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주 '빨갱이' 한마디에 고개 숙이는 시대인가

[주장] '열린 사회의 적'이 된 수구인사가 방문진 장악

등록 2015.10.06 13:46수정 2015.10.0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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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태도 지적에 고영주 이사장 '곤혹' 고영주 방송문회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이 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의 방문진 대상 국정감사에서 지난 2013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대해 '공산주의자'라고 색깔공세를 편 데 대한 야당 의원들의 추궁에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들은 고 이사장의 답변이 불성실하다고 지적하고 전원 회의장을 퇴장해 한때 국정감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 남소연


술에 취한 아저씨가 시외버스에 올라탄다. 그는 한 젊은 여성의 옆자리에 앉아 고성방가하더니 그녀에게 시비를 걸며 노래를 부르라고 윽박지른다. 그의 주정을 보다 못한 승객들이 마침 지나던 검문소에 버스를 세우고 헌병에게 그를 끌어내려 달라고 호소했다.

헌병이 버스에 올라타자 그는 갑자기 주정을 딱 그치고 얌전해진다. 헌병이 그냥 내리고 버스가 다시 출발하자 그는 벌떡 일어나 "야, 이 빨갱이 놈의 새끼들아~"라고 고함친다. 그리고 살기등등한 눈으로 승객들을 노려보며, 자신을 끌어내라고 한 놈은 빨갱이 아니면 공산당일 거라고 말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승객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자신이 '빨갱이'로 지적당할까 봐 겁이 난 것이다. 갑자기 "승객이 죄인이 되고 취한은 죄인을 응징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가운데 결국 아저씨의 옆자리에 앉은 그 젊은 여성은 그가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러야 했다.

'빨갱이' 소리 한마디에 고개 숙인 승객들

박완서의 오래된 소설 '돌아온 땅'(1977)의 후반부에 실린 이야기다. 이어지는 박완서의 해설이다.

"취한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며 미워하는 빨갱이라는, 악 중에도 최악을 내세워, 자기가 저지른 악을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마침내 무화(無化)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악이란 악은 빨갱이라는 강렬한 최악만 만나면 -그게 설사 허상이더라도- 맥을 못 추고 위축되는 이 땅 특이한 풍토를 이 취한은 취중에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소설 속에서만 가능할까. 아니다. 해방 후 한국 현대사를 관통해 온 현실의 극화일 뿐이다.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발명된 '빨갱이'란 단어는 인권은 물론 목숨까지 연관된 공포의 단어였다. 해방 공간에서, 그리고 한국전쟁 중에 "너 빨갱이지?"라는 지적질이 어떤 힘에 의해서든 사실인 것으로 확정(혹은 조작, 혹은 오인)되는 순간 그 손가락 끝에 있는 사람은, 많은 경우, 재판도 없이 생명까지 빼앗길 수 있는 상황에 던져졌다.


그러므로 박완서의 해설 중 "취한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며 미워하는 빨갱이라는, 악 중에도 최악을 내세워..."라는 대목은 틀렸다. 이 대목은 "취한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떨며 무서워하는 '빨갱이 지적질'이라는, 공포 중에도 최악의 공포를 이용해..."로 바꿔야 마땅하다. "너 빨갱이지?"라는 지적질은 90년대 박홍의 "너 주사파지?"를 거쳐 2000년대 "너 종북좌빨이지?"로 종종 바뀌어 사용되지만, 여전히 "이제부터는 일체의 대화와 타협을 배제하고 오로지 너를 박멸하겠다"는 의지의 발산으로 유효하다.

국회버스에 올라탄, 이념에 취한 극우 인사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고영주 이사장이 2일 국정감사장에서 보인 행태가 그랬다. 그는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지적해 지난 2013년 1월 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신년 하례회에서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확인하면서,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현재 문재인 대표로부터 고소를 당한 만큼 이 자리에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위원장직을 맡고 있던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가 지난 2010년 공개한 '친북·반국가행위자인명사전'에 박원순 서울시장과 오영식, 우상호, 이인영 의원 등이 포함된 사실에 대해 "이 네 사람이 친북 북한 노선을 따랐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그런 행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선정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이밖에도 그는 "일부 사법부가 좌경화돼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 국사 학자 중 90% 이상이 좌편향 돼 있다"는 발언들을 거침없이 내쏟았다. 술에 취한 채 시외버스에 올라탄 아저씨처럼, 고영주 이사장은 극우 사상에 잔뜩 취한 채 국회에 출석해 "이 빨갱이들아~"를 외친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온통 빨갛게 물들었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하다.

공안검사들이 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대략 이렇다. '공안'이란 말뜻이 공공의 안전, 사회의 안전이란 의미에서 정권의 안전, 체제의 안전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공안검사에게는 쟁의를 하는 노조가 됐든,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는 시민과 학생이 됐든, 정권을 바꿔보자는 정치인이 됐든, 비판의 소리를 내는 모든 사람들이 체제에 도전하는 '빨갱이들'로 보이는 것이다. 이들을 수사하고 취조할 때마다 "너 빨갱이지"라는 소리가 목구멍에 차오르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주먹으로 때리고, 몽둥이로 때리고, 때로는 물을 먹이고 칠성판에 눕혀서라도 자백을 받아 내고 싶은 것이다. "예, 빨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 이사장은 자신이 만들어 낸 부림사건 연루자들은 여전히 '자백한 빨갱이들'이요, 이들을 변호한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표가 공산주의자요, 수십 년이 지나 이 사건을 무죄로 판결한 '일부 사법부'가 좌경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확신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곧바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전 인간, 전 인격이 달려 있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영주가 이사장을 하면 안 되는 이유들

그의 소신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가 방문진 이사장을 맡는 것에는 두 개의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첫째, 그의 이념적 편향성은 방송사의 이사장으로 전혀 맞지 않는다. 언론, 특히 방송은 어느 특정 이념을 위한 "심리전과 사상전, 문화전 등 미디어 전쟁"(그에 대한 추천서의 한 대목)의 도구가 아니다. 모든 계층의 생각들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취급되는 소통의 장, 여론 형성의 장이 되어야 한다. 

노엄 촘스키는 미국 언론이 체제의 선전도구로 전락한 다섯 가지 원인으로 ▲언론의 소유구조 ▲광고 의존 ▲정부, 기업, 전문가들에 대한 정보 의존 ▲언론을 훈육하는 역할을 하는 강력한 비난(flak)과 외압 ▲국가적인 종교이자 통제 메커니즘으로써 '반공주의'를 들고 있다. 고 이사장이 해당되는 항목이 적어도 두 개가 있다. '반공주의'로 무장한 채 MBC를 틀어쥐고 앉아, 외부도 아닌 내부에서 'flak'를 남발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고 이사장이 그대로 앉아 있는 한 MBC가 박근혜 정권의 나팔수로 더욱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다.

둘째, 방문진 이사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 있다. 만일 고 이사장이 사퇴하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이 그를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둔다면 이는 고 이사장의 생각과 발언들을 그대로 용인하겠다는 신호가 된다. 야당 대표를 '공산주의자'로 본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대통령이 제대로 된 대통령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영화 '변호인' 중에는 송우석 변호인이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압수해 증거로 내놓은 검찰 측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온다. 정말로 이 책을 불온서적 혹은 이적도서로 간주했다면 그런 검사의 세계관이 제대로 형성됐을 리 없고 그의 머리에 제대로 된 역사관이 박혔을 리 없다.

20세기 자유민주주의의 철학적 대부 칼 포퍼는 그의 출세작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마르크스를 통렬하게 비판했으나 기실 그 비판은 나치즘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전체에 대한 것이었다. '반공주의'로 무장했다 하여 곧 바로 자유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큰 착각이다.

그는 국회에서의 질의 응답 과정에서 자신이 '수구꼴통'이란 소리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수구꼴통'이야말로 '빨갱이' 못지않은 '열린 사회의 적' 이다. 고 이사장의 발언들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가 민주주의 시대의 부적응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데 조금의 모자람도 없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고영주 #문재인 #공산주의자 #방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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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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