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서울로 헌책방 나들이

[시골에서 헌책방 나들이] 서울 신촌 <숨어있는 책>

등록 2015.11.09 16:03수정 2015.11.09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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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에서 서울까지 시외버스로 달리자면 네 시간 사십 분쯤 걸립니다. 이동안 시외버스에서 책을 서너 권 읽고, 때로는 너덧 권을 읽어요. 서울로 나들이를 갈 적에는 서울로 가는 길에 읽을 책만 챙긴 뒤, 서울에 있는 헌책방을 한두 군데쯤 들르려 합니다. 책방마실을 하며 새로 장만한 책이 있으면 고흥으로 돌아오는 다섯 시간 가까운 버스길이 심심하지 않아요.

책방 앞. <숨어있는 책>은 지하에 있고, 책방지기는 책방 어귀에서 '새로 들어온 헌책'을 손질하곤 한다. ⓒ 최종규


서울 충무로 언저리에서 볼일이 있지만, 고속버스터미널역에서 내린 뒤 지하철로 갈아탄 뒤 신촌으로 갑니다. 사람이 아주 드문 시골에서 조용히 있다가 시외버스를 내릴 무렵부터 수많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입니다. 예전에 이 도시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만, 이제 이 도시는 저한테 몹시 낯섭니다. 낯설고 시끄러운데다가 어수선한데, 지하철을 타려고 지하도와 지하상가를 걸으면서 간판이나 가게가 아닌 책을 읽습니다. 걸음을 조금 늦추면서 천천히 책을 읽습니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흐르는 책을 손에 쥐고 천천히 걷다 보면, 아무리 많은 사람과 가게로 북적거리는 한복판을 지나가더라도 귀에 아무런 소리가 안 들립니다.


신촌역에서 전철을 내려 바깥으로 나옵니다.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골목에서는 책을 가방에 넣습니다. 걸음을 빠르게 놀려서 헌책방 <숨어있는 책>으로 갑니다. 책방 어귀에는 헌책방지기 아저씨가 걸상에 앉아서 '갓 들어온 헌책'을 손질하면서 연필로 책값을 적어 넣습니다. 예나 이제나 이 모습이 아름답다고 여겨서 사진으로 찍으려는데, 헌책방지기 아저씨가 책을 들어 얼굴을 가립니다. "야, 그동안 많이 찍었는데, 이제 그만 찍어. 이제 안 찍어도 되잖아." 지난 1999년부터 올 2015년까지 이곳을 드나들 적마다 늘 사진을 찍었으니, 그동안 찍기도 많이 찍었습니다. "예전에는 예전 모습이고, 오늘은 오늘 모습인걸요."

날마다 새로 장만하는 헌책을 찬찬히 손질해서 연필로 책값을 적어 넣는다. ⓒ 최종규


책꽂이 들여다보기 ⓒ 최종규


서울하고 무척 먼 시골에 살기에 예전에는 사흘에 한 번쯤 들르던 이곳을 한 해에 두 차례 들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한 해에 두 차례쯤 들러서 인사를 나누고 책을 만날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서울에 사는 분이라면 이곳을 자주 드나들면서 아름다운 책을 넉넉히 껴안을 수 있을 테지요.

동화책 <신지식-눈이 또 하나 있었으면>(일지사,1985)과 시집 <최정례-레바논 감정>(문학과지성사,2006)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고르기로 합니다. 신지식 님 동화책은 국민학교를 다니고 중학교를 다닐 적에 즐겨 읽었습니다.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눈이 또 하나 있었으면>을 읽은 적이 없다고 느껴서 새삼스레 집어듭니다. 그런데 책 안쪽에 글쓴이 서명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에게"라고 적혔어요.

신지식 님이 남긴 손글씨를 헤아리면서, 묵은 동화책을 고른다. ⓒ 최종규


시집 <레바논 감정>도 글쓴이가 누군가한테 이녁 이름을 적어 준 책입니다. 다만, 그냥 선물한 책인지 아니면 작가사인회 같은 자리에서 이름을 적은 책인지 알 길은 없습니다.

헌책방을 다니면 이따금 글쓴이 손길이 깃든 책을 만납니다. 이러한 책은 선물을 받은 책이거나, 작가한테서 이름을 받고 싶어서 애틋하게 건사한 책입니다. 어느 쪽이든 한결 포근한 기운이 깃든 책이라고 느낍니다.


서울 고려대 후문 쪽에 있던 인문사회과학책방에서 쓰던 책싸개가 고스란히 남은 <노동의 새벽>을 보았다. 이 시집은 저한테 있지만, 이 책싸개를 건사하려고 굳이 다시 이 시집을 장만했습니다. ⓒ 최종규


'고려대 정경대 후문 입구'에 있던 <장백서원>에서 손수 만든 책싸개 종이로 겉을 휘 두른 책이 하나 보여서 들여다봅니다. 어떤 책이기에 이렇게 했나 했더니, <박노해-노동의 새벽>(풀빛,1984)입니다. 간기를 보면 1984년 첫판인 듯 나오지만, 책날개를 보면 '풀빛판화시선' 번호가 26번 황지우 님 시집 이름까지 나옵니다. 그러니까, 풀빛판화시선 26번인 황지우 님 시집이 나오고 난 뒤에 새로 찍은 판인 셈입니다. <노동의 새벽>은 무척 많이 찍어서 무척 많이 팔렸다고 하지만, 이처럼 '발행부수'를 제대로 밝히지 않아서 얼마나 찍어서 팔렸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튼, 이 시집을 싼 책싸개 종이는 유연복 님 판화그림입니다. 1990년대 끝자락까지 책방마다 책방 이름을 넣은 책싸개 종이를 널리 썼고, 2000년대 첫무렵에도 이런 책싸개 종이는 이럭저럭 있었으나 요새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수정-뼛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레디앙,2008)이라는 책을 봅니다. 예전에는 그리 눈여겨보지 않던 책이지만, 요즈음 눈여겨보는 이름(작가) 가운데 하나인 목수정 님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목수정 님을 낳은 아버지는 목일신 님이고, 목일신 님을 낳은 아버지는 목치숙 님인데, 목치숙 님은 전남 고흥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목일신 님은 전남 고흥에서 동요를 쓰셨습니다. 고흥에서는 '목일신 동요제'를 해마다 열기도 해요. 그리고, 우리 식구가 고흥에서 단골로 타는 택시를 모는 분도 '목 씨'이신데, 고흥에서 목 씨는 모두 한 집안과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책꽂이 들여다보기 ⓒ 최종규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성당 옆 백화점에서 붉은 벽돌색 천을 샀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바느질해 만들었다. 곧 입학하는 소르본느 어학당에 들고 갈 가방이었다. (25쪽)

클로딘의 지적은 대체로 문화적 차이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이 다름과 차이로 보이지 않고, 옳고 그름으로 보였던 것은 오랜 제국주의 국가의 후예로서 그녀가 뛰어넘을 수 없는 관성 때문이라고 난 판단했다. 세계사와 프랑스사를 따로 배우지 안고, 프랑스사 하나만 배우면서 역사과목을 끝내 버리는 나라에서 어떻게 프랑스가 180여개의 국가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236쪽)

우리 식구가 고흥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살지 않았으면, 또 우리 식구가 단골로 타는 택시를 모는 분이 '목 씨' 집안 분이 아니었으면, 목수정이라는 이름도 잘 모르거나 더 늦게 알았거나 했으리라 느낍니다.

중국에서 날아온 책. ⓒ 최종규


<박충록-김택영 문학 연구>(료녕민족출판사,1986)라는 책을 만지작거립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책입니다. 중국에서 나온 책을 한때 서울에 있는 몇 군데 새책방에서 살 수 있었으나, 요즈음은 거의 구경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이 헌책방에서 중국 조선족이 펴낸 책을 여러 권 구경하면서 새삼스레 고맙습니다. 멀면서 가까운 한겨레가 한국말로 빚은 열매인 책을 만날 수 있고, 중국 조선족 작가와 학자가 마음에 품는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으니 고맙지요.

이 책의 제1장 그의 창작활동과 세계관에서 시인 김택영이 23살 때인 1872년 4월에 도보로 평양에 갔다가 다시 해주에 갔다왔다는 것과 이해 8월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해의 총석정까지 유람했다는 것을 말하였다. 시인은 또 29살 때인 1878년 8월에 리상동과 함께 3남지방을 60일간 돌아다니였는데 3천 리를 걸었고 개성지방은 거의 다 돌아다니였다. (79쪽)

1800년대 끝무렵에 두 다리로 걸어서 해주와 평양을 오가고, 금강산을 다녀오고, 전라남도와 경상남도를 걸었다니, 그무렵 김택영 님이라는 분은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무렵에는 길도 제대로 없었다고 할 텐데, 숲길과 멧길을 걸으면서 어떤 생각을 마음에 품었을까요.

흑룡강성에서 한겨레 옛이야기를 갈무리해서 엮은 책. 이러한 책을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으니 더없이 고맙다. ⓒ 최종규


<림승환·한광일·서종식 정리-차병걸 옛이야기집 상권 팔선녀>(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1987)를 봅니다. 차병걸이라는 할아버지가 입으로 들려주는 옛이야기를 학자 세 사람이 녹음기로 담아서 풀어서 엮은 책이라고 합니다.

머슴군 총각과 해종일 즐겨놀다가 승천할 때가 되자 맏선녀가 품속에서 옥퉁소 하나와 쥐면 한줌밖에 안 되는 도포 하나를 머슴군에게 주며 "그대가 이 옷을 입고 이 옥퉁소를 불면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을지오니 절대 타인의 손에 들어가지 말게 하여야 하오이다. 우린 올라갈 시간이 되여 돌아가오니 그대는 부디 인간 세상의 희락을 누리소서." (175쪽/머슴과 보물)

남녘에서는 '맏선녀' 같은 말을 쓰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이나 '맏이' 같은 말은 씁니다. 학교에서는 수석교사 같은 이름을 쓰기도 하고, 신문사에서는 대기자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는데, '맏교사'나 '맏기자' 같은 이름을 써 볼 만하리라 느낍니다. '맏선배'라든지 '맏선수'라든지 '맏일꾼' 같은 이름을 쓸 수도 있을 테지요.

손바닥책인 <진성기-사투리로 따낸 남국의 민담(제주도 옛말)>(형설출판사,1980)을 재미나게 읽습니다. 제주말로 담은 제주 옛이야기도 구성집니다. 청소년문학 <브라이언 코피/감종호 옮김-두 소년>(녹진,1989)을 고르고, <이오덕-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청년사,1979)라는 책도 고릅니다. 제가 고흥에서 꾸리는 서재도서관에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가 한 권 있으나, 한 권 더 둘 만하기도 하고, 책 안쪽에 쪽글이 붙어서, 이 쪽글을 건사하려는 마음으로도 고릅니다.

제주 옛말을 갈무리한 예쁜 책. ⓒ 최종규


이오덕 님이 시골 아이들 글을 모아서 엮은 책. ⓒ 최종규


○○야! 오래 전부터 약속하고서 이제야 책을 사 주게 되어 무척 미안하구나. ○○가 원하는 책을 사려고 여러 군데의 서점에 들렀지만 없더구나. 그래 언니가 고심하던 끝에 고른 책이 바로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라는 책이란다. 내용을 보니 농촌 어린이들의 생각들이 꾸밈없이 적혀 있길래 혹 ○○가 작품을 쓸 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샀단다.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좋은 글 훌륭한 글 쓰거든 가끔 언니에게 편지에 써 보내 주라. 81.9.18. ○○ 언니가

시골 아이들 삶과 생각이 꾸밈없이 깃든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입니다. 이 책에 앞서 시골 아이들 이야기를 꾸밈없이 책으로 내자고 생각한 어른은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시골 아이들 이야기를 오롯이 책으로 내자고 생각하는 어른은 퍽 드뭅니다. 더 헤아려 보면, 오늘날 시골에서는 아이들 숫자가 매우 적기도 한데, 매우 적은 아이들조차 하루 빨리 도시로 보내려는 교육을 시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한테 '시골에서 사는 즐거움이나 보람'을 가르칠 수 있는 초·중·고등학교 교육 얼거리가 한국 사회에 없습니다.

<우리도 크면 농부가 되겠지> 안쪽에 꽂힌 편지. ⓒ 최종규


도시를 떠나서 시골로 가려는 분들이 해마다 꾸준히 늘기는 하되, 막상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시골에서 즐겁고 보람차게 살아갈 길을 마련하거나 살피는 정책이나 제도나 문화나 교육은 거의 없다고 할까요.

나는 어머니하고 장에 갔읍니다. 쌀을 자루에 5되 이고 갔읍니다. 어머니는 한 말을 가주 갔읍니다. 길이 없었읍니다. 4번을 쉬었읍니다. 임동 가서는 쌀을 팔았읍니다. 장을 봤읍니다. 다 보고 난 뒤에 점심을 먹었읍니다. 점심은 빵을 100원 어치 어머니하고 먹었읍니다. 먹고 집으로 왔읍니다. 논에 치는 약하고 기름 한 병하고 가지고 왔읍니다. 집에 올 때는 2번 쉬고 계속 왔읍니다. 집에 오니 한나절 조금 넘었읍니다. 그래서 배가 고펐읍니다. 보리를 빘읍니다. 그래서 저물었읍니다. (장에 가기. 안동 길산 2년 김수미. 1978.6.5.)

서울에 있는 책을 시골로 옮기는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무엇이든 시골에서 도시로 보내는 얼거리이지만, 우리 식구는 시골에서 살기 때문에, 서울로 나들이를 와서 장만하는 책은 서울을 떠나서 시골로 갑니다. 시골은 젊은이도 어린이도 푸름이도 빠르게 줄어드는 터라 '시골에 있는 도서관'으로 책을 보러 올 손님도 해마다 빠르게 줄어든다고 할 만합니다. 아직도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같은 말이 떠돌지만, 사람도 책도 이야기도 시골로 보내고, 시골에서 사람이 삶을 짓고 책을 쓰며 이야기를 밝히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책과 걸상. ⓒ 최종규


사람이 많은 곳에 책방이 있고 도서관이 있으면, 틀림없이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넉넉히 누릴 수 있습니다. 시골처럼 사람이 드문 곳에 책방이나 도서관이 있다면, 책방은 문을 닫기 쉬울 테고 도서관은 썰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도 보면서 앞으로 살아갈 자리도 함께 내다보려 합니다. 오늘 이 시골에 사람이 아주 적더라도, 앞으로 이 시골자락에 고운 꿈을 품으며 슬기로운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리라 봅니다. 한손에는 호미를 쥐어 밭을 일구고, 다른 한손에는 책을 쥐어 마음을 가꾸는 길을 열고 싶습니다.

두 다리로 누리는 책방마실은 새로운 숨결을 베풀어 줄 수 있습니다. ⓒ 최종규


여러 가지 책들을 고맙게 만나는 헌책방.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서울 신촌 〈숨어있는 책〉 02) 333-1041 / 서울 마포구 신촌로12길 30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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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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