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 강행, 토론 수업도 '흔들어'

[아이들은 나의 스승 51] 학교 교육 근간 흔드는 국정교과서 강행

등록 2015.10.25 18:02수정 2015.10.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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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 우려한 대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가 학교 교육의 근간마저 흔들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는 국정교과서냐 검인정교과서냐의 선택의 문제를 뛰어넘어 기성세대를 향한 조롱과 사회에 대한 불신으로 비화되고 있다. 국정화로 가든 번복이 되든, 아이들의 가슴에 남은 '생채기'는 쉽게 치유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명색이 대학 교수란 사람들도 '벼슬' 앞에는 별 수 없는 모양이죠? 뉴스에서 보니, 강단에선 학생들 앞에서 국정교과서 체제가 옳지 않다고 해놓고선, 벼슬자리에 오른 뒤엔 언제 그랬냐는 듯 소신을 뒤집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더군요. 카메라 앞에 당당히 서는 걸 보면 창피하지도 않은가 봐요."
 
한 아이의 기성세대를 향한 통렬한 일갈이다. 최고의 지성인이랍시고 대학에서 저들이 부르댔을 '정의'가 가증스럽다고도 했다. 아이들은 연신 쭈뼛거리는 나를 쳐다보며 '반불'이라며 웅성거렸다. '반불'은 '반박 불가'라는 뜻의 아이들끼리의 은어다. 주지하다시피, 교과서 국정화를 주도하고 있는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과 김재춘 전 교육부 차관은 저명한 대학 교수 출신으로 '한때' 교과서 국정화를 극렬 반대했던 이들이다.
 
그런가 하면, 아이들은 공무원 사회에 대한 불신도 드러냈다. 국민을 위한 공공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텐데, 지금 하는 짓을 보면 상관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꼬붕'과 뭐가 다르냐며 조롱했다. 정부가 아니라 '조폭'과 같다는 거다.
 
한 아이는 TV의 '유관순 공익 광고'를 봤다면서, 정부가 전국의 고등학생들을 숫제 바보로 몰아가고 있다며 발끈했다. 우리나라에서 아빠, 엄마 말고 맨 먼저 알게 되는 이름이 이순신과 유관순이라며, 유관순을 거론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3. 1 운동과 임시정부 단원을 수업할 수 있겠냐며 반문하기도 했다. 되레 3. 1 운동과 임시정부를 모를지언정 유관순을 모르는 아이는 한 명도 없을 거라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 공익 광고를 제작하도록 시나리오를 써준 이도 공무원일 텐데, 그가 과연 우리나라 사람일까 싶기도 했단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커진 아이들
 
한편, 정부와 여당의 국정교과서 강행은 갓 움이 트고 있는 토론 수업의 싹을 뿌리째 흔들어놓고 있다. 요즘 전국의 학교에서는 강의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다양한 수업 방식이 시도되고 있다. 시나브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학교의 영향도 없진 않지만, 무엇보다 획일화된 교수법에 대한 많은 교사들의 성찰에 기인한다. 그러한 노력들 중의 하나가 토론 수업이다.
 
"민주주의의 학습장이자 밑바탕이라며 선생님이 그토록 강조하신 토론이 이제 보니 아무런 쓸모도 없던데요. 얼마 전 TV에서 국정교과서 찬반에 대한 토론 프로그램을 아빠와 함께 시청했는데, 찬성 쪽 토론자들의 주장에선 도무지 논거를 찾아볼 수 없었어요.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냈어요. 반대 쪽 토론자들의 주장을 애초 들으려하지도 않더군요.

토론을 시작하기 전 전제조건이 자신의 주장이 번복될 수 있다는 것, 곧 상대방의 주장에 설득 당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그런 기본적인 자세도 안 되어 있는 이들이 토론이랍시고 나와 봐야 괜한 시간 낭비, 전파 낭비 아닐까요? 아빠도 혼잣말로 이러셨어요. '저럴 거면 토론을 왜 하는 거지? 권력을 앞세워 상대를 굴복시키려 나온 자리 같은데.'"
 
논리나 근거로 치면 누가 봐도 반대쪽 토론자들의 압승이지만, 그렇다고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는 정부와 여당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듯이, 상식과 논리보다 힘이 우위인 사회에서 토론은 설 자리를 잃고 만다. 교사들이 백날 토론 수업을 고민하고 연구하면 뭐하나. 학교 교육은 학교를 둘러싼 사회의 성숙과 발맞춰갈 때라야 비로소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겠나.
 
토론해봐야 별 수 없는 현실을 간파한 아이들은 다시 '아니꼬우면 출세하라'는 수십 년 전 몹쓸 처세술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될 게 뻔하다. 요즘 들어 아이들은 어떻든 권력만 있으면, 막대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고, 친인척 몇 명쯤은 번듯한 직장에 취직시켜줄 수도 있으며, 이렇듯 교과서조차 자신의 입맛대로 바꿀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됐다. 물론, 이는 정치에 대한 혐오로 귀결된다.
 
또, 더 이상 대한민국은 가망이 없다며 우리 사회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입에 담는 아이들도 여럿이다. 이번 국정교과서 문제처럼 이슈가 제기되면, 그 배경이 무엇인지, 주장의 근거는 또 어떤 것인지 따져보는 이들은 거의 없고, 당장 내 편 네 편으로 갈리어 서로 손가락질해대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꼴사납다는 것이다. 이슈가 뭐든 간에 영호남으로 갈리고, 노소가 갈등하는 양상으로 번진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솔직히 제 주변 어른들 중에 국정과 검인정 체제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에요. 외려 학생인 우리들이 설명해드릴 때가 종종 있거든요.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분석되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요. 심하게 말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교과서 국정화의 의도가 정확히 뭔지도 모르고 '날뛰는' 것 같아요."
 
"저희 엄마도 처음엔 국정교과서에 찬성했다가, 최근에 와서야 반대로 돌아섰어요. 수능을 준비하는 데 편할 거고, 사교육비를 줄여줄 거라는 찬성 쪽 주장에 귀가 솔깃하셨대요. 아직도 주변의 엄마 친구 분들은 자식이 대학 가는 데 도움이 되고 문제집 값 몇 푼이라도 아낄 수 있다면 국정이든 뭐든 상관없다고 말씀하신대요. 역사고 진실이고 별 관심 없다는 거죠."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찬반이 세대 간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건 솔직히 이해가 돼요.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겐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빼면 젊은 시절 추억이란 게 거의 없거든요. 이따금 말씀해주시는 '그때 그 시절'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건, 다른 지역과는 사뭇 동떨어진 경상도 쪽의 '독특한' 여론이에요. 그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사람들 아닐까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기성세대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학교 현장에서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더더욱 참담한 심정이다. 그들 앞에서 창피함 무릅쓰고 말을 건넸다. 우리나라 기성세대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돼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렇지만 이 땅의 어른들을 싸잡아서 욕하지는 말아달라고 덧붙이면서.
 
과거 영국의 수상 처칠이 그랬다. 한 나라의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기실 지금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이 갈등과 반목은 어쩌면 그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된 것이고, 그 혼란의 매듭을 풀 수 있는 이도 오직 그 '한 사람'뿐이다. 학교 교육마저 엉망진창으로 만들 게 아니라면, '교과서 정치'에서 당장 손을 떼야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 아이가 제안한 대로, 정부와 여당에서 지목한 '좌편향' 교과서들의 북한 주체사상 관련 단원을 함께 꼼꼼히 읽으며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과연 그 부분을 읽으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폄훼되는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부끄러워지는지 등 진솔한 소감을 서로 공유해보자는 것이다. 수업 중 되레 북한 정권에 좋은 점은 단 하나도 없었냐고 반문하는 아이는 있었어도, '친북의 기운'을 느꼈다는 경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아이는 대통령을 두고 '관심법'을 통해 사람들의 역모를 읽어냈다는 궁예에 비유하기도 했다. 대통령은 교과서를 대강만 훑어봐도 집필자의 '좌편향'과 '친북' 의도를 느낌으로 파악해낼 수 있다니, 궁예의 '도술'을 능가하는 초능력자라고 말했다. 이런 조롱까지 듣자니까,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까지 됐나 싶어 아이들 앞에 고개를 떨궜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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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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