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첫 수요집회, 위안부 할머니는 없었다

[달력 보는 남자] 1992년 1월 8일, 현장에 있었던 김혜원 선생님

등록 2016.01.08 14:39수정 2016.01.08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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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뉴스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뉴스 그 다음은 우리 삶과 '오늘'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다만 쏟아지는 뉴스에 묻혀 잘 안 보일 뿐입니다. 어제 뉴스를 오늘의 이야기로 엮어보겠습니다. [편집자말]
"그는 오키나와에서도 배를 타고 2시간 반가량 가야 하는 도카시키 섬에서 다른 한국인 '위안부' 들과 1944년 12월경부터 이듬해 5월 오키나와가 미군에게 점령당하기까지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였던 비극의 생존자였다. 그는 종전과 함께 미군의 위안녀로 떠넘겨져 갖은 고생을 하였고 거지처럼 사탕수수밭을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한다."

고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 다시 봐도 먹먹했습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단 한 권 남아 있던 이 책을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김혜원 선생님이 쓰신 <딸들의 아리랑>. 때가 때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1992년 오늘(1월 8일), 수요집회(수요시위)가 처음으로 시작된 날입니다. 당시 <한겨레>는 그 날의 현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군요.

"36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공동대표 이효재씨 등 3명) 회원 30여명은 8일 정오께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는 정신대 문제에 대해 공식 사과할 것' 등을 요구하며 1시간여 동안 침묵시위를 벌였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일본 정부가 정신대 존재 사실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할 때까지 수요일마다 일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혔다."(1992년 1월 9일 치 <한겨레>)

"참담하다" 다시 또 "참담하다"

1992년 1월 15일자 <한겨레>. 그 당시 예상은 '오늘'까지도 유효하다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딸들의 아리랑>은 '위안부' 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쓰신 김혜원 선생님은 1세대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운동가, 정신대 흔적을 추적했던 1988년 최초의 일본 답사 여행을 시작으로 위안부 운동이라는 그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걸으셨던 분입니다. 물론, 1992년 1월 8일, 일본 대사관 앞 그 자리에도 계셨었죠.

그래서 '그날'을 다시 맞이하는 소감, 선생님은 "참담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셨습니다. "기가 막히다"라고도 하셨습니다. 휴대전화 넘어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서는 '오늘'의 분노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정말 오랫동안, 그렇게, 정말, 끈질기게, 싸웠는데, 아…. 우리가 보기에는 그래요. '하루아침에 무너진 게 아닌가', 그런 참담함이 있어요. 위안부 문제에 무관심했던 시절이 있었잖아요. 정부는 더욱 그랬었고. 도와주기는커녕 이런 걸 거론하는 자체를 꺼렸잖아요. 그런 시절부터 사명감을 갖고 해왔는데, 그렇게 애썼던 단체들이나 또는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과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어떻게.

물론 의견 차이가 크죠. 정부가 원하는 바와 민간단체나 피해자가 원하는 것과는. 그렇지만 대화를 통해서, 서로 협상을 하고, 의논하고 이렇게 해서 조금 더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전혀 그런 거 없이, 완전히 피해 할머니들을 객체로 밀어놓고, 자기들끼리 그렇게 졸속적으로 했다는 것, 참담하죠."

그날의 김혜원 "너 잘했다" 칭찬해주고 싶어

1992년 1월 8일, 최초의 수요 시위 당시 김혜원 선생님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제공


- 처음으로 수요집회를 했던 날,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실 것 같은데요.
"그때도 엄청 추웠던 거 같아요. 그렇게 추운 날, 지금처럼 호응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지금에 비하면 상당히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라고 할까요? 하지만 그때 그 뜨거운 마음, 그렇게 불타올랐다는 것, 생각하면 참, 그때 참여한 저로서는, '장하다', '김혜원 너 잘했다', 그렇게 날 칭찬해주고 싶어요. 이제는 늙어버려서 추울 때는 잘 나가지도 못하고 이렇지만. 그때 사진, 그때 입었던 내 코트도 다 낡아 없어졌고 그렇지만.

그때는 이렇게 하면 일본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이런 희망을 갖고 시작했던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뻔뻔스러울 줄, 후안무치할 줄, 그때는 전혀 몰랐죠. 우리가 이렇게 끈질기게 외치고 하면, 한 5년 정도 싸우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 저, 정말 그렇게 나이브하게(순진하게) 생각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석었죠.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죠."

1992년 그 날, 비록 할머니들보다는 젊었지만, 선생님의 그때 나이도 57세였습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했던 일에 대해 자신을 칭찬해 줄 수 있는 경우, 얼마나 될까요. 또 그래서일까요. 24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어느덧 우리 나이로 82세, 하지만 선생님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쨍쨍"했습니다.

"목소리는 쨍쨍하죠? 사람들이 그래요(웃음). 얼굴은 조글조글하죠. 내가 시위 현장에 가면 기자들이 와서 나를 위안부 할머니냐고, 인터뷰하겠다고, 그런 적도 있어요. 그동안 그렇게 나도 늙어버린 거죠. 그럴 때 내 심정도 그런데, 할머니들은 오죽하겠어요. 정말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피눈물을 토하겠죠. 이용수 할머니가 막, 외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저 할머니들, 두 번, 세 번 죽이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오마이뉴스> 독자라면, 아니, 지금 소녀상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분들은 아마 아래 사진을 보셨을 겁니다. 지난해 12월 29일, 임성남 외교부 1차관에게 "당신 누구냐, 뭐 하는 사람이냐"라고, "당신이 내 인생 살아 준 거냐"라며 "왜 우리를 두 번 죽이려고 하는 거냐"라고 호통치던 이용수 할머니의 이 모습 말입니다.

[관련기사] 피해 할머니 "당신들끼리 짝짜꿍 했잖아요"

가슴 아팠던 일회용 커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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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달 29일 오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 결과 설명을 위해 서울 마포구 연남동 정대협 쉼터를 찾은 임성남 외교부 제1차관에게 항의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물론 이처럼 당당하게 처음부터 세상과 맞섰던 건 아닙니다. 첫 수요집회 현장, 그 자리에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그때는 자신들이 아주 치욕스러운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셨으니까"요. "누구한테도 그런 걸 내놓고 싶지 않으셔서 꼭꼭 숨어 계셨으니까"요. 그러다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일본대사관 앞에 나오시기 시작합니다. 선생님은 "굉장한 의식의 도약이 필요한 일, 정말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며 그 때를 이렇게 돌아봤습니다.

- 그런 모습을 보면서 어떠셨는지?
"아…. 참…. 굉장히 감격스러웠죠. 고무되고 그랬죠. 그때 일본대사관 뒷골목에 식당들이 많았어요. 시위 끝나고 가서 점심 한 끼 먹거든요? 돈이 없었으니까, 뭐 비싼 것도 못 먹고 그랬는데. 그때만 해도 일회용 커피를 내놓는 경우가 많지 않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어떤 식당에서는 할머니들 잡수시라고 특별히 일회용 커피들이 담긴 봉지를 내놔요. 그러면은.

절대 할머니들 흉보는 거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럼 어떤 할머니들은 그 일회용 커피를 주머니에 막, 이렇게, 찔러 넣어요. 그럼 우리는 '아, 할머니, 그러시지 말라'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저분들이 가난하게, 궁핍하게 살았으면, 저걸 보고 그렇게 좋아서 저러실까. 그런 생각 때문에 안쓰럽고, 가슴이 아팠어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했던 분들, 윤정옥 선생님, 이효재 선생님, 또 김순실씨는 나보다 먼저 가고…."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프지만 또 한편 가장 아름다웠을지 모르는 여행. 1988년 윤정옥 선생님의 인도로 고 김신실 선생님과 함께 나섰던 보름 동안의 일본 여행, "식민지의 터널에서 성까지 식민화했던 일본이 애써 은폐하는 '위안부'의 흔적을 찾고자 나선 답사".

하지만 자비로 경비를 충당해야 했기에 그 사정은 궁색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의 도카시키 섬에서는 부둣가의 덜컹대는 민박집에서 잠을 자며 슈퍼마켓에서 산 김밥으로 끼니를 때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애써 찾아낸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시작한 일이…, 예, 수요집회입니다.

1992년 1월 8일, 그날의 요구사항 여섯 가지

1992년 1월 8일, 최초의 수요시위 당시 발표된 성명서. "앞으로 우리의 6개 요구 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임을 선언한다"고 밝히고 있다. ⓒ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제공


"우리가 처음에는, 일본대사관 주위를 한 바퀴씩 쭉 돌았어요. 대열을 지어 행진했어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그럼 지나가던 버스 승객들이 이렇게 쳐다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이걸 처음 제안한 사람이, 그때 교회여성연합회의 총무였던 윤영애씨라는 분이에요.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아주 난공불락이라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랬는데 하느님의 예언을 받고 거기를 일곱 바퀴를 돌고, 여리고성이 무너졌다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도 일곱 바퀴를 돌자, 그럼 견고한 일본대사관이 항복하지 않을까. 그런 꿈을 갖고 그렇게 돌기 시작했어요."

선생님의 회상을 들으면서 "난공불락"이란 이 표현이 참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정말 그런 건가요? 대체 얼마의 세월이 더 필요한 걸까요. 1992년 1월 8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발표한 6개 요구사항을 다시 말씀해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물론 글자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선생님은 또박또박 말씀하셨습니다.

"그거 신문에 다 나오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이야기 아닌가? (선생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다고 했더니) 아이고, 내가 이제 늙어서 기억력이 왔다갔다 하는데? 그러니까 범죄 사실을 인정하라, 사죄하라, 거기에 따르는 배상을 하라, 역사책에 기록해서 가르쳐라, 그 다음에 추모비를 건립하라. 그 다음에 또 뭐더라. 더 있을 텐데."

- 예, 한 가지 더 있기는 합니다.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혀라. '범죄 사실을 인정하라'나 '역사책에 기록해서 가르쳐라'는 것과도 통하는 것이니까요. 선생님, 그럼 이중에서 무엇이 이뤄졌고, 무엇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범죄 사실, 여러 학자들의 연구나 자료 발굴 등을 통해 아주 빙산의 일각일망정, 그렇게 세상에 밝혀졌지만, 그걸 일본 정부가 한 건 아니죠. 그러니까 일본 정부가 우리의 요구사항을 수락했다, 이런 건 아니죠.

그렇게 보면 아무것도 이뤄진 게 없는 거죠. 공식적인 사죄도 우리로서는 불만이죠. 뭐, 문서로 한 것도 아니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하기에는 미흡한 게 너무 많잖아요. 거의 이뤄진 게 없다고 보는 거죠. 내가 너무 원칙주의자인가?(웃음)"

"신문 보고 막 울었다... 그 더러운 돈 뭐하러 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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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나비 네트워크 등 대학생들이 비를 맞으며 평화의 소녀상 비를 맞으며 주변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이희훈


선생님은 "민간 단체나 피해자들이 요구했던 여섯 개 조항과 이를 완강히 부인하는 일본과의 격차는 정말 엄청난 것"이라며 "합의에 이르기 힘든 의제인 것은 틀림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독불장군처럼 싸운 게 아니잖아요. 국민적 성원에 힘입어 해왔죠. 또 지금까지 이 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건, 해외단체들, 또 일본의 뜻 있는 시민단체들의 도움과 협력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운동에는 아주 큰 역량과 에너지가 축적이 돼 있는데, 이걸 어떻게 그렇게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일본이야 그렇다 치지만, 우리 한국 정부가 어떻게 그런 정치적인 흥정을 할 수 있는가. 진짜 배신감 느끼죠.

그래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소녀상 지키자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신문 보고 막 울었어요. 대학생들이, 젊은이들이 소녀상을 밤새 지키고, '너무 추워서 한숨도 못 잤다',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 가슴이 아팠고 감동스러웠어요. 옛날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우리 같은 나이든 사람들밖에 없었잖아요. 지금 우리들은 다 이렇게 쪼그라졌는데, 젊은 세대들이 나와서 그 추위에 떨면서 하고 있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합의했다? 그걸로 절대 끝나는 건 아니다."

- '이제 그만 좀 하라'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도 있는데요.
"그분들이요, 이 내용을 자세히 모르니까, 그동안 어떻게 싸워왔는지 모르니까 그러시는 거죠. '지겹다' '그만 할 때 되지 않았냐' '할머니들 금방 돌아가신다, 그러니까 그 전에 조금이라도 보상해야 되지 않냐' 그러시는데, 할머니들, 그전처럼 그렇게 가난하지 않아요. 또 그전처럼 외롭지도 않아요. 불쌍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 그 분들에게 필요한 건 명예를 회복해 드리는 거예요. 전쟁 범죄에 대해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는 것이 그 분들에게는 큰 위로와 희망이 되죠. 돈은 우리 국민이 모금해서 드리면 되는 거 아닌가? 일본 돈 받지 말고 우리 국민이 모금해서 드리자, 저는 대찬성이에요. 그 더러운 돈 뭐 하러 받아요? 그냥 돈으로 우리를 흥정하려고 하는…(잠시 말씀을 멈추더니)… 살짝 흥분했네(웃음)."
덧붙이는 글 바쁜 와중에도 취재에 협조해주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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