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모는 오늘도 '메이드 인 베트남' 쥐포를 준비한다

[인터뷰] <심야인권식당> 펴낸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류은숙씨

등록 2015.11.10 21:20수정 2015.11.1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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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인권식당-인권으로 지은 밥, 연대로 빚은 술을 나누다>(따비 펴냄)의 저자인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류은숙씨. 류씨는 "한국 사회가 워낙 어렵다 보니 극단적인 고통에 처하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이유로 그런 애기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며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권을 좀 더 가깝게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쓰게 됐다"고 소개했다. ⓒ 유성호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2가, 작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오른쪽 한 귀퉁이 건물에 '심야인권식당'이 있다. 낮이면 인권 관련 토론과 강좌가 열리는 이곳은 밤마다 술상이 펼쳐지는 '술방'으로 변한다.

20㎡(6평) 남짓한 술방에서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인권활동가, 관련 연구자와 법조인, 때로는 인권 침해 당사자들이 찾아와 따뜻한 밥을 한술 뜨고 술잔을 경쾌하게 부딪치며 말한다.

"주모, 여기 한 잔 더요!"

사회 소수자들, 인권 운동 안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성 들여 밥과 술을 준비하는 '주모'는 바로 인권활동가 류은숙씨다. 그가 상근 활동가로 있는 인권연구소 '창'은 원래 인권의 실천과 구제 방법을 연구하고 인권실태보고서 등을 내는 진보적 연구단체이지만, 주모의 수고 덕에 종종 '눈물 밥'에 '웃음 안주'를 나누는 술방으로 변하곤 한다. 10월 말, 바로 그 술방에서 주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류은숙씨는 인권을 식탁에 비유하곤 한다. "차린 음식이 없어도 모든 이가 편한 마음으로 둘러앉을 수 있으며, 누구나 사회 속 자기 자리에 정당하게 앉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주로 "집밥을 먹는 게 비일상적인 경험인 사람들"이라는 설명도 이어졌다. 술방에서 나눈 음식과 이들 이야기가 버무려져 최근 신간 <심야인권식당-인권으로 지은 밥, 연대로 빚은 술을 나누다>(도서출판 따비 펴냄)가 나왔다.

책 속에는 수많은 이름 없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돼 인권 유린을 당한 피해자, 늘 거리에서 약자와 함께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M신부, 집회마다 경찰들의 인권 침해를 감시하는 인권변호사, 동료의 자살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성 소수자 인권활동가 등. 모두 익명이지만, 관련 뉴스를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금세 알만한 이들이 등장해 어디에서도 하지 못했던 속 얘기를 풀어놓는다.

오지랖 넓고 손 큰 주모가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행복하다. "파업이 오래되다 보니 서로 긴장이 심해져서 마주하기를 피했는데, 이렇게 같이 모여 앉으니 정말 좋네요." 서울 대한문 앞에서 장기 복직투쟁을 이어가던 한 노동자의 말은 읽는 사람마저 코끝이 찡하게 만든다. 천막 농성장이 안방이고 길가 한뎃잠이 일상인 이들에게, 그녀가 건네는 "오셔서 잠깐 목축이고 가시라"는 한 마디는 그 자체로 시원한 생수일 터다.


나처럼 쌍방의 관계 또는 당사자 관계에서 한없이 미련하고 서툰 사람은 자주 궤도이탈을 한다. 하지만 그런 때일지라도 현명한 제삼자가 되려는 노력은 멈추고 싶지 않다. (…) 숱한 갑을관계의 엮임에서 누구 곁에 서서 누구 손을 잡아줘야 할지를 아는 제삼자, 빗발치는 말과 글에서 자유로운 의견과 사람에 대한 모욕을 구별할 줄 아는 제삼자, 나의 고통에 쓰라린 만큼 타인의 고통에 반응과 울림을 보일 줄 아는 제삼자.

이 책의 제목을 빌린 (일본드라마) <심야식당>에서 나는 그런 현명한 제삼자들을 본다. 주인장이나 손님들이나 당사자들 문제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 자기비하에 빠져 있는 걸 내버려두진 않는다. 반대로 누군가 남을 무시하고 잘난 척을 할 때는 단호한 반응을 보인다. 없는 듯 있는 강력한 법이 거기에 있다.
- <심야인권식당>, 277~278쪽 

류씨는 책에서 "내가 끼고 싶은 '장'은 나를 중심으로 골골거리는 곳도 남을 중심으로 앓는 곳도 아닌, 공통된 고통을 놓고 의논하는 장"이라고 말한다. "하는 것도 구차하고 듣는 것도 지치는 문제를, 공유할 수 있는 고통으로 만드는 힘은 여럿의 연대뿐"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손님들은 오늘도 술방으로 모여든다. 세상에서 느낀 모욕과 눈물을, 견딜 만한 안주로 만드는 이곳 '인권심야식당'에서 현명한 주모를 만나기 위해.

다음은 류은숙씨와 한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파업노동자 35명 모여 '닭죽 파티'... "모욕감 함께 나누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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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인권식당> 술방의 무대가 된 작은 공간은 10명이 간신히 앉을 수 있지만 사회적 약자와 인권 침해 당사자에게는 위로와 웃음을 주는 곳이다. 술방 주모를 자처한 류씨는 인권을 식탁에 비유하며 "차린 음식이 없어도 모든 이가 편한 마음으로 둘러앉을 수 있으며, 누구나 사회 속 자기 자리에 정당하게 앉을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 유성호


- 저서 <심야인권식당>을 소개한다면.
"보통 인권 문제라고 하면, 상당수 사람은 매우 극악하고 유별난 사건만을 떠올린다. 또 한국 사회가 워낙 어렵다 보니 극단적인 고통에 처하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이유로 그런 얘기를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책 속에 나온 이들이 인권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주요 인권 문제의 대명사같이 나오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제 모습을 통해, 인권을 좀 더 가깝게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 쓰게 됐다."

- 책에 보니, 술방 주모를 자처하는 이유로 '일상성의 중요성'을 꼽았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남보다 잘난 사람이 돼야 한다, 멋진 사람이 돼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자란다. 제가 20여 년 정도 해온 인권운동 안에서도 큰일, 위대한 일, 허드렛일 이런 구분이 나뉘는데, 저는 그런 구분 자체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다 쓸모가 있는 일이지 이 세상에 '허드렛일'은 없다는 게 제 생각이다.

저는 허드렛일에 마음이 가고, 마음 가는데 몸이 안 갈 수가 없다. 감정노동도 그런 것 아닌가. 모든 노동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노동인데, 그런 걸 누군가에게만 전가하고, 일부에게만 감정이 전가돼 노동의 가치가 절하되곤 한다. 제가 보기엔 감정노동자들의 월급도 올라야 하지만, 일에 대한 근본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 저자의 말처럼, 우리 사회가 '몸 노동'의 가치를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몸 노동'이라는 건 연구소를 설립할 때 오신 분 중 한 분이 메모로 남긴 말이다. '나는 돈은 없지만 몸 노동으로 돕겠다'는 얘기였다. 학창 시절 선생님들이 공부 안 하면 했던 '너 그러다 공장 간다, 몸 일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인데, 실은 몸 노동도 중요하다. 한편으론 그런 이분법도 이상하다. 사람이 몸을 움직일 땐 생각도 함께 가는 건데, 몸과 마음을 나눈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않나."

- 책 속에 다양한 만남과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말복 날 파업 노동자 35명 정도를 불러서 닭 15~16마리를 고아 '닭죽 파티'를 벌였던 게 기억에 남는다. 신기한 게, 그 에피소드를 글로 쓰다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바로 앞 골목길에서 당사자들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런 분들은 주로 투쟁을 위해 단식하고 머리 깎고… 그렇게 안타까운 자리에서 만날 때가 많다.

M신부님 반응도 기억난다. 이 신부님은 원래 만날 때마다 제게 '글은 써서 뭐하니 현장에 있어야지' 말씀하시는데, 최근 봤을 땐 이 책 읽으면서 두 번 울컥했다고 하시더라. 아마도 M신부님이 활동하면서 (경찰 등으로부터) 느낀 모욕감을 누군가 함께 기억해준다는 사실 때문일 거다. 우리가 영광이나 무용담 등 잘한 일은 서로 잘 얘기하지만, 보통 모욕의 경험을 공유하기는 쉽지 않지 않나."

이주노동자를 위해 준비된 '메이드 인 베트남' 쥐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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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구소 '창'은 인권침해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창이기도 하고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몰아세우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창이기도 하다고 류은숙씨는 설명한다. ⓒ 유성호


- 술방을 찾은 손님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나.
"상주하다시피 하는 연구자들과 법조인들도 기억에 남지만, 아무래도 우연히 만난 사람, 다시 만날 기회가 없는 사람이 생각난다. 후배로 소개 함께 밥을 먹었던 20대 베트남 이주노동자 두 명은 그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책 속에는 서먹하던 이들이 '메이드 인 베트남' 쥐포를 구워 먹으며 친해지는 내용이 나온다-기자 말).

후배들마저 연락이 끊겨, 그들이 아직 대한민국 땅에 남아 또 다른 모욕을 당하고 있을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갔을지 알지 못한다. 그분들은 거처 없이 계속 이동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들이 언제 올지 몰라서, 되도록 '메이드 인 베트남' 쥐포는 늘 사둔다." 

- 술방 모임을 통해 소위 '인권 감수성'도 많이 발전할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인권 감수성을 자기감정이 따뜻해지고 친절해지는 것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저는 감수성이란 그냥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책임'을 뜻하는 거라고 설명한다. 그러려면 상대의 어떤 것에 응답할까, 타인의 생각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응답할까 이런 걸 고민해서 판단해야 하지 않나.

특히, 주는 쪽에서 편한 것만이 선은 아니다. 보통 자신이 볼 때 상대가 좋아할 거라고 미리 판단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한 장애인 분과 함께 식사하는데, 열 손가락 중 한 손가락만 쓸 수 있는 분이라 잘 먹지 못하는데도 매운 음식을 엄청나게 좋아하시더라. 사방에 빨간 국물이 튀는 데도 좋아하셨다. '내 마음대로 재단하면 안 되겠다, 그들도 매운 오징어를 원할 때 먹어야 한다'. 그렇게 또 하나 배웠다."

- 인권활동가로서 보기에 2015년 현재의 인권 상황은 어떤가.
"사람들이 보통 '이제 세상 많이 좋아지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자기가 인권 침해를 받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고통의 중심에 있는 사람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다. 저 또한 그렇게 말하는 게 두렵다. 노동 문제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사람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눠 보진 않았다. 인권이 후퇴한 것의 대표적 예다.

한편 대다수 인권이 넓어졌는데, 이주자나 이주 아동의 문제는 남의 일로 여기는 경향은 여전한 것 같다. (한국인들이) 인권을 정말 '사람의 권리'로 보기보다는 아직도 국민적·민족적인 관점에서 보는 듯해 그게 아쉽다. 마지막으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문제만큼은, 어렵게 교섭이 진행 중인 만큼 정말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

- 가장 최근 본 인권 침해 사례가 있다면.
"정부는 개혁이라면서 홍보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저성과자 퇴출'이라는 건 오용될 여지가 있다. 사실 이대로 진행되면, (노조 형성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저성과자를 찍어 골라내고 퇴출하는 게 정말 많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집회·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벌금이나 물리적 제약을 받는 경우도 많다. 단지 올해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 독자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  
"그간 책 인세는 무조건 기부해왔다. 이번 책 <심야인권식당> 원고료 또한 책에 나온 인권시민단체 중 한 곳에 기부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간 인권 문제가 멀게 느껴졌던 분들, 또 사회 운동을 하셨던 분들도 되도록 많이 봐주시면 좋겠다.

사실 다들 살다 보면 무력함과 좌절감을 느끼게 마련인데, 그걸 혼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절망조차 함께 말하고 나눠야 우리가 서로 기댈 언덕이 생기지 않겠나. 제가 가끔 힘들어 주모를 때려치운다고 하면 지인들이 제게 그런다. '술방 놔두고 어디로 토끼느냐'고(웃음)." 

○ 편집ㅣ홍현진 기자

#심야인권식당 #인권 침해 #인권활동가 #인권연구소 창 #따비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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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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