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손녀' 눈에 친일파는 안 보이나

[아이들은 나의 스승 50] 17년차 한국사 교사의 하소연

등록 2015.10.10 11:09수정 2015.10.10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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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동 새누리당 최고위원 ⓒ 연합뉴스


"그러잖아도 공부해야 할 게 태산인데, 중국과 일본의 역사는 왜 배우는 거죠?"

아편전쟁과 메이지 유신을 다룬 부분을 시험에 출제한다고 했더니 한 아이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꾸했다. 중간고사를 코앞에 두고 시험 범위를 알려주는 자리에서다. 시험공부의 고충을 토로한 것이긴 하지만, '한국사' 교과서에 왜 이웃 나라의 역사 이야기가 실려 있는지 숫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다.

그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청나라와 영국이 싸운 전쟁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되묻는가 하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 일본이 뭐가 좋다고 그들의 역사를 교과서에 실어놓았느냐는 등 맹목적인 불신을 드러냈다. 동아시아사 과목도 있고 세계사도 있는데, 굳이 한국사 교과서에 실을 필요는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중국과 일본 역사에 대해 잘 모르니, 우리가 한국사 교과서 내용을 밑도 끝도 없이 외우는 게 아닐까? 비록 우리 선조들을 직접 다룬 건 아닐지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앞뒤 맥락을 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일단 이해가 되어야 암기하기도 쉬운 거잖아."

한 아이의 반론이었다. 교과서 내용을 쉽게 암기하는 데 필요하다는 '실용적' 시각에서부터 한 나라의 역사는 주변 국가와 관계가 단절된 채 존재할 수 없다는 자못 '철학적' 입장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그들의 주장은 냉소와 불신으로 점철된 아이들의 목소리를 쉬이 넘어서질 못했다. 특히 일본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바로 그때 터져 나온 한 아이의 말에 교실 안 어수선한 상황이 순간 반전됐고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주변 국가의 역사도 배워야 한다는 소수 아이의 압승이었다. 그 말이 끝나자 교실의 분위기는 순간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일본이 그렇게 싫다면, 일본을 더 잘 알아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가 일본의 역사를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자세히 알아야 독도 갈등과 위안부 문제에도 더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들의 역사를 백안시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도움될 건 조금도 없다고 봐.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격언, 이럴 때 딱 어울리는 말 아닐까?"


멀쩡한 교과서를 정치에 이용하다니,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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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 쳐다보는 김무성 대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 권우성


애초 시험 범위를 두고 시작된 아이들의 논쟁을 지켜보노라니, 엊그제 집권 여당의 대표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강조했다는, 이른바 '주체사상 학습' 발언이 떠올랐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 5일, 특정 교과서를 지목하며 "우리나라 학생들이 왜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워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꺼져가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의 불씨를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몸부림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17년간 한국사 교사로 살아오면서 부끄럽지만 고백할 게 생겼다. 이따금 학교 밖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답사 프로그램을 이끌고 교양 수업을 강의할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북한의 역사를 가르쳐본 적이 없다.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늘 빠듯한 수업 시수 때문에 교과서의 맨 뒤에 부록처럼 달린 북한 역사까지 진도를 못 나가서다.

매년 한국사의 마지막 수업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8·15 광복 즈음에서 마무리된다. 어느 해인가는 아이들이 8·15 광복도 못 보고 학년이 끝난 경우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시간의 학문인 데다 인과관계가 매우 중요하므로 어느 시대, 어느 사건 하나를 소홀히 다룰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굳이 다 가르칠 필요는 없다지만, 수업을 하다 보면 '욕심'을 내려놓는 게 말처럼 쉽진 않다.

아무튼 고작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로 반만년 역사를 훑는다는 건 어쩌면 교사의 과욕일지도 모른다. 그중에서도 광복 후 현대사는 '피해'가 막심하다. 몇 해 전 한국 근현대사라는 과목이 사라진 뒤 시나브로 존재감이 약해졌고, 수능이나 모의고사에서도 잘 출제되지 않는 단원이다. 그래선지 많은 교사는 그저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것들을 정리해 한 번 요약해주는 정도에서 만족하게 된다.

하물며 북한의 역사임에랴. 김 대표의 지적 덕분에(?) 올해 들어 처음 지문조차 묻어있지 않는 북한의 역사 단원을 펼쳐보았다. 참고로, 지금 우리 학교에서 채택한 교과서 역시 금성 교과서와 함께 '좌 편향'이라고 공격받고 있다. 교과서는 학습 목표에 '분단 이후 북한에서 나타난 정치적, 경제적 변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밝힌 다음,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하며 독자적 노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주체사상을 수립하였다'고 적고 있다.

집권 여당의 대표인 그가 마치 이적 행위인 양 예시한 '김일성의 독재 체제 확립 과정을 국제 정세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시험문제의 정답인 셈이다. 이게 어디 수많은 언론 앞에서 '깜짝 놀랐다'며 핏대 세울 만한 일인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북한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한 내용은 없다. 구체적인 전후 배경 설명이 부족해, 보기에 따라서는 북한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해도 할 말 없을 정도다.

김무성 대표에게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아이의 말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입만 열면 통일을 외치면서, 정작 통일의 대상인 북한에 대해 백안시하는 그들의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체제 경쟁이 이미 끝난 마당에, 주체사상은커녕 북한이라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경 북한이 아니라, '종북'이 지닌 정치적 효용이 끝나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멀쩡한 교과서조차 정치에 이용하려는 비겁하고 반 교육적 작태다.

독립운동가 후손 김을동, 친일파 득세 안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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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 서점에서 학생이 교과서를 고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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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유공자 유가족 만찬회에 앞서 기념촬영을 한 박정희 1962년 3월 1일, 3.1운동 유공자 유가족 만찬회에 앞서 김두한씨와 기념촬영을 한 박정희 의장. ⓒ 연합뉴스


더욱 딱한 건, 여당 내 역사교과서개선특별위원장을 맡은 김을동 최고위원이다. 김 위원은 자칭 청산리 대첩의 영웅인 백야 김좌진 장군의 손녀라고 한다. 만약 김 최고위원이 당시 사분오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갈등으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 김좌진 장군의 직계 혈육이라면, 그는 적어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위해 총대를 메서는 안 된다. 나아가 여당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온 몸을 던져 국정화를 막아내야 옳다.

지난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갈등을 통해 드러났듯,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역사를 반쪽짜리로 만드는 것이 정부와 여당이 목맨 국정화의 속내이기 때문이다. 김좌진 장군의 죽음이 가르쳐준 역사적 교훈은 조국의 독립운동에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벗어나라는 것이다. 과연 그는 지하에서, '지금의 검정 교과서 때문에 이념 투쟁과 분열, 갈등이 야기된다'는 손녀의 생뚱맞은 '사자후'를 어떻게 생각할까.

거칠게 말해서, 김 최고위원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의 사명을 스스로 포기해버렸다. 그는 철 지난 이념 논쟁이나 진영 논리를 벗어나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이들을 아우를 수 있는 최고의 적임자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가치관이 전도된 우리 현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그의 눈엔 광복 직후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되레 기득권 세력으로 거듭난 친일파 후손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끝으로, 현직 고등학교 한국사 교사로서 한 마디 하고 싶다. 초임 시절 한국사를 국정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별다른 사회적 이견 없이 검정 체제가 도입됐다. 그즈음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 후면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자유발행제가 공공연한 이슈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가 되면 아이들과 어떻게 교재를 구성하고, 영상 자료를 어떻게 활용하며, 평가는 또 어떻게 할까 떠올리며 한껏 부풀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언감생심 자유발행제는커녕 다시 국정교과서로 돌아가자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참담하다 못해 서글프다.

3년 뒤면 교사가 된 지 20년이다. 강산은 두 번 변했지만, 한국사 교과서는 꼭 그만큼 뒷걸음질 칠 모양이다. 하긴 이게 어디 한국사 교과서만의 문제일까 싶지만 말이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김좌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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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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