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교과서가 지배하는 학교, '선동꾼의 먹잇감' 길러낸다

[서평] 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

등록 2015.11.02 13:30수정 2015.11.0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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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는 "학교 혁신을 통해 이룩한 민주학교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민주학교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이는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지를 현장의 교육자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쓰인 책이다. 성과 중심의 경쟁 시스템이 압도하는 미국 학교 현장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 역사적인 사례 6가지를 각 실천 주체들의 목소리로 담았다.

편자인 마이클 애플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석좌교수는 지난 100년간 교육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책 20권 중 하나로 선정된 <교육과 이데올로기>를 1979년에 펴낸 세계적인 실천교육학자다. 교육학자가 되기 전에 교원노조의 대표로 활동한 진보적 지식인이다.


애플 교수의 '한국 사랑'은 유별나다. 그의 연구실 문에는 한글로 적힌 명패가 붙어 있다고 한다. 1989년 전교조 태동 당시 한국 방문 중 전교조 지지 발언으로 안기부(현 국정원)의 감시와 억류를 당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을 세 번째 방문한 그는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와 투병 중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울과 전주 등지를 돌며 '실천 교육'을 역설하였다.

<민주학교>는 애플 교수가 낸 책 중 가장 많은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역자는 그 요인을 애플 교수가 제시한 두 가지의 편집 방향에서 찾았다. 사례 중심으로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담을 것. 너무 내용이 많지 않고 무겁지 않아서 책을 읽을 틈이 없는 교육자들이 짬을 내서 틈틈이 읽을 수 있도록 할 것. 편집 의도는 주효했다. 1995년 초판이 나온 뒤 5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을 정도로 교육 현장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애플 교수는 이 책을 "민주주의에 대해 확신하고, 민주적인 생활 방식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며, 학교는 지금보다 더욱 민주적인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29쪽)는 교육자들을 위한 책으로 규정했다. 이런 의문이 든다.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 사회, 민주적인 학교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 아무 때나 민주주의를 말한다. 학교를 포함한 유수의 교육 기관과 조직들이 민주주의를 교육비전과 지표에 포함하고 있다. 이 정도면 민주주의가 더는 불필요하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찬사를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민주적 삶의 방식은 민주적 경험을 통해 학습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상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민주주의를 뒷받침해야 할 학교는 역사적으로 민주적이었던 적이 거의 없는 기관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학교들이 협력 대신 성적, 지위, 자원, 프로그램 등을 놓고 벌이는 경쟁을 강화해왔다. 민주주의의 성패는 공공선의 추구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학교들이 거의 전적으로 학생 개인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한 개인성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은 협력적인 공동체의 시민이 아니라 학점과 졸업장의 '소비자'가 된다. (36~37쪽)


애플 교수의 지적은 미국 교육학자 알피 콘이 <경쟁에 반대한다>에서 비중 있게 설명한 '이중구속'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이중구속은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정보를 줌으로써 두 가지 모두 할 수 없게 만드는 상태를 가리키는 정신분석 용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협력이 바람직하다고 하면서도 속으로 경쟁 구조를 유지하고 경쟁 심리를 주입하며 경쟁 행동을 부추기는 모순적인 상황이 이중구속의 상태다.

'비민주적인' 학교가 조장하는 이중구속의 상태는 학교 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전통'으로서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애플 교수에 따르면 학생들은 학교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 정의, 권력, 존엄성, 자존감에 대한 교훈을 학습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혁신적인 다섯 학교의 사례는 비민주적인 잠재적 교육과정에 터를 잡은 학교를 민주화했던 여정의 여정의 기록이다.

'공식 지식'(학교에서 배우는 공인된 지식-기자 주)에 대한 애플의 강조는 민주학교의 잠재적 교육과정을 넘어 명시적 교육과정에서의 민주화가 중요함을 역설해 준다. 학생들은 민주적인 실제 교육과정을 통해 '공식 지식'을 날카롭게 분석할 수 있는 '비판적 독자'로 성장한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지는 교육과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공식 지식에 대한 이러한 입장(공식 지식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리'인 양 가르치는 태도-기자 주)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지식이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특정한 가치와 이해관계 그리고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유통되는 것이다. (중략) 이들(비판적 독자-기자 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른 특정한 지식이나 관점과 충돌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다. 이것은 누가 한 말이지? 왜 그들은 그렇게 말했지? 이것을 왜 우리가 믿어야 하지? 우리가 이것을 믿고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으로 누가 이익을 얻는 거지? (39쪽)

철학자 고병권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서 민주주의가 동의를 조직하는 일이 아니라 이견을 제출하고 차이를 생산하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애플 교수는 이 책에서 정부 관료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이용해 사람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미리 짜인 결정에 대한 '동의를 조작'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국정화 시도가 '동의 조직과 조작'의 대표적인 보기가 아닐까.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역사 서술을 획일화한다. 역사에 관한 다양한 의견 제출은커녕 무조건적인 동의를 조직하거나 심지어 '조작'할 위험을 내포한다. 2013년 역사 교과서 국정화 파문의 최초 도화선이 된 교학사판 <고교 한국사>의 친일 미화적 서술이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교육학자 존 듀이는 학교를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라고 말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국정 교과서가 지배하는 학교교육은 민주주의 교육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정 교과서가 지배하는 학교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사범대학 제임스 머셀 교수가 한 말을 곰곰이 새겨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민주사회의 학교들이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지지하는 방향으로 역할을 하지 않고 그를 위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그 학교들은 사회적으로 쓸모가 없는 것이거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기껏해야 민주적 삶의 방식, 구체적으로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무관심한 채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자신들이 먹고사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분명히 민주주의에 적이 될 사람들, 즉 쉽게 선동꾼의 먹이가 될 사람들, 그리고 민주적 삶의 방식에 적대적인 지도자를 옹위하는 사람들을 교육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학교는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악을 끼친다. 이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56쪽에서 재인용)

<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마이클 애플․제임스 빈 옮김 / 강희룡 옮김 / 살림터 / 2015.10.26. / 270쪽 / 1,4000원)

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 - 혁신 교육의 방향을 묻는다

마이클 W. 애플.제임스 빈 엮음, 강희룡 옮김,
살림터, 2015


#<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 #마이클 애플 #실천교육학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살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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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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