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는 알고, 나는 모르는 '한국말'

이주노동자 한국어교실 (2) '소분'을 아시나요?

등록 2015.10.23 10:30수정 2015.10.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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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보기에 요즘 도시 사람들은 삶이 아주 팍팍해 보입니다. 시골에선 그냥 풀이라 통칭하며 낫질로 베어버리기에 급했던 것들을 도시 사람들은 몸에 좋다고 난리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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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꼬마리 어릴적 열매가 옷에 붙으면 다른 아이들에게 던지며며 놀던 도꼬마리는 농부들에겐 거추장스런 풀이었지만, 비염 기관지에 좋다고 알려져 있다 ⓒ 고기복


그런 사람들은 식물의 이름과 그 효능, 이용법을 한의사 뺨치게 알고 있어서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들에게 도꼬마리, 어저귀, 바랭이, 방둥사니처럼 외국어 같은 식물 이름을 척척 알아 맞히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이 풀은 어디에 좋고, 이 나무는 어디에 효험이 있고, 이 열매는 어떻게 효소로 만들고, 독성이 있느니 없느니 등등 별 걸 다 안다 싶을 정도입니다. 식물에 도통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 앞에서 시골에서 자랐다는 말을 하기가 민망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거들떠보지도 않던 잡초에 불과하던 식물들이 '환삼덩굴, 쇠무릎' 등등 제 이름으로 불리며 대접받고 정겹게 여겨지는 걸 보면 태생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런 면에서 어린 시절을 그리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늘다보니 식물박사가 많아지는 거라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세상은 관심을 갖는 만큼 알게 되고, 찾아보려고 할 때 보이는 법이니까요.

이주노동자들과 이야기하다보면 한국어인데도, 마치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이 오히려 외국인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단순히 그들의 발음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단어나 표현 자체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소분 한다"는 태국 친구, 무슨 말인지...

숫타시니는 지난 봄부터 석 달 가까이 용인 이주노동자쉼터에서 생활했던 태국 출신 이주노동자입니다. 두 달 만에 쉼터를 찾은 그의 얼굴은 한결 밝고 건강해 보였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수심에 깊던 얼굴은 사라지고, 만면에 웃음 띤 그에게 하는 일이 어떤지 물었습니다.


"무슨 일해요? 할 만해요?"
"소분해요."
"소분? 아르바이트 해요?"
"아니요. 월급 받아요."

'소분'이라는 말에 '아르바이트 하느냐'고 되물었던 이유는 그때가 마침 추석 연휴가 끝난 다음 주였기 때문입니다. 제주에서는 추석을 앞두고 일가가 모여 벌초하는 것을 '소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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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를 끝낸 제주도 가족 공동묘지 막 이장하여 벌초가 가지런하지 못하다. ⓒ 고기복


요즘은 벌초대행업체가 많기에 한 숫타시니가 '소분'이라고 했을 때, 제주가 고향인 저는 자연스럽게 벌초를 떠올렸습니다. '외국 사람이 소분이란 말을 어떻게 알지? 같이 일하는 사람이 제주도 사람인가?'하는 생각과 함께요. 그래서 낫과 예초기로 벌초하는 시늉을 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이 '소분'이 뭔지 모른다고 하자,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습니다. '소분'이 '작게 나누다'라는 뜻이라는 것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지만, 숫타시니가 "소분 한다"고 했을 때는 작업 모습이 머릿 속에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가 답답해 보였는지 숫타시니는 "패킹, 패킹"이라고 말하더니, 옆에 있던 비닐봉지를 집어들고 무언가를 포장하는 시늉을 했습니다. 그는 농장에서 재배한 채소 등을 포장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스로 들어 온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작게 재포장하는 일이었습니다.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설명하는 장면이 상상이 가십니까? 도시 사람이 시골 사람에게 식물 이름과 그 효능 등에 대해 장황설(매우 길고 번거로운 이야기)을 늘어놓는 모습은 어떤가요? 우리말도 알고 보면, 아는 사람만 아는 말이 참 많다는 걸 이주노동자들과 이야기하며 알게 됩니다.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https://brunch.co.kr/@princeko/5 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교실 #소분 #이주노동자 #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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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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