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이란 사람, 어떻게 그런 아부성 발언을..."

[인터뷰 ①] '위안부' 운동 선구자, 김혜원 선생님의 인생을 바꾼 '여행'

등록 2016.01.29 21:04수정 2016.01.29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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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실행위원 ⓒ 이희훈


지난 21일, 김혜원 선생이 카톡으로 보내 온 사진 ⓒ 김혜원 제공


"엄동설한. 곱던 장미는 말할 것도 없고 서리 속에서 오히려 청초하던 국화도 자취를 감춘 이 추운 날, 사람 꽃들이 싱그럽게 피어난 기적의 현장을 아시나요? 오늘 저녁 우리 네 사람들은 그 꽃송이들의 향내에 잠시 취했다 왔답니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심장 약한 울 아우님 행여 상할세라 인왕산 자락 휩쓸고 몰려오는 밤바람 피하여 발걸음 재촉했답니다. 기울어진 역사, 기울어진 여성인권 바로 세우겠다며 밤샘 농성하는 청춘 꽃들은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 무더기로 피어 있습니다. 그 현장을 찍어 올렸습니다."

최근에 받은 카톡 메시지 중 가장 아름다운 글이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찍어 보낸 사진 두 장도 훈훈했습니다. 소녀상과 함께 서 있는 사진 한 장, 그리고 소녀상을 지키는 젊은이들과 함께 V자를 그리며 찍은 사진 한 장. 지난 21일 저녁 8시께 김혜원 선생님(82·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실행위원)이 보낸 글과 사진이었습니다.

바로 전날 선생님을 만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친구들과 함께 핫팩을 사고 뜨거운 커피 끓여서 소녀상을 지키는 청년들에게 가려고 했는데 너무 추워서 못 가고 있다"며 "생각만 하고 실천은 못하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한편, 자책하는 모습을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카톡은 인터뷰 때 하신 말씀을 실천했다는 '인증샷'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박근혜 대통령과 반기문 사무총장 강도 높게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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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전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실행위원 ⓒ 이희훈


앞서 수요집회가 처음 열렸던 날(1월 8일)을 맞아 전화로 인터뷰를 하고 다시 선생님을 만났던 건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1세대 정대협 운동을 대표하는 사람 중 한 분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30여 년 동안이나 교도소에서 사형수 교화 활동을 하신 분입니다. 마흔이란 나이에 어떻게 또 그 길을 걷게 되셨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관련기사] 92년 첫 수요집회, 위안부 할머니는 없었다

인터뷰는 연쇄살인범 김대두와의 편지 교환으로 시작된 교화 활동으로 시작해서, 당연히 사형제 폐지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국가의 '책임'을 논하는 순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즘 청년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소녀상을 지키는 청년들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때까지 비교적 담담하게 말씀을 나누시던 선생님의 음성 또한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지요.

선생님은 '왕좌'라는 표현을 쓰면서 박근혜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쌓아올린 투쟁의 토대에 본인은 딱 왕좌에 앉은 것처럼 해서 일본과 값싼 흥정을 해버렸다"고 평가했습니다. '위안부' 합의를 칭찬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 대한 비판도 셌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UN 사무총장이란 사람이 인권 문제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박근혜 대통령 편을 드는 아부성 발언을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선생님의 이와 같은 분노는 당연한 것입니다. 정신대란 말 자체가 생소했던 1988년, 그때부터 윤정옥 선생님, 고 김신실 선생님과 함께 '위안부'의 흔적을 직접 찾아 나섰던 선생님이니까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그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어 오셨으니까요. 사형수 교화위원으로서의 삶 이야기에 앞서, '위안부' 문제 합의와 관련한 선생님의 통렬한 비판을 먼저 소개합니다.

김혜원 선생님은...
'위안부' 운동의 선구자, 정대협 창립 멤버


김혜원 선생은 정대협 창립 멤버로 '위안부' 운동의 선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992년 1월 8일 수요집회가 처음 열릴 때부터 함께 참여했으며, 정대협에서 사료관 건립준비위원장, 할머니 복지위원장, 교육위원장, 재정위원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96년 '위안부' 문제 UN 인권위 상정, '위안부' 운동을 세계적으로 확대시키는 직접적 계기가 됐던 2000년 '여성국제법정' 개최, 2007년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위안부' 결의안 채택 등 17년 동안 정대협 운동의 굵직굵직한 역사를 함께 썼다.

특히 정대협이 출범하기 전인 1988년에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소속으로 윤정옥 선생(정대협 초대 대표), 김신실 선생과 함께 일본 오키나와에서 훗카이도까지 정신대 발자취를 추적하는 답사에 나서 일본군 '위안부'임을 최초로 밝힌 피해자 배봉기 할머니 등을 만나 증언을 들었고, 이후에도 김경순 할머니, 강덕경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세상과의 '가교' 역할도 함께 했다.

2007년 정대협 활동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2012년 '전쟁과 인권 박물관 건립위원', 2013년 위안부 생존자 복지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맡는 등 '위안부' 운동과 그 궤를 같이 하는 활동을 계속해 왔다. 저서로는 정대협 운동 20년사를 기록한 <딸들의 아리랑>, 사형수 아홉 명의 이야기를 담은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등이 있다. 최근에는 수필집 <상상팔십>과 자서전 <외진 들에 피다>를 출간했다.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 수난과 고통을 내 가슴에 옮겨 받는 것"

"(소녀상을 지키고 있는 젊은이들 이야기가 나오자) 너무나 훌륭하지. 그들이 우리의 희망인 것 같아요. 정부로부터 배신을 당한 참담한 느낌이지만, 우리 새싹들이 꽃송이처럼, 거기를 지키겠다고 하는 걸 보면, 다시 한 번 늙은 기개라도 일으켜야겠다고 결의하게 되니까요. 친구들과 함께 핫팩 사서, 뜨거운 커피 끓여서 가려고 했는데, 너무 추워서 못 가고 있네. 생각만 하고 실천은 못 하고 있네."

- 소녀상을 지키는 젊은이들에게 지금 꼭 해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장하다, 정말. 너희가 있어서 살맛이 난다. 하지만 한 번으로 끝나는 거 아니니까, 저 끈질긴 아베와 한국 정부, 이런 사람들하고 맞서야 하니까, 절대 속전속결은 안 된다. 장기전이다. 그러니까 욱하는 마음으로 끝내지 말고, 몸 잘 챙기면서 계속 가자. 이런 말하면서 막 안아주고 싶고 그래요."

- '위안부' 흔적을 찾기 위해 나섰던 1988년 여행, 마음이 통하는 여성 세 분이 함께 길을 나섰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여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물론 어울리는 표현은 아닙니다만.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했죠. 외국에 가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으니까. 잘 산다는 일본 관광도 좀 하고, 증언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으로 갔어요. 그런데 귀국 길에 비행기 안에서 고민을 참 많이 했어요. 듣는 이야기마다 아팠으니까. 탄광에서 얼어죽고, 굶어 죽고, 매맞아 죽고 했다는 이야기. '위안부'로 끌려가서 어떻게 했다는 이야기. 듣는 이야기마다 다 가슴 아픈 이야기잖아요.

그 때, 정말, '내가 왜 이런 가슴앓이를 해야 하나. 나같이 평범한 사람, 그저 평범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왜 이렇게 내 돈 써 가면서, 이렇게 가슴에 돌덩어리만 안고 돌아오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그러다 마침 시 구절이 하나 생각나더라고. '조국을 향해 슬픔과 분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렇구나. 조국을 사랑한다는 건, 이렇게 민족이 당한 이런 수난을, 이 고통을, 내 가슴에 옮겨 받는 거구나. 이 일에서 발 빼지 말자. 그래서 계속한 거예요."

"왕좌에 앉은 것처럼 해서 그런 값싼 흥정을"

- 결국 국가는 가만히 있었잖아요. 민간이 나서서 '위안부' 문제 제기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데요.
"그렇죠. 그러니까 한심스럽고, 기가 막히죠. 그렇게 치열하게, 사실 우리 돈도 많이 썼어요, 남편이 들으면 안 되는데(웃음). 내가 참 어렵게 아들을 얻었거든요. 딸 셋 낳고 '아들 낳기 전선'에서 진짜 안 해 본 것 없이 해서 그렇게 얻은 아들이었는데, 그 귀한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식 날, 그때 일본으로 떠났던 거예요. 딱 그 날에 걸렸어. 진짜 미안하더라고. 그래서 아들에게 그랬죠. 엄마가 민족의 엄마가 될까, 아니면 너의 엄마가 될까(웃음). 고등학교 졸업하는 아들한테 그래놓고 그냥 떠났어요."

- 그때 아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아들은 뭐, 그냥,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미안하지. 엄마로서는 내가 빵점 짜리 엄마지. 그렇게 치열하게 한 거 잖아요? 그렇게 활동가들이 치열하게 해서, 그로 인한 축적이 있었기에, 그 토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일본과 당당하게 맞서고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거 잖아요? 자신들이 싸워서 그만큼 쟁취한 게 아니잖아요. 오히려 잠잠하길 원했잖아요. 한 푼 지원해 준 것도 없었고.

그랬는데, 우리가 그렇게 쌓아올린 토대에서, 자신이 딱 왕좌에 앉은 것처럼 해서 저렇게 일본하고 값싼 흥정을 해버렸잖아요. 그 토대를 쌓았던 활동가들, 이런 사람들하고는 사전에 논의도 없이. 물론 반대하리라고 생각했겠죠. 골치 아프니까 다 배제했겠죠. 그래도, 접점이 뭘까,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더 좋게 만들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그냥, 정말로 기가 막혀요. 고노 담화보다 더 후퇴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그런 합의를 '불가역적이다' 이런 소리까지 해놓으니까. 이제는 정말 UN 인권위원회에 가서 다시는 이런 얘기도 못하게 만들어놨잖아요. 물론 민간차원에서는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정부차원에선 이젠 다시 안 하겠다는 이야기 아냐."

선생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반기문이란 사람, 어떻게 그런 아부성 발언을 해요?"

"그러니까 아베는 계속 큰 소리 치잖아요. 한국 정부가 합의 사항 이행 안 하면 국제 사회에 발을 못 붙일 거란 식으로, 이런 망동이 지금 계속 나오고 있잖아요. 어떻게 저렇게 가해자가 큰소리치게 역전시켜놨냐 이거지, 기가 막힌 일이죠.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앞으로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마이크를 잡게 하고, 외치게 만들고, 통탄하게 만들고. 이런 일이 역사의 후퇴지, 진전입니까.

또 반기문이라는 사람은, 잘 된 일이라고 아주 칭찬을 하고. 어떻게 UN 사무총장이 인권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안일한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해요. 어떻게 그렇게 미국 편을 들고 박근혜 편을 드는 그런 아부성 발언을 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물론 본인을 UN, 그 자리까지 올려 준 것이 미국의 힘이고, 한국 정부의 힘이라고, 그 은혜를 갚으려고 그러는지 몰라도. 그래도 그게 어떤 자리인데.

그동안 자신이 뭐 뚜렷하게 인권 향상을 위해, 세계 인권 복지를 위해, 뭐 뚜렷하게 해 놓은 게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자기 자신의 위상을 추락시키는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 본인에게도 굉장한 마이너스죠."

* 김혜원 선생님 인터뷰 ②편, '우울증 주부 인생 바꾼 사형수의 편지(가제)'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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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이희훈입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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