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은 기생충" 이런 엘리트주의자가 권력 쥔다면

[김성호의 독서만세 74] <수퍼크래시>

등록 2015.10.12 19:09수정 2020.12.2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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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은 직관적이다. 활자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글에 비해 그림은 보는 즉시 수용자에게 어떠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이러한 사실만으로 그림이 활자보다 우월한 매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그림을 통해 활자로는 전하기 어려운 문제도 단박에 전할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하다.

반면 활자는 그림보다 정교하고 풍성하게 뜻을 담아낼 수 있는 매체다. 인상이나 느낌 등 직관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그림이 효과적일 수 있지만 표현자와 수용자 사이의 오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글이 가진 장점은 상당하다. 사실 뉘앙스와 표정, 행동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직접적인 대화를 제외한다면 활자만큼 뜻을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도 없다.


만화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그림을 통한 인상의 전달과 활자를 통한 의미의 전달을 한꺼번에 해낼 수 있는 만화는 말 그대로 혜택 받은 매체다. 그림이 그려진 칸 위에 활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비워져 있고 이곳에 글이 들어가는 형태가 일반적인데 이로써 만화는 그림과 활자매체의 훌륭한 결합체가 되곤 한다.

일찍이 이원복이 <먼나라 이웃나라>시리즈로 해외 각국의 문화를 알기 쉽게 소개한 것이 대표적 사례며 박시백이 지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역시 그 놀라운 성취를 이어받아 조선의 역사를 한층 가깝고 재미있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엘리트주의자 눈에 대중은 중고인간, 장애인은 기생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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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크래시> 표지 ⓒ 이숲

만화의 틀 안에서 다종다양한 주제를 다뤄온 영국 출신 작가 대릴 커닝엄의 <수퍼크래시>는 이 같은 만화의 장점을 한껏 살린 수작이다. 책은 아인 랜드라는 미국 보수주의의 시원 격 인물에 대한 전기적 소개로부터 신자유주의의 발생과 세계적 금융참사의 원인 등을 살피고 보수주의 우파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전망까지를 하나씩 알기 쉽게 설명해나간다.

만화는 물론이고 먼저 출판된 서적 가운데서도 이 만큼 세심하게 보수주의와 금융위기의 본질을 살핀 작품이 흔치 않았던 만큼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겐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책은 우선 미국 보수 우파의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아인 랜드라는 인물을 집중 조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RB) 전 의장 앨런 그린스펀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아인 랜드는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으로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와 소설가로 자수성가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일가족이 러시아에서 일군 기반을 순식간에 빼앗긴 경험을 뼈에 새긴 그녀는 이후 국가와 대중을 철저히 배제하고 뛰어난 능력을 갖춘 소수 엘리트 위주의 사회를 꿈꿨다.

<파운틴헤드>, <아틀라스> 등 아인 랜드의 대표작에서 엿볼 수 있는 그녀의 사상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소수엘리트의 절대적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녀는 보통의 대중들을 가리켜 '중고인간'이라 칭하고 정부의 보조를 받아야 하는 장애인 등에 대해서는 '기생충'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엘리트주의자다.

나아가 그녀는 소수 엘리트의 재능을 통해 사회가 발전하며 이들로부터 세금을 받아 사회적 약자를 돕는 정부의 행위를 도둑질이라 비난한다. 즉 엘리트 자유주의자인 셈인데 저자는 그녀가 평생토록 주변인의 자유의지를 짓밟고 종속시키는 이율배반적 인물이었음을 그녀의 삶을 통해 곧장 드러낸다.

책은 아인 랜드의 사상이 그녀가 오래도록 교류한 심리학자 내서니엘 브랜든, 그의 아내 바버라, 앨런 그린스펀 등이 참여한 모임에서 어떻게 전파되어 갔는지를 마치 전기를 쓰듯 묘사한다. 아인 랜드의 소위 '객관주의'를 추종하는 이들 모임의 참석자들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가진 아인 랜드를 마치 교주처럼 받들었으며 그녀로부터 사상과 이념을 일방적으로 주입받았다.

인간의 이기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의 사상은 이내 개인의 부를 지키기 위한 사상적 토대를 필요로 해온 미국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 미국 보수주의의 기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아인 랜드라는 상당수 독자에겐 생소하게 다가올 인물의 삶을 소개한 후 책은 놀랍게도 2008년 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의 본질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얼핏 거의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는 두 장이지만 읽어 가면 갈수록 두 가지 문제가 서로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난다.

거대금융사의 돈 버는 법에 아연실색

대릴 커닝엄은 이 장에서 상업은행이 투자 및 보험 등의 영역에 진출하는 걸 제한한 글래스-스티걸 법이 무력화되는 순간부터 그 결과로 탄생한 거대 금융사들이 각종 파생상품을 개발해 영리를 취하는 과정, 나아가 전 세계적 금융위기의 단초를 제공한 신용파산스왑(COS)의 본질 등에 대해 설명해나간다. 경제적 지식이 충분치 않은 일반 독자들에겐 다소 어려운 내용일 수 있지만 저자는 만화의 장점을 한껏 살려 설령 중학생이라도 천천히 보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대목이 던져주는 충격은 그야말로 상당하다. 세계 금융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월스트리트에서 세계적 명성을 지닌 금융사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또 어떻게 고객과 감독기관을 농락해왔는지가 놀라움을 넘어 경악스럽게 다가온다.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스페인이 재정파탄에 빠지게 된 것이 이들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부터 최근 채무불이행 사태로 논란이 된 그리스가 유럽공동체에 가입하는 과정에서 리먼 브라더스가 어떤 불법적 행위를 자행했는지가 낱낱이 그려진다.

시티그룹, 제이피모건, 컨트리와이드, 리먼브라더스 등의 거대 금융그룹이 어떻게 정부규제를 무력화했으며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이라는 S&P, 피치, 무디스 등이 어떻게 이를 눈감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실로 아연해지기까지 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겉보기에는 말쑥한 신사처럼 차려입은 이들이 고급차를 타고 비싼 집에서 살며 저지른 악행이 돌고 돌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손실을 전가해 피눈물을 뽑아내는 동안 이를 감독해야 할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뒷돈을 받고 눈을 감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가 곪을 대로 곪아 미국 주택담보대출 문제로 터져 나오자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고 힘없고 약한 이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과정이 그려진다. 더구나 미국 정부가 국비로 쓰러지는 금융기업을 살려놓는 대목에선 세상에 정의란 존재하지 않는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배어나온다.

우파식 이기주의, 결코 미래의 대안이 되어선 안돼

책은 과거의 사건을 그려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성향을 해부하고 그로부터 희망을 찾는 3부가 <수퍼크래시>의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대릴 커닝엄은 이 장에서 진보와 보수가 하나의 생각일 뿐 아니라 변화시키기 어려운 이념이라 주장한다.

좌파와 우파는 그들의 성향이 발현되기 시작하는 어린 시절에 결정되며 이들은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부터 생활방식, 인간관계, 취향 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입증하는 여러 연구결과를 인용하고 진보와 보수가 지닌 장단점을 설명해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까지 논의를 발전시킨다.

책의 끝에서 대릴 커닝엄이 내린 결론은 아인 랜드식, 그러니까 우파식 이기주의는 결코 미래의 대안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비록 인간의 이기심에 기인한 자유주의가 횡행하는 세상이지만 좌파의 이타주의가 새로운 해답이 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는 세금과 복지가 인간이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대가라고 역설하는 것으로 책을 마치는데 아인 랜드로부터 금융계의 현실, 나아가 진보와 보수에 대한 담론까지를 아우른 대장정으로선 제법 깔끔한 끝맺음이었다. 결론까지 이르는 과정이 다소 급박하다는 인상이 없지 않지만 막막한 현실 가운데 미래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는 걸 고려하면 썩 괜찮은 결말이었다고 판단한다.
덧붙이는 글 <수퍼크래시>(대릴 커닝엄 지음 / 권예리 옮김 / 이숲 / 2015.08. / 1만 6천원)

수퍼크래시 - 세계경제를 약탈하는 법

대릴 커닝엄 지음, 권예리 옮김,
이숲, 2015


#수퍼크래시 #대릴 커닝엄 #권예리 #이숲 #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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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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