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 어린 국회의원
고개 숙인 청소노동자

[서평] 국민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등록 2016.02.09 10:32수정 2016.02.0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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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데, 이들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단지 의회 구성원을 뽑는 선거 기간뿐이다. 일단 의원이 선출되는 즉시 국민은 노예가 되어버린다." - <사회계약론>에서, 장 자크 루소

총선이 다가온다. 국회 구성원을 뽑는 날이다. 루소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곧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노예가 된다. 이보시오, 기자 양반. 노예라니, 아니 내가 노예라니! 하지만 어쩌랴. 아이러니하게도 선거는 현행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중추다.


벌써 많은 이들이 거리에서 예비후보 띠를 차고 목소리를 높인다. 허리가 아플 법도 한데 연신 인사를 해댄다. 쥐여 주는 조그만 종이엔 웃는 후보자의 사진과 함께 빼곡히 글씨가 채워져 있다. 이미 그의 주변에는 땅에 떨어진 종이가 수북하다. 주고, 받고, 버리고, 또 주기가 반복된다.

피로하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음악 소리와 함께 스피커를 통해 쏟아지는 특유의 기계음 섞인 목소리가 거리를 메울 것이다. 누군가는 평소 가지도 않던 시장으로 달려가 어묵 한입 베어 먹으며 '먹방'을 찍는 데 혈안이 될 거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어차피 지키지도 않을 공약 떠들어봐야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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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권정치와 소수특권주의에서 벗어난 새로운 민주주의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 갈라파고스

어차피 선거 끝나면 돌변할 게 뻔하다. 고개 숙인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 앞에 섰던 한 국회의원의 노기 어린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의원도 선거운동 기간에는 "마당쇠처럼 일하겠다"며 고개를 숙였을 텐데. 에라, 될 대로 되라지.

공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민주주의에, 특히 대의 민주주의에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이른바 '민주주의 피로 증후군'이다. 책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를 쓴 문화사학자 레이브라우크는 따져 묻는다.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문제에는 그토록 주저하면서 왜 각종 로비나 연구 집단, 온갖 종류의 이익집단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받아들이는가? 따지고 보면 평범한 시민들이야말로 모든 정책 수립에서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인데 말이다." - 200쪽


그래, 맞다. 그런데 평범한 시민들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민주주의 피로 증후군'도 치료하고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가 정책 수립에 참가할 방법이 있다. 책은 이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당신의 피로는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 탓

저자는 먼저 '민주주의 피로 증후군'의 원인을 찾는다. 크게 네 가지다. 정치가들 탓, 민주주의 자체의 결함 탓, 대의 민주주의 탓, 마지막은 책의 주요 논점인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 탓이다.

우선 정치가들 탓, 민주주의 자체의 결함 탓, 대의 민주주의 탓에 대해 살펴보자. 책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은 결국 각각 '소수', '다수', '자유'를 위협한다.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는 정치가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포퓰리즘'이 필요한데 이는 '다수의 독재'를 초래해 소수를 위협한다.

피로가 민주주의 자체의 결함이라고 본다면, 민주주의적 방식을 대체할 '관료주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한데 이 또한 엘리트 소수들만의 의사결정이 국민을 배제할 위험성이 있어 옳지 않다.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정부일 뿐 아니라 국민에 의한 정부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의 민주주의가 아닌 직접 민주주의는 어떨까. 책은 지난 2011년 미국에서 진행됐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을 예로 들었다. 당시 참가자들의 구호가 "우리가 뽑은 대표들이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다"란 점을 소개하며 '반의회주의'가 팽배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저자는 격렬한 반의회주의가 마지막으로 유럽에 등장했던 때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라며, 이를 이용했던 건 파시즘이었다고 주장한다. '점령하라' 운동 참가자들 역시 가슴 속 응어리를 표출하며 훈훈한 감정을 느꼈을지 몰라도 궁극적으로 '의회 폐지'를 바라진 않았다고 했다. 책 역시 "불편함에 대한 치료책이었다기보다는 그 불편함을 드러내는 계기였다고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럼 문제는 하나만 남는다. 당신의 피로감은 선거를 통한 대의 민주주의 탓이다.

선거로 진짜 국민의 대변자를 뽑을 수 있는가

우리는 모두 선거 근본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피로감 증후군의 첫 번째 원인이다. 우리는 선거에서 뽑힌 선량들을 경멸하면서도 선거 자체만큼은 숭배한다. 선거 근본주의라고 하면 민주주의란 선거 없이는 상상도 할 수 없으며, 선거야말로 민주주의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아니 가장 근본적인 전제라는 믿음을 뜻한다. - 64쪽

저자는 미국혁명이나 프랑스혁명을 "서민계급을 진정시키면서 새로운 상층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거기다 '상층 부르주아 계급'이 "소수특권 정치의 잔재"인 선거를 통해 정당성까지 부여받았다고 지적했다.

책에 따르면 선거는 금권정치와 소수특권주의를 뒷받침할 뿐이다. 분명 국민의 대다수는 노동자일 텐데, 대변하겠다고 선출된 이들 대다수는 노동자나 서민 출신이 아니다. 뭔가 모순이지 않은가.

책의 주요 분석 대상은 유럽의 정치 지형이지만,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버스비도 모르던 이가 집권여당 대표를 지냈다. 이번 총선을 겨냥한 여당의 첫 영입인사(비난이 일자 '본인들이 찾아왔다'며 괴상한 해명을 했지만) 여섯 중 넷이 법조인이다. 다시 묻는다. 선거는, 진짜 국민의 대변자를 뽑는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미국혁명도 다르지 않지만, 프랑스혁명은 소수특권 정치를 몰아내고 이를 민주정치로 대체한 것이 아니다. 두 나라의 혁명은 상속에 의한 소수특권 정치를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한 소수특권 정치, 즉 루소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선거에 의한 소수특권 정치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 125쪽

그래서 저자는 차라리 선거 대신 '제비뽑기'를 하자고 주장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적 사건들과 여러 나라의 사례를 소개하며 고정관념을 깨나간다. 종국에는 제비뽑기와 선거의 결합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하며 "민주주의가 더 원활하게 작동할 것"이라 단언한다.

서민들은 최소한 버스비는 안다

물론 저자도 제비뽑기에 대한 대중의 염려를 잘 알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비뽑기로 선출된 자들이 무능하리란 추측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긍정적"이라면서도 이에 대한 반론을 폈다.

오늘날 제비뽑기를 통해 선발된 시민들에 반대하는 이유는 과거에 노동자 또는 여자에게 투표권을 줘서는 안 된다는 논리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도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면 "민주주의는 끝장날 것"이란 비난이 일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각 개인은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삶에서만큼은 전문가들이라고 했다. 서민들은 최소한 버스비는 안다는 것. 아울러 선거를 통해 당선된 사람들이라도 언제나 유능한 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거기다 (현재 국회의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돕는 보좌관, 학자, 연구소 등 전문가팀이 기술적 자문을 지원한다면 충분하리라고 내다봤다.

차라리 제비뽑기로 선발된 시민들은 선거운동에 동원되거나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며 시간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 정당 안에서 계파 갈등에 휘말릴 필요도 없고 재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온전히 입법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헛소리라고? 그래, 좋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불평만 하며 행동하지 않는 이보다 남에게 헛소리로 보일지언정 현실을 개선하려 노력하는 이가 필요하다. 생각해보자. 계속 이대로, 괜찮은가. 저자의 진정한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 혁신에 대해서 도통 아무런 질문도 나오지 않는 나라들이야말로 정말 불행하다." - 198쪽
덧붙이는 글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지음 /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펴냄 / 2016.01 / 1만 3500원)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 지음, 양영란 옮김,
갈라파고스, 2016


#갈라파고스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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