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YS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 1만 2천명이 서울대병원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문을 다녀갔습니다.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 문화계 등 각계각층 주요 인사들의 조문 행렬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지요. 야당 총재일 때에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부였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일련의 개혁및 개방 정책의 아이콘이었습니다. 특유의 인간적 소탈함 때문에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분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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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83년 5월, 23일 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던 김영삼 전대통령의 모습. ⓒ 연합뉴스
저처럼 50대의 문턱에 들어선 사람들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YS의 공과 과에 대해서 평가할 수 있지만, 야당 지도자로서의 YS가 아닌 대통령으로서의 YS만 경험한 2040세대들의 경우 이번 YS의 서거를 계기로 그에 대해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1979년 의원직 제명), "나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있겠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나의 양심과 마음은 전두환이가 못 뺏어"(1980년 서울의 봄 직후 가택연금) 등 그의 직설적이면서도 선이 굵은 메시지를 처음 접하면서 기존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깨지고 있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묘한 흐름이 생겨버렸습니다. YS가 역사적으로 재조명되면서 대를 이어 진행된 박정희-박근혜와의 악연,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와 역사 바로세우기로 상징되는 친일 및 독재 청산을 위한 담대한 조치, 민주주의 구현을 위한 목숨을 건 단식, 금융실명제-공직자 재산공개-하나회 숙청 등 선이 굵고 과감한 개혁정책 등이 많은 시민과 네티즌들로부터 새롭게 조명을 받고 다시 한 번 찬사를 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역주행 및 역사적 퇴행에 무감각하고 무기력했던 모습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어왔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도 뻘쭘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YS의 정치적 아들이라고 자처한 만큼 그의 역사 바로세우기를 180도 뒤집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기도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정치적 아버지의 뜻과 노선은 전혀 계승하지 않으면서 오직 정치적 유산만 빼먹으려는 불효자식"이라고 두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아무래도 YS의 아들이자 제자였던 사실이 부각되는 것이 정치적 손익계산 측면에서 보자면 도리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지요.
이처럼 YS 타계로 2015년의 정치적 기류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흥미로운 점은 YS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민주주의 퇴행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현재 우리들이 직접 당면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구요? 이제부터 설명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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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이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에서 조문한 뒤 김 전 대통령 차남 김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제가 대기업 초년병이었던 시절 우리 모두를 즐겁게 했던 유머 시리즈가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최불암 시리즈'이고 또 하나는 'YS 시리즈'입니다. 당시 그것이 얼마나 유명했는지 'YS는 못말려'라는 제목의 책이 교보문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까지 했지요. YS의 단순하고 저돌적인 모습을 당시의 사회 현상에 재미있게 빗대면서 큰 웃음을 주었던 겁니다. 마치 오랜 책장 서랍 속에 있던 연애편지를 발견했듯이 그 시절을 흐뭇하게 떠올리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는 상황에서,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그것이 외신기자든 일반 시민이든 무조건 고발하고 벌을 주고자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오만하고 속 좁은 모습과 콘트라스트를 이루지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2040세대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YS의 민주화 투사 모습이 언론을 통해 일제히 소개되면서 국정화 역사교과서가 과연 YS와 DJ를 어떻게 기술할지 그리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어떻게 기술할지 호기심과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독재 미화, 일제 치하 및 해방 직후 친일파 득세에 대한 역사 세탁 등이 핵심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폄하되거나 삭제되는 역사적 인물과 추앙받고 찬양받는 역사적 인물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어쩌면 3년 후 YS, DJ와 노무현은 허물만 가득한 대통령이 되고, 이승만과 박정희는 물론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까지가 과는 거의 없고 오직 공과 업적만 드높은 대통령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지요. 아!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과거사 뿐아니라 우리가 온 몸으로 경험했던 과거사도 충분히 왜곡 기술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싹트는 거죠.
YS 타계로 인한 불똥이 꼭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만을 정조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야당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2040세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장 위대한 민주화 투사였고,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노 전 대통령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YS의 민주화운동 궤적과 비교해보니 너무도 무기력하고 무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린 거지요. 문재인이 목숨을 건 단식을 했던 적이 있었던가? 의원직을 내려놓을 각오를 하면서 대여투쟁을 치열하게 했던 적이 있었던가? 실의에 빠진 국민들을 위해 강하면서도 선이 굵은 메시지를 던진 적이 있었던가?
이제 결론으로 들어갑니다. 한 마디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여야를 불문하고 남겨진 모든 정치인들에게 두 가지 버거운 숙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와 DJ가 목숨을 걸고 얻어내고 지켜낸 민주주의를 위해 과연 너희들은 무엇을 했는가?", "내가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한 역사 바로세우기가 이대로 후퇴하여 70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이겼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죽은 김영삼이 산 박근혜를 이겼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26일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영결식이 거행됩니다.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그가 이번에는 목숨이 끊어지면서 우리에게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는 살아서도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고 죽어서도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계속 남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복을 기원하며 유가족 분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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