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조용히' 없는 도서관과 이별중입니다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54] 함께 끓이는 돌멩이국, 작은도서관살이 2년을 돌아보며

등록 2016.02.10 16:22수정 2016.02.1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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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전쟁과 가난으로 아무도 인사하지 않는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 흘러온 나그네 세 사람은 삭막한 마을 공터에서 돌멩이국을 끓이기 시작한다. 돌멩이로 국을 끓이는 기이한 행동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좀 더 맛있는 국을 위해 각자가 지닌 식재료를 내어놓는다.

나그네의 작은 솥은 마을 사람들 모두 먹을 수 있는 마을의 큰 솥으로 바뀌고 달랑 돌멩이 뿐이던 멀건 국은 갖은 야채와 고기로 따뜻하고 풍성한 국이 된다. 모두가 함께 끓인 돌멩이국을 나눠먹으며 사람들은 비로소 이웃이 되고 마을을 이룬다는 옛이야기. 전해지는 나라에 따라 '못스프'이기도 하고 '단추로 끓인 국', '돌멩이스프'이기도 하다.


낯선 마을에서 돌멩이국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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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도서관 <함께크는우리> 도서관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정선옥


우리 가족에게도 '돌멩이국'같은 존재가 있다. 서울의 동쪽끝, 5호선의 끝 상일동역에 내려 고덕시장 골목 모퉁이 오래된 상가 건물 2층에 자리한 작은도서관 <함께크는우리>(아래 함크)가 바로 그렇다. '함크'를 처음 만난 건 2년 6개월 전 어느 늦은 여름날이었다.

서울살이 20년, 이젠 제법 들키지 않게 서울말도 쓰고 지하철노선도 없이도 지하철을 잘 타고, 동네 이름만 들어도 어디인지 대강 그려지는 서울 사람이 되었다. 전형적인 서울 남자와 결혼해 서울에서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며 내 인생의 절반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지리산 촌년인 나도 반은 서울 사람인 셈이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은 낯설고 타지, 거대한 육식 공룡 같은 곳이다. 

2년 반 전 서울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이사를 왔다. 길 하나 건너면 경기도인 서울의 동쪽 끄트머리에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짐을 풀고 새로운 서울 살이를 시작했다. 첫째도 유치원에 다니기 전이었고 막내는 6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라 새 동네에 어떻게 적응을 해야 하나 막막하기만 했다. 이사 온 지 한 달이 다 되도록 아는 이웃 한 명 없이 외롭게 아파트에 갇혀 살았다. 그러던 중 보물처럼 만난 곳, '함크'

놀이터 같은 도서관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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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오후 뭐니뭐니 해도 도서관은 책 읽는게 제일 재미있지요 ⓒ 정가람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간판으로 붙어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탁 트인 공간에 벽면 가득 책이 꽂혀 있다. 20년 역사가 반질반질한 손때로 묻어 있는 넓은 테이블도 놓여 있었다. '도서관'이라는 단어에 긴장하며 문을 열었는데 한쪽에선 아이들이 우당탕 뛰어다니며 칼싸움을 하기도 하고, 또 한쪽 구석에선 아이들이 자기만의 세상에 파묻혀 책을 읽는다. 여자 아이들은 종이를 오리고 붙이며 소꿉놀이를 하고, 엄마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소리 내어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쉿 조용히! 독서 중'이라는 경고 메시지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동안 겨우 기어 다니는 막내와 아직 글자를 모르는 어린 두 아이와 함께 공공 도서관에 가면 후다닥 책만 빌려오기 바빴다. 책을 골라 대여하는 그 잠시 동안에도 보채고 떠드는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진이 빠져 도서관 나들이가 쉽지 않은 때였다. 그러던 차 만난 작은 도서관은 무척 반가웠다. 세상에 놀이터같은 도서관이 있다니!

처음 만난 동네 아이들이었지만 아이들은 금방 친구가 되어 도서관 구석구석을 누비며 놀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기어 다니는 아기들끼린 그들만의 언어로 친구가 되었고 어른들도 엄마라는 공통분모로 이야기의 물꼬를 트며 일상을 나누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마을의 공간을 찾게 되자 그동안 마음 속으로 생각만 하던 일을 펼칠 용기가 났다.

도서관을 잇는 작은 모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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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님과 평화그리기 작은도서관엔 작가님들도 오시지요-이억배 작가와 ⓒ 박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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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크동동축제 시장상인들과 골목에서 함께 한 마을 축제 ⓒ 박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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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희네집>을 읽고 책놀이 이사가는 친구를 위해 모두가 함께 만든 마을 지도 ⓒ 정가람


작은도서관엔 비교적 아이들이 적게 오는 오전 시간을 이용해 엄마들이 자유롭게 동아리를 꾸려가고 있었다. 육아품앗이 '도토리', 인문학 독서모임 '벼와 보리', 바느질모임 '꼬매', 천연화장품만들기 '천연미인', 가족합창단 '화모니', 영어회화 '줌마영어' 등 다양한 동아리가 활동 중이었다. 마을극단 '밥상'도 함크의 동아리로 등록하고 자리를 펼쳤다.

함크의 오후는 아이들을 위한 시간으로 운영된다. 자유롭게 놀며 책을 보는 것을 기본으로 책놀이, 절기행사, 숲학교, 책만들기, 바깥놀이터, 발도로프 수공예, 대안학원, 청소년동아리모임, 청소년미디어, 도서관축제, 여름캠프 등 다양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년 전엔 아이들이 어려 선뜻 끼지 못하다 첫째가 일곱 살이 되고 막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법을 깨치면서 비로소 우리 가족도 좀 더 적극적으로 도서관 여러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크의 프로그램들은 전문 선생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수업도 있지만, 주로 엄마들의 봉사로 이루어진다. 아기띠 졸업을 하면서 손발이 자유로워지자 나도 구연동화를 했던 어릴 적 경험을 살려 책읽기 봉사를 하며 도서관 오후의 작은 조각 하나를 채우곤 했다. 그렇게 함께 하는 시간을 2년 동안 차곡차곡 쌓으며 함크의 너른 테이블에 우리 가족의 손때도 묻혀갔다.

'돌멩이국 마을육아'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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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간식은 치킨! 자는 아인 못먹어요~ ⓒ 정가람


지금은 가장 가까운 이웃사촌 함크가 되었지만 처음부터 이미 '도서관 가족'을 이룬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엔 문턱이 조금 높게 느껴졌다. 정기적인 모임을 하며 자주 도서관을 드나들며 가벼운 눈인사를 차 한 잔으로, 밥 한 끼로 이어가고 도서관 행사에 함께 하는 시간의 노력을 도서관 모두와 함께 쌓다보니 낯가리던 전학생도 어느새 가족이 되어 내 아이 남의 아이 가리지 않고 책을 읽어주고 밥을 먹여주는 이모가 될 수 있었다.

함크를 중심으로 알게 된 이웃들은 거창하게 '공동육아'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도서관에 자유롭게 모여 책을 보고 때가 되면 함께 밥상을 차려 먹었다. 자연스럽게 바쁜 이웃의 아이를 대신 돌봐주고, 찬거리를 나눠 먹고, 작아진 아이들 옷을 물려주고 있다. 도서관 이름처럼 '함께 크는 우리'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은 모두 '우리 마을 아이'가 되는 함크 의 '마을육아' 덕분에 지리산 촌년도 서울살이 20년 만에 드디어 이웃이 생겼다.

지역 특성상 원주민보다는 뜨내기 전세민이 더 많은 변두리 서울 동네에서 '우리마을', '이웃사촌'은 쉽지 않을 줄 알았다. 2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마을과 육아의 대를 이어 끓여온 함크의 '돌멩이국'은 기꺼이 지역을 위해 공간을 활짝 열어준 열린사회시민연합 강동송파시민회와 내 집처럼 도서관을 꾸려온 엄마들의 한결같은 노력의 산물이다.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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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크의 나무와 나무들 우리 모두 '더불어 숲'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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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역소식지 '발검음'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지요 ⓒ 정가람


그러던 함크가 요즘 이별을 겪고 있다. 몇 해 전부터 강동구는 30년 된 아파트 재건축이 차례로 진행 중이다. 주로 고덕주공아파트 식구들이 많은 함크는 작년 봄부터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면서 모이면 이사 이야기였다.

주공 2단지 이주에 이어 3단지 이주까지 결정나자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세값을 견디지 못한 30,40대 도서관 식구들 중 많은 가족들이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의정부, 남양주, 구리, 경기도 광주 등으로 이사를 가고 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길목과 찬거리 사러 들르는 시장 모퉁이에 있던 동네 사랑방 같은 도서관이었는데 이젠 차를 타고 일부러 시간을 내어야 들를 수 있는 곳이 되어버렸다.

함크의 창문을 열면 이주가 끝나 버려진 주공2단지가 보인다. 단지 안의 울창하던 나무들도 겨울을 맞아 쓸쓸한 나목으로 서 있다. 봄이 되면 철거가 시작되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오래된 동네는 처음 보는 모르던 동네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사 간 도서관 식구들이 새로 지어진 아파트로 돌아와 예전처럼 함크에서 함께 책을 보고 밥을 나눠먹지 못할지도 모른다. 

재건축의 광풍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새 동네는 곧 우리동네가 될 것이고 함크에서 함께 했던 날들을 그 곳의 이웃들과 나누며 그 동네만의 작은 도서관을, 돌멩이국을 끓일 것이다.

고 신영복 선생님께서 즐겨부르신 '시냇물' 노래를 부르며 함크에서 뻗어나간 이웃들의 새 동네를 그려본다. 저마다의 동네에서 다시 뿌리를 내리고 나무를 키울 이웃들에게 이별의 인사 대신 고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눌러 써본다.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추신.
세상의 그 어떤 도서관보다 시끄럽고 사건 사고도 많지만 '내 아이가 아닌 남의 아이를 오랜 시간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값진 경험'이라며 모두를 품어주시는 우리의 친정언니 정선옥 관장님. 재건축으로 흩어진 도서관 가족들이 많지만 관장님의 소원대로 우리 다같이 환갑여행 꼭 가요.
#함께크는우리 #작은도서관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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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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