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기사는 오늘도 '오성급' 농성장에 간다

[인터뷰] 삼성 직업병 피해자 아버지 황상기씨

등록 2015.10.31 11:42수정 2015.10.3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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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토가 붉게 물드는 가을은 단풍의 계절이다. 일상에 지친 이들은 주말에 산으로 향한다. 설악산이 위치한 강원도 동부는 이 시기 등산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다. 강원도 속초에 사는 황상기씨는 택시기사다. 속초의 택시기사에게 가을은 설악산을 찾는 등산객들로 가장 큰 성수기다.

그러나 황상기씨는 성수기 설악산을 뒤로 하고 1주일에 3번은 서울로 향한다. 그가 찾는 곳은 서울의 한복판 강남, 그곳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삼성전자 서초사옥이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 오성급 호텔에서 잠을 청합니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 가족인 황상기씨. 그는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 운전을 하며 시간을 쪼개 서울 농성장에 결합하고 있다. 그는 8년째 삼성전자의 진정어린 사과를 요구하며 반올림과 함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반올림 홈페이지> ⓒ 문주현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광장에 위치한 노숙 농성장, 비 가림막 하나 없는 이곳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은 지난 10월 7일부터 이곳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명 '단풍놀이'라고 부르며 산으로 마음의 위안을 찾을 때, 그는 이곳에서 마음을 다진다. 벌써 8년째, 누구보다 아꼈던 딸을 앗아간 삼성으로부터 사과를 받기 위해서다. 이제는 그 행동에 마침표가 찍히기를 희망하고 있다. 

황상기씨는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으로 세상에 알려진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가족이다. 2007년 3월 6일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했던 고 황유미씨는 22세 나이에 급성백혈병으로 숨을 거뒀다. 기흥공장에서 일한 지 1년 8개월 만에 백혈병 진단을 받고 약 2년의 투병생활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몰았던 택시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 대기업에 취업한 것만으로 큰 기쁨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 기쁨만을 생각하며 딸의 고통을 차마 다 헤아리지 못했던 아버지 황상기씨는 지금도 그 죄책감을 갖고 농성장을 향한다.

지난 10월 7일부터 삼성 직업병 문제 해결에 삼성전자가 진정성 있게 나서라는 내용으로 반올림이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장이 설치된 서울 강남역 8번출구 삼성전자 사옥 앞 모습 <사진 출처 - 반올림 SNS> ⓒ 반올림


"삼성이 백혈병 문제 해결? 왜곡 보도입니다"

10월 21일 인터넷은 삼성이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시작했다는 보도로 잠시 뜨거웠다.


그렇다면 삼성 본관 앞 '오성급 호텔'은 사라지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았다. 황상기씨는 오히려 이런 보도에 대해 "왜곡 보도"라고 표현하며 "삼성은 말과 행동이 다른 기업이라는 것을 느낍니다"고 말했다. '오성급 호텔'은 삼성이 약속한 '진정한 해결'이 이뤄질 때까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참소리>는 지난 18일 농성장을 방문하여 황상기씨를 만났다. 그들로부터 삼성이 지키지 않은 '약속'과 직업병 피해자들이 원하는 '진정한 해결'의 의미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국가와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세계적 재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의 사회적 책임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18일, 농성장에는 약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삼성 직업병 문제 사회적 해결을 위한 24시간 이어 말하기' 행사가 있는 시간. 이날은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운동본부' 이종회 대표가 주인공이었다. 황상기씨도 그의 말에 집중하며 농성장을 지켰다. 이 행사는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나와 삼성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의 탐욕이 만들어 낸 한국사회의 여러 가지 경악할 만한 사건들이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삼성전자의 노동자들이 백혈병이나 희귀질환으로 죽어가는 문제인거 같습니다."

"삼성을 철옹성 같다고들 합니다. 2005년 소위 '엑스파일' 사건으로 삼성공화국의 실체가 폭로되었을 때에도, 이를 고발한 사람들은 국회에서 쫓겨나거나 방송사에서 해고되었고,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 당시에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삼성이 제멋대로 하기가 갈수록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올림의 투쟁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고, 삼성의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만들고 삼성을 아래로부터 흔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말하기 행사가 끝나고 간단한 식사를 겸한 자리에서 황상기씨는 "8년 전, 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와 (삼성이 사과를 하고 조정에 들어간) 지금과 삼성이 직업병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8년 전, 딸이 투병 중 죽음을 맞이하고 한동안 외로운 싸움을 벌였다. 공장 앞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경비 병력에 둘러싸여 수모도 겪었다. 지금은 본관 앞 시위나 농성에서 그런 큰 마찰은 없다. '또 하나의 약속'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고, 지난 2014년 5월 삼성전자 권오현 사장이 사과와 보상,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뜻을 밝힌 후 태도는 달라지는 듯 했다. 

언론을 통해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겠다는 삼성의 말과 달리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황상기씨의 주장이다

"제가 화약약품 문제를 제기 할 때 삼성은 문제가 되는 화약약품은 쓰지도 않고 전리방사선도 없다고 했어요. 지금도 약 540여 종의 화약약품을 쓰는데 검증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언급도 없으니 달라진 것이 없지요.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병에 걸린 그 원인과 문제는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어요."

그동안 몇 차례 역학조사가 이뤄지기는 했다. 그러나 황상기씨는 피해자들이 인정하는 산업의학 전문의가 들어가지 않았고,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내용이 비공개되었기에 사회적 검증이 이뤄졌다고 보는 것은 이르다고 말했다.

8년만에 받아낸 사과, 그러나...

무엇보다 삼성은 권오현 사장이 말했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5월 14일 권오현 대표이사 명의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어려움을 겪으신 당사자, 가족 등과 상의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제3의 중재기구가 구성되도록 하고 중재 기구에서 보상기준과 대상 등 필요한 내용을 정하면 따르겠다."

8년 만에 받아낸 사과였다. 그리고 약속이었다. 당사자와 가족과 상의하고 객관적인 제 3의 중재기구가 구성되면 보상 기준과 대상을 실시하겠다는 약속. 그리고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기관을 통해 안전 보건 관리현황 등에 대해 진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재발방지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약속.

이후, 반올림과는 별도의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가대위)가 제3의 조정위원회 구성을 제안했다. 삼성과 반올림이 이 제안을 수용하면서 김지형 전 대법관을 비롯한 3인의 조정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지난 7월 23일 조정위원 3명은 1차 조정권고안을 내놓았다.

"이번 조정 사안은 '개인적 사안'을 뛰어넘어 '사회적 사안'이라고 보며...<중략> 사회적 과제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적 기구'가 독립된 주체로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는 임무가 주어져야 함."

조정의 의제와 원칙을 이렇게 밝힌 조정권고안은 삼성전자가 1000억 원을 내놓고, 독립적인 공익법인을 설립하며, 공익법인이 전문가를 통해 삼성전자 사업장을 점검하여 개선방안을 권고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공개 사과도 담았다.

그러나 삼성은 8월 3일, 1차 조정안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며 조정위원회가 제시한 공익법인 설립안을 거부했다. 삼성은 공익법인 설립이 해법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9월부터 일부 가족과 함께 독자적인 보상위원회를 구성하여 보상에 들어갔다. 지난 10월 21일 여러 언론이 <'삼성 백혈병' 해결 국면>와 같은 논조로 보도한 것은 독자적 보상과 관련하여 발표한 삼성의 보도자료가 근간이었다. 반올림, 가대위, 삼성이 참여하는 조정위원회는 언제 회의가 열릴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놓였다.

"지난 10월 7일 조정위원회가 열렸어요. 삼성은 나왔고, 가대위는 변호사가 대신 나왔어요. 삼성은 조정위에서 내놓은 1차 조정안을 거부한다는 소리는 못하고 계속 보류를 요청했어요. 그러니까 조정위 위원장이 다음 기일이 언제였으면 하냐고 물으니 그것도 말을 못한다고 보류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조정위 안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으니 그것도 보류라고 합니다. 사실상 거부한 것이죠."

황상기씨는 삼성전자 권오현 대표이사가 밝힌 약속을 거부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삼성이 조정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고 있다고 봤다. 1차 조정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조정위원회에서 조율하고 협상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삼성은 지난 해 '객관적 중재기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약속에 답이 없다. 보상위원회는 그렇게 반올림이 배재된 상황에서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으며, 강남역 8번 출구 오성급 호텔은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설치됐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에 걸려 사망한 노동자들을 소개하는 피켓이 농성장 주변에 설치되어 있다. 이들의 죽음, 누구의 책임이어야 할까? 아직 사회는 삼성의 책임이라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 문주현


"반올림은 외부단체? 반올림은 삼성 직업병 피해 문제 당사자"

황상기씨는 독자적인 보상위원회를 통한 보상 절차에 들어간 삼성의 결정에 대해 "일부 피해자들과 보상 문제를 이야기했다고 하면서 보상을 시작했는데, 옛날과 같은 방식입니다. 피해자들이 삼성에 대고 보상을 요구하면 비밀리에 만나 보상만 해주고 마는 그런 형식이죠"라고 말했다. 

최근 진행되는 보상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기준을 정하는 모양새라고 황상기씨는 평가했다. 이렇게 일이 추진될 수 있는 것은 일부 언론들의 힘도 크다. 삼성 직업병 피해 문제 해결을 위해 피해자들과 싸워온 반올림을 '외부단체'로 규정하며 공격하는 언론들이 있다. 이런 언론들은 반올림을 협상의 걸림돌, 반올림의 대표성에 문제가 있다는 보도를 발표했다. 이런 보도를 볼 때면 황상기씨는 기가 찬다.

"반올림이 제 3자라는 것은 전혀 말이 안 됩니다. 우리 유미가 병에 걸려 죽을 적에 이 문제를 알리고 싶어서 방송과 노동계, 정당, 언론에 제보를 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때 수원의 지역 신문 기자에게 고민을 털어놨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입니다. 2007년 8월 동서울터미널 2층에서 만나서 모든 이야기를 했고, 반올림을 만들었어요. 피해자 접수에서부터 문제 원인이 무엇인지 파헤쳤습니다. 삼성 직업병 피해자 가족인 저도 반올림 회원입니다. 반올림은 피해자 조직이면서 이 문제를 누구보다 열심히 한 당사자입니다. 반올림을 폄하하고 배제하고 싶은 삼성의 심리가 반올림을 제 3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반올림에 제보된 삼성 반도체 공장 직업병 피해자 현황 ⓒ 문주현


현재 반올림과 함께 산재 신청하고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는 피해자는 대략 60명이다. 삼성의 독자적인 보상위원회 구성 관련 규탄 성명에 55명의 피해자와 가족이 함께했다. 반올림을 외부단체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황상기씨는 반올림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피해자들을 조직하고, 산재 신청 등 초기대응을 했다. 가족대책위 뿐만 아니라 반올림도 당사자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무엇보다 삼성이 지난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제3자 기구를 통한 보상과 함께 재발방지라는 약속을 한 것은 사회적 합의였다. 삼성은 그 기구에 반올림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0월 30일 현재, 반올림의 농성은 24일째 계속되고 있다. 하루하루 삼성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동안의 세상에서 알아주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이곳에서 풀어놓는다. 벌써 약 10명의 피해자들이 이 자리에 나와 심정을 밝혔다.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삼성전사 사옥 앞에서 반올림과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의 노숙 농성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농성장에서는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 활동가들이 매일 돌아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갖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이 삼성에 요구하는 3가지를 간단하게 정리한 피켓 앞에서 선 사진 (사진 출처 - 반올림 홈페이지) ⓒ 반올림


"유미가 항암치료로 몸이 왜소했을 때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시고 이틀 동안 식사를 못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유미가 병에 걸리면서 치료로 저와 아내가 택시와 식당 일을 하면서 집 짓기 위해 모은 돈은 지금 남아있지 않아요. 우리 집은 (아이가) 삼성에 들어가면서 다 망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게 어디 유미 잘못입니까? 삼성 공장에서 일하다 화약약품과 방사선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닙니까? 이런 피해자들 그동안 치료도 안 해주고 비용 절감해서 사내 유보금 몇 백조를 쌓아놨어요. 그런데 사과 한 마디 없고 더 이상 그런 환자 만들지 않겠다는 재발방지책을 말하지 않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다른 무엇보다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삼성이 보상을 시작했고, 직업병 피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도를 하는 언론들이 진짜 보도해야 하는 이야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전북인터넷대안언론 참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삼성 #반올림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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