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결혼에 대한 단상

등록 2016.01.12 11:34수정 2016.01.12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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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웃마을 두 할머니께서 운영하는 '할머니집'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나는 짙게 끓인 김치찌개가 그리운 날 간혹 그 할머니집을 찾습니다. 하지만 아내가 일찍 퇴근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걸어서 갈 만한 거리는 아니기때문에 아내의 차가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손이 큰 두 할머니께서 끓여내는 김치찌개는 아내와 둘이 먹고도 반은 남아서, 남은 것을 담아오지요. 그것은 다시 다음날 아침, 저의 1식1찬 밥상의 1찬이 됩니다.

오늘 아침, 그 김치찌개 포장을 풀다가 그 식당의 옆테이블에서 생오겹살을 먹던 한 가족이 불쑥 생각났습니다.

저희 부부의 식사가 거반 끝나가는 중에 들어온 그 가족은 3살, 5살 정도의 두 사네아이와 아빠, 엄마의 일가였습니다.


엄마는 20대 중반의 동남아 여인, 아빠는 40대 후반쯤의 한국인이었습니다.

몇 해 전 여름, 고향을 방문했다가 고속도로를 타는 대신 삼도봉 자락을 돌아 귀경했습니다. 경북 김천, 충북 영동, 전북 무주의 삼도 경계에 위치하므로 삼도봉(三道峰)이라는 이름은 얻은 백두대간 상의 산입니다.

그 산 아래의 한 오미자 농장에 들렸습니다. 저희 부부를 맞은 분이  20대 후반의 베트남 새댁이었습니다. 오지인 제 고향보다 더 깊은 산중에서 만난 앳된 얼굴의 두 아이 엄마의 서툰 한국말에 내심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2

지난해 말, 오래전에 이혼한 지인이 뒤늦게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여생의 동행으로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살다온 사람입니다. 남편이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장성한 일본인 전처 자식들이 남은 유산을 모두 가져가서 일본에서 살아갈 기반을 잃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귀국해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부끄럽다고 시골오지의 빈집을 얻어서 홀로 개 2마리와 남의 밭일을 도우면 살던 사람입니다. 참 순박해요."

한때 한국 여성들이 일본으로 시집가는 국제결혼이 성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개는 일본 농촌의 노총각이 그 상대였습니다.

지금도 도로변에 내걸린 '국제결혼정보업체'들의 플래카드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주로 중국교포 여성이 그 대상이었던 초기의 국제결혼에서 베트남과 태국의 동남아,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등 북아시아와 동유럽권의 백인들까지 결혼시장의 범위가 넓어졌음을 그 광고문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족 여성들이 대거 한국으로 들어올 당시 둥베이삼성(東北三省)의 조선족총각들은 처녀가 없어 장가를 갈 수가 없다는 하소연을 듣곤 했습니다.

문화와 민족이 섞이는 교류는 되풀이되는 역사의 노정이라고는 하지만 친정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기위한 어린 소녀의 희생이 결혼이여서는 안될 일입니다. 한 가정을 이루는 축복은 일방의 축복이 아니라 모두에게 축복이어야 할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국제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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