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좋은 곳이라며 오게된 곳이 '동굴기획팀'

[광명동굴, 폐광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11] 김동수 테마개발과 동굴기획팀장 ①

등록 2015.11.17 13:39수정 2015.11.17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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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동굴기획팀장 ⓒ 윤한영


김동수 동굴기획팀장은 처음에는 광명동굴 개발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폐광 매입을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수도권 최고의 금속광산이었던 가학광산(광명동굴)이 근대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광명시가 폐광을 소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개발을 서두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광명시가 폐광을 매입한 뒤 광명시청 공무원들에게 폐광 견학을 시킬 때 그는 일부러 동굴 견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빌자면 '버틴 것'이라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폐광 개발 반대 입장을 은근히 드러냈다는 설명이다.


그런 그가 테마개발과가 신설되면서 동굴기획팀으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인사발령이 난 뒤 양기대 시장은 그에게 "좋은 곳으로 보내주니 열심히 일하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 동굴기획팀은 결코 '좋은 곳'이 아니었다. 일부에서 '선택받는 자들만 가는 곳이 테마개발과'라고 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가고 싶은 부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테마개발과로 간 뒤 가장 큰 부담은 폐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폐광 개발은 남의 일이었으므로 그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폐광에 들어가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으니 들어가기는 해야겠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나. 오랫동안 버려졌던 폐광이 무너질 것 같아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동굴에 처음 들어갈 때 무너질까봐 무서웠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저한테 동굴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준 사람이 없었거든요. 다른 사람들도 40년 정도 버려진 곳이라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면서 겁을 줬습니다. 그 때만 해도 내부 안전공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잖아요. 들어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무척 고민 많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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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동굴 ⓒ 윤한영


광명동굴은 금, 은, 동, 아연 등을 캐내던 금속광산으로 내부가 경암(단단한 바위)으로 이뤄져 있어 1912년 채광 시작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다. 이런 사실은 개발을 시작하면서 구체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발 초기에는 이런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개발에 참여한 공무원들 가운데 일부는 동굴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건 김 팀장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렇게 무서운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들어갈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아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는 피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폐광에 들어갔다. 폐광은 어둡고 습했다. 처음 들어가는데 흙냄새가 훅 끼쳐오는 것이 불쾌했다.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렇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억지로 광명동굴과 낯을 익히게 된 김 팀장은 업무 때문에 수시로 동굴에 들어가야 했다.

그가 담당한 업무는 광명동굴 홍보, 동굴관련 국내‧외 업무협약, 동굴관련 사업 기획 등이었다. 그때만 해도 부서가 신설되다 보니 특별히 할 일이 없어 홍보에 주력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상태였다. 홍보를 하려면 동굴을 잘 알아야하지 않나. 그러려면 동굴에 자주 들어가서 동굴과 낯을 익혀야 했다.

첫발을 떼기가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쉬워진다. 그는 동굴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동굴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냈고, 나중에는 두려워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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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동굴기획팀장 ⓒ 윤한영


2012년 가을, 광명동굴은 개방 구간이 아주 짧았다. 사람들이 왕래하지 못하게 막아놓은 구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개발이 시작되기 전이라서 더 그랬다. 동굴을 수시로 드나들던 그는 막아놓은 구간이 궁금해졌다. 동굴에 익숙해지면서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홀로 탐험(?)에 나서기 시작했다.

"물 한 병을 허리춤에 차고, 랜턴을 들고, 헬멧을 쓰고 동굴 안을 돌아다닌 거죠. 가면 갈수록 신비하고 좋았어요. 밧줄을 타고 지하에도 내려가니 색다른 느낌이 있더라구요. 수시로 돌아다녔어요. 동굴 벽에 예전에 광부들이 써놓은 낙서를 보면서 가끔은 울컥하기도 했죠.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의 애환이 직접 와 닿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정이 쌓이는 거였어요."

이제는 틈만 나면 동굴 탐험에 나섰다. 동굴은 그에게 있어 신세계였다. 이런 곳이 있구나, 정말 사람의 힘은 대단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동굴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동굴을 홍보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무섭고 싫은데 좋은 곳이라면서 볼만하다고 사람들에게 들어가서 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양심이 있지.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들어가 보라고 얘기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죠."

동굴관련 기획과 홍보를 담당했지만 그때만 해도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광명시 홍보실이 광명시 홍보를 전담한다면 테마개발과 동굴기획팀에 소속된 김 팀장의 홍보 업무는 광명동굴로 한정된다. 그러나 홍보 업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김 팀장 입장에서는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현장이었던 수도권 최대의 금속광산은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폐광 내부에 딱히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세울 자랑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어떡하나. 홍보를 담당했으니 동굴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수 있게 홍보 전략을 세워야지.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한 김 팀장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방송사와 언론사 홈페이지를 검색하면서 웹서핑을 거듭했다. 그때의 막막함이라니. 그는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어 방송사와 언론사 홈페이지 게시판 등에 광명동굴을 알리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글을 주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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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동굴 예술의 전당 개관은 언론사들의 집중 관심을 받았다. ⓒ 윤한영


그랬던 광명동굴에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29일, 대한민국 최초로 동굴 전문 공연장인 '동굴 예술의 전당'이 개관했기 때문이다. 동굴 예술의 전당 개관을 앞두고 지상파 방송국과 중앙언론 등에서 취재요청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김 팀장은 밀려드는 취재요청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개관식 날,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론사 16곳에서 취재를 나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홍보실에서 취재 지원을 했지만, 그가 광명동굴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홀로 동굴 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땀을 뻘뻘 흘려댈 수밖에 없었다.

"엄청나게 힘들었어요. 그 추운 동굴 안에서 땀을 흘리면서 돌아다녔으니 말 다 했죠. 그런데 정말 신났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날이 제일 재미있고 신났던 것 같아요. 그전까지는 제발 취재를 오라고 부탁을 해도 잘 오지 않았거든요."

그게 이제는 다 옛날이야기가 됐다. 지금은 광명동굴이 너무 잘 알려져서 일부러 취재요청을 하지 않아도 언론사에서 취재를 하러 올 뿐만 아니라 광명동굴을 찾은 관광객들도 블로그나 페이스북 등에 방문소감을 올리면서 자발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동수 테마개발과 동굴기획팀장 ②로 이어집니다.
#김동수 #광명동굴 #양기대 #광명시장 #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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