의 우리 농민 가운데 농업소득 50% 이상의 농민다운 농민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농사일에 투여하는 농업 노동 시간도 50% 이상은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평균 농민들은 먹고 살려니 농업소득 2배 이상의 농외소득을 벌어야 한다. 농지를 벗어나 동분서주 품을 팔며 돌아다녀야 한다. 자기 농사에 투자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50%가 채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농민 자격증이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일단 농민 자격증을 보유해야 한다. 우리의 농지원부나 농업경영체 등록증 정도로 만만히 취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농업인대학에 놀듯이 몇 달 적당히 출석하며 얻는 수료증 같은 게 아닌 것이다.

농부가 되려면 정식으로 농업전문학교를 입학해 졸업해야 한다. 그러고도 농업현장에서 수년간 실습을 마친 후 농부 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농민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 농부로, 농민으로 불릴 수 있다. 말하자면 농민에게는 개업허가증이나 자랑스러운 훈장 같은 것이다.

"왜 농민 자격증이 필요할까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먹는 겁니다. 농민의 안전한 먹을거리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하는 사명이 있어요. 심지어 독일에서는 농약도 처방이 있어야 살 수 있어요. 이렇게 중요한, 국민의 먹을거리를 아무나, 함부로 생산해도 될까요. 안 되지요. 그래서 독일에서는 농민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 국민의 먹을거리를 농사지을 수 있어요."

65세면 은퇴하고 편히 쉬는 독일 농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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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러 농축산물 가공 직판농장의 요셉 클라우스 호퍼(Joseph Klaushofer) 농장주 ⓒ 정기석


대산농촌재단 독일·오스트리아 농촌공동체 연수단을 따라다니는 동안 황석중 지도교수의 독일 농민예찬론은 끊이지 않았다. 어쩔 땐 너무 꿈같은 이야기로만 들려 사실인지, 진실인지 긴가민가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연수를 마치고 나니,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그게 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임을 알겠다.


농민 자격증을 딴 선택받은 2%의 농부가 국민의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독일 농민의 자긍심은 말도 못할 정도로 높다.

"독일에서는 농민도 65세가 되면 은퇴합니다. 일하지 않아도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을 정도로 연금이 충분히 나오니 더 이상 농사를 안 지어도 된다는 의미죠. 그리고 자식에게 농업의 가업을 물려줍니다. 이 나라에서는 자식이 농사를 물려받는 걸 큰 자랑으로 여깁니다.

물론 독일에서도 농사는 쉬운 직업이 아닙니다. 우리처럼 '뼛골 빠지는 일'로 표현하곤 합니다. 그렇게 힘든 일이 농업이지만 독일의 농부들은 자부심과 자긍심을 잃지 않습니다. 농업과 농촌을 위하는 사회적 동의와 국민적 공감, 그에 따른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독일 농부의 생활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 있고, 자식에게 기꺼이 농사를 물려줄 수 있는 거지요."

역시 지구 밖에 가상으로 존재하는 다른 세상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우리나라는 농가 경영주 열 명 중 네 명이 70세가 넘는다. 열 명 중 일곱 명은 환갑이 넘었다. 농부들의 평균연령은 66.5세에 달한다. 즉, 우리 농가를 경영하는, 농부의 표준형은 늙고 병든 노인이다.

65세가 되어도 감히 은퇴할 수 없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논밭으로 나간다. 고단하고 지친 육신을 소처럼 들판으로 내몬다. 농사를 물려받으려는 자식도 없고 자식에게 천형 같은 농사를 물려줄 생각도 없다. 노후를 지켜줄 연금은 턱없이 부족하다. 국가도 정부도 늙은 농부를 챙기지는 않는다. 농부는 국민의 먹을거리를 챙기지만, 정부도, 국민도 농부의 삶은 돌보지 않는다.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다.

독일·오스트리아에서 농부 아무나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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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직판으로 판매하는 홀러 농장의 농축산물 직판장 ⓒ 정기석


꿈처럼, 거짓말처럼 들리던 황석중 지도교수의 독일, 오스트리아 농정 예찬은 모두가 사실로 판명되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우리의 현실과 너무 달라 좀 과장된 게 아닌가? 다소 의아스러웠지만, 곧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소금과 음악의 도시', 잘츠부르크의 파이스테나우(Faistenau) 지방의 홀러 농축산물 가공 직판농장,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튀어나올 듯한 티롤지방 미밍(Mieming) 마을의 디스마스 특산 훈제 생햄 맛 인증 농가에서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물증과 증언을 내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홀러 농장은 요셉 클라우스호퍼(Joseph Klaushofer) 농장주 부부가 꾸려가는 가족농장이다. 부부가 공동경영하는 농축산물 직판농가로 규정할 수 있다. 겉모습이나 외형적 성과로만 보면 평범해 보인다. 약 7ha의 농지에 낙농, 양계, 양봉 등을 영위하는 평균적인 오스트리아 농가의 모습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최고의 6차 산업형 농가로 단연 손꼽힌다.

농사 규모는 닭 50마리, 젖소 7마리, 그리고 벌을 키우는 게 전부다. 그런데 젖소 70마리를 기르는 다른 농가보다 소득이 높다. 비결은 농식품 가공 등 6차산업으로 부가가치를 높였기 때문이다. 소농으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농식품 가공품을 개발해 100% 직판으로 판매한 전략이 주효했다. 근본적으로 일반적인 농가와 콘텐츠와 프로그램이 다른 특별한 농가로 스스로 자리매김을 했다.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은 '입소문'이었다. 상품의 질이 좋으니 재구매, 단골손님이 자연스레 이어졌다. 일단 하루에 200ℓ 생산하는 우유는 전량 치즈로 가공한다. kg당 12유로 정도로 판매할 수 있는 9~10kg의 치즈를 생산한다. 큰돈은 아니지만, 생활에 보탬이 되는 수입이다.

이렇게 1차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 소득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제빵, 치즈 유가공, 햄류 육가공, 양봉 등 2차 농식품 가공업을 병행하는 생존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심지어 남편인 요셉씨는 겨울철 농한기에도 쉬지 않는다. 스스로 설계, 제작하는 양봉틀, 가구 등 목공제품을 제작해 판매하기도 한다. 농장주 요셉씨는 농장 안내를 하는 동안 입버릇처럼 되풀이해 힘을 주어 강조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것처럼.

"농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버틸 수 있는 다리를 찾아야 한다"고.

농사의 장인들만이 '국민 먹거리' 책임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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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마스 훈제 생햄 맛 인증 농가의 농장주 마틴 앨버 부부 ⓒ 정기석


부인 브리기타씨도 부지런하기는 남편 요셉씨를 능가한다. 홀러 농장의 가공품 개발을 전담하는 연구원이자 공장장 역할을 맡고 있다. 어쩌면 남편보다 더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공식품 연구와 개발을 위해 쉬지 않고 교육을 받고 인증을 받으러 다닌다. 그동안 50여 가지의 가공품을 개발했다. 그것도 정부의 지원은커녕 자기 돈과 시간을 투자해가면서.

오스트리아에서는 일단 농가에서 가공품을 만들려고 하면 농업회의소에서 교육부터 받아야 한다. 가공시설도 식품검사국의 교육과정과 위생검사를 통과해야 한다. 가공품에 생산 이력을 정확하게 표기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보통 교육시간은 400시간, 교육비는 500만 원이나 된다. 이때 교육비는 전적으로 자부담이다.

교육을 마치면 동화 속 요술할머니가 타고 다니는 마법의 빗자루를 인증서처럼 수여한다. 마법 같은 솜씨를 발휘해 훌륭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징표라 한다. 홀러 농가는 빗자루를 사람들이 들고나는 정문에 자랑스럽게 걸어놓고 있다.

빗자루 옆에는 온갖 상장과 금메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동안 부부가 노력한 대가가 이런저런 상으로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오스트리아 치즈 가공 경연대회에서 최고의 지역 농특산물에게 주어지는 '맛의 왕관(Gueness Krone)' 최고상은 자랑스러운 상이다. 그것도 여러 차례 수상했다. 요셉씨가 농민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할 수밖에 없다.

홀러 농장을 방문하고 나서 죽비를 세게 맞은 듯 거듭 깨달았다. 농사든, 농업이든, 농산업이든 아무나 해서는 안 된다는 냉철한 현실인식과 각성이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국민이 농업에 임하는 철학과 자세는 우리나라와 차원이 다르다. 농업과 농촌의 가치를 지켜낼 각오가 서 있는 자만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부 자격증이 있는 농사의 장인(마이스터)들만이 국민의 먹을거리를 제대로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최고 수준 호텔에 납품하는 제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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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최고 지역특산품 인증 게누스크로네(Genuuss Krone) ⓒ 정기석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도 장인 같은 농부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디스마스(Dismas)훈제생햄 맛 인증 농가도 그중 한 곳이다. 오스트리아 티롤지방, 알프스 산록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해발 840m의 고지대에 자리 잡은 미에밍(Mieming) 마을의 전형적인 가족농이다.

20ha의 농장을 운영하는 농장주 마틴 알버(Martin Alber)씨는 직접 사육한 60여 마리의 돼지로 티롤 지방 전통방식의 수제 육가공품을 제조, 직판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농가 직판을 시작하고 2000년에 비로소 농가에 자가 도축장, 부분육 처리실 등을 마련해 훈제 생햄 등의 육가공품을 자체 생산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오후 4시간씩만 직접 농가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에 한해 제한적으로 직판하고 있다. 시장이나 마트에 나가서 팔면, 더 팔려서 돈을 더 벌 수 있지 않으냐고 물어봤다. "더 팔 필요가 없어요, 이 정도만 해도 먹고 살 수 있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주력 제품인 훈제 베이컨, 훈제 소시지는 일반 대규모 햄 공장에서 만드는 것과 차원과 품격이 다르다. 하루에 5시간 증기로 찌고 문을 열어 환기하는 방식의 생산과정을 2주 내내, 매일 반복한다. 훈증을 하는 연료는 너도밤나무만 이용해 훈증실의 온도를 25℃로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일반 햄 공장에서는 2~3일 훈증에 그친 제품을 시장에 내다 판다.

이렇게 작품을 만들듯 생산한 훈제 생햄은 오스트리아 최고 인증 지역농특산물에게 주어지는 '맛의 왕관(Gueness Krone)'을 수차례 수상할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기업농도 아닌 일개 가족농 처지에 4성급 이상의 오스트리아 최고 수준의 호텔에 납품할 정도다.

농장주 마틴 알버씨는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육가공 분야 마이스터다. 마이스터는 농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자격이 부여된다. 마이스터가 되려면 전문 기술은 물론, 교육자적 자질, 인성 등 3가지 조건을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농부도 아무나 될 수 없고, 마이스터는 더욱더 아무나 될 수 없다.

마틴씨는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한 육가공 기술과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이게 바로 디스마스 농가의 경쟁력이다. 이런 경쟁력과 공신력을 바탕으로 직판 등을 통해 전업농으로서 농가자립경영의 기반을 갖추고 있다.

농장주 마틴씨의 아들 역시 가업을 잇기 위해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정규학교 과정 이외에도 농업마이스터시험, 티롤 농업회의소의 육가공, 마케팅 등 정기보수교육과정 등을 이수한 어엿한 농부 자격증 소지자다. 30여 년 전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낙농업을 물려받았듯이, 아버지 마틴씨로부터 농사라는 가업을 이어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전문 농업인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잘츠부르크의 홀러 농장과 티롤의 디스마스 농장을 방문하고 나서 불현듯 정책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청장년 전문 공익농민들을 육성하는 농업전문학교'. 이를테면 홍성에 있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 같은 교육기관을 적어도 우리 농촌 지역의 기초지자체마다 한 곳씩만 개설한다면 하는. 그러면 그 지점에서부터 우리 농업과 농촌의 살길이, 숨통이 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 편집ㅣ곽우신 기자

#잘츠부르크 #티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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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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